올해부터 서울대교구 초등부에 교구 성가잔치가 없어진고로
지구 잔치는 그야말로 경쟁이 완전히 없어진 장기자랑 잔치가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작년 우승팀인 우리가 불참하자니 체면이 아니지 싶어
날짜를 한달 앞두고 어린이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적극적이었던 아이들,
작년에 함께했던 아이들을 모으는 건 별 문제가 없었는데
남자아이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시큰둥...
결국 신부님의 회유와 협박으로 복사단 남자아이들이 대거 합류하였는데,
당초 기획했던 노래와 율동은 이 아이들에게 씨도 안 먹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담당 선생님이 못 나오신 날 연습에 들어가 봤더니
남자아이들은 노래 중간에 ’우후~!’ 하고 자기들끼리 장난치기 바쁘더군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회사에서 하던 가락을 응용하여
립싱크 밴드를 만들자는 것이었지요. ㅎㅎd
- 11월 9일 토요일 회합시간 -
나 왈 "남자아이들은 좋아할 거예요.
스티로폼판에 하드보드지 붙여서 기타 만들면 되죠."
교감 왈 "한번 쓰고 말 건데 하드보드지는 오바 아니에요?"
나 왈 "(흥분해서)한번 쓸 거라도 폼나게 만들어야지. 내가 다 한다니까!"
(이쯤에서 이건 예의가 아니라는 어느 분의 지적이... 앗 죄송...)
결국 문 닫힌 건재상 옆 분식집 아저씨께 사정해서 스티로폼 판을 하나 사고
하드보드지는 못 붙이고... 그렇게 일렉기타와 베이스기타를 만들고,
항상 우리를 도와 주시는 청년회장님 집에 있는 pc게임용 드럼을 빌려다가 구색을 맞췄습니다.
비록 기타는 가짜지만 몸체와 네크에 나사못을 꽂아넣어
못을 돌리면 기타줄이 조여져 ’둥둥’ 소리도 나게 만들었답니다.
토요일 오후. 남자아이들의 대거 지각으로 담당선생님 화나시어
미사 전에 온 두 아이를 마구마구 혼내면서
남자아이들을 다 빼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속으로 ’우쒸~ 기타도 만들었는데...’ 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본 다음
(순전히 기타 만든 게 아까워서 ㅠㅠ)
아이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참가하는 쪽으로 입을 맞췄습니다.
어린이 미사 때는 일단 여자 어린이들만 무대에 섰습니다만,
복사 서던 6학년 아이가 신부님에게 등 떠밀려 깜짝쇼를 펼쳤지요.
그 순간... 우리는 내일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암튼 "내가 책임진다!"는 정신으로 또 한 번 흥분한 저는
복사 회합이 끝난 뒤 남자아이들에게 기타와 드럼을 주고 연습을 시켰습니다.
처음엔 음악에 다 맞춰 액션을 연습시킬 작정이었으나
이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중요한 부분만 짚어 주었지요.
그 와중에 일렉기타 망가지고, 베이스 목 부러지고,
결국 못 쓰는 일렉기타를 6학년 아이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아이가 기타줄에 손이 긁히기에 여자아이들을 시켜
선생님들에게 피크 좀 만들어 달라고 그랬더니
돌아온 것은... 두둥~!
미사 중에 교사회실이 도둑을 맞는 바람에 분실신고한 카드가
빈 지갑과 함께 성당 옆 파출소로 돌아왔던 겁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선생님들은 못쓰게 된 카드를 과감히 잘라
홀로그램이 반짝반짝 빛나는 피크를 만들어 왔습디다.
우리의 기타맨은 열심히 기타를 두들겨
결국 기타 여섯 줄이 리허설 전에 다 끊어지고 말았다는...
(나중엔 그 단단한 피크마저 부러졌다죠)
어쨌거나 남자아이들은 -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 온갖 오버액션을 펼쳤고
여자아이들의 예쁜 율동과도 묘한 대조와 조화를 이루어
꽤 귀여운 무대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락에 조예가 깊으신 교감선생님의 제안으로
일렉과 베이스를 쾅! 부딪혀서 부수는 액션으로 마무리.
일렉기타가 진짜 기타였기 때문에
가짜 베이스는 결국 두동강도 아닌 세동강이 나고 말았지요.
연습할 때는 그래도 줄은 남아 있더니 실전에서는 줄까지 완벽하게 끊어지고...
점심시간에 아이들은 저마다 드럼과 기타를 차지하고 앉아
’여행을 떠나요~’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온갖 폼을 다 잡고
(제가 주문한 대로) 고독한 예술가 또는
광란의 기타돌리기와 심벌즈 치기를 연습하며
역사상 저렇게 호들갑스런 6학년이 있었던가... 싶도록...
동생들도 덩달아 기타를 부여잡고 신이 났습니다.
사실 지구 잔치에 가 봐도 남자아이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가끔 끼여 있는 남자아이들을 보면
’쟤네를 어떻게 구슬렸지?’ 하고 감탄할 따름이었는데
이번에는 무려 다섯명의 남자아이들이 함께하게 되어 보람이 있더군요.
남자아이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거리를 찾아내어서 더욱 다행이었습니다.
덩달아 여자아이들에게도 재미난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고요.
’소년아 기타를 잡아라’는
신해철이 재작년에 야심차게 데리고 나온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밴드의 노래인데
이쯤에서 문득 떠오르는 의문.
소년들에게는 기타를, 소녀들에게는 무엇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