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해욱 (신부님)

2007. 5. 2. 오후 5:26:49

글자




병원의 원목 사제로서 제대로 하고 있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환자들과의 생활이 비교적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나 자신이 아픈 체험을 많이 한 탓에 

환자의 고통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중학교 때 폐결핵을 앓았고, 10년이 훨씬 넘게 요통으로 고생했으며, 

93년 여름에는 목디스크로 두어 달 조그만 병원이 있는 

시골 어느 수녀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햇살처럼 비껴오시는 당신」은 

그때 그 시골 수녀원에서 치료중에 번역한 시집이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모르고 지내다가 

병으로 고통을 체험하고 나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육신의 아픔으로 그리스도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고통의 시간을 되도록 피하고 싶어하지만 

지나고 나면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시기이다. 
아프면 그 고통이 멎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듯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기는 때이다. 

그래서 대림절을 앞두고 

아픔과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나는 아픔이 찾아올 때면 

병을 다정한 친구 대하듯 한 조지훈의 시 '병(病)에게'를 생각한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에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의 여읜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애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참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시인의 놀라운 인생 달관의 경지가 느껴진다. 
조지훈 시인의 병로생사에 대한 깊은 성찰에는 감히 다가설 수 없지만 

이 시에 공감을 표하는 것은 

나 역시 병이 낯선 친구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어두운 그림자로 찾아오는 우울한 친구이지만 

그 병이라는 친구가 들려주는 생명의 외경에 대한 가르침은 

어느 스승의 가르침보다 귀중했음을 체험을 통해서 조금은 알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영육의 아픔을 경험한다. 
또한 주변을 둘러보면 아픈 이들이 너무나 많다. 
병으로 고통을 겪거나 주위의 아픈 이들을 보면서 

건강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큰 축복임을 깨닫고 

건강함에 감사하면서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휴식이 필요할 때는 쉴 줄 아는 지혜도 가져야 한다. 
어느날 불현듯 찾아온 병에 대해 

시인처럼 친구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지라도 

무작정 부정 하거나 억울해하거나 분노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아픔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고 

더 심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돌봐줄 이 없는 환자들과 시한부 삶을 사는 환자들을 생각하며 

이들을 위한 위로의 기도를 하게 된다. 

 

아픔에 직면해 보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분은 우리가 서로 도우면서 살도록,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게 인간을 만드셨나보다. 
사람은 서로 의지하면서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이기에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 또한 교만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분께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맡겨 드리자. 
주님의 치유는 의사들의 의술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 가득한 손을 통해서도 주님은 치유를 베푸신다. 

어렸을 때 배가 아프면 어머니께 달려갔다. 
그러면 어머니는 '엄마손은 약손이지' 하며 배를 쓸어주셨고 

한참을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아픈 배가 나았다.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사랑이 손을 통해 전달된 것 아니었을까? 
그렇게 어린 나의 배를 쓸어주시던 어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12년 전 모든 성인의 대축일날 하느님께 가셨다. 
더이상 어머니의 따뜻한 손의 감촉을 느낄 수 없음은 큰 아픔이지만 

그 아픔으로 나는 많은 걸 배웠고 좀더 성숙했다. 


교리 시간에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향한 여정'이라고 가르쳤는데 

어머니를 보내고 나서야 

그 말의 참 의미와 하느님께 맡겨드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배웠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참고 견디면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승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언젠가 돌아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모두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를 기도드린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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