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과학기술대학 가톨릭학생회 사나래 선배단에서작성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앞으로 이 책을 다음순서대로 게재할 예정이오니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있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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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일 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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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서 |
성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
1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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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개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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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사 |
2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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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당시의 시대상 |
2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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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대한 상식 |
2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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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
2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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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과 초대교회 |
2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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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리 |
계시에 대하여 |
1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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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에 대하여 |
1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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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에 대하여 |
1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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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회 |
교회론 |
2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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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사 |
2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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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천주교회사 |
2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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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
성서와 하느님 나라 |
2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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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하느님 나라 |
1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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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하느님 나라 |
2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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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학생회 |
2주 |
단군신화와 구약의 이야기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 우리 한민족이 ‘단군의 자손’이라고 배웠습니다. 환웅과 100일 동안 동굴에서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된 웅녀의 아들인 단군의 자손 말입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와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기 보다는 부족시대의 여러 부족들 중에 곰과 호랑이를 상징으로 정한 부족의 세력이 컸으며, 이 부족들중에서 결국 ‘곰’ 부족이 지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배웠습니다. (정말 그런가?) 오늘의 우리는 단군신화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단군신화를 사실로 받아들입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개천절을 기념하는데, 개천절과 단군신화가 우리민족에게서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마 단군신화는 우리가 하나의 핏줄에서 갈라진 한 민족이라는 동질성과 민족의 정체성의 측면에서 의미를 갖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팔레스티나 지방의 유대인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구약성서의 여러 이야기들입니다. 이집트의 히브리 노예들이 모세의 인도에 의해 탈출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기쁨의 순간들을 입으로 전해오다 기록한 것이 모세 오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등 이스라엘의 성조들이 실제로는 다윗왕 시대의 핵심지도자들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와 비슷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여부가 우리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구약성서의 아브라함 등의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출애굽과 건국의 역사속에서 자신들의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이 구체적인 역사속에서 자신들과 함께한다는 것을 구약성서를 통해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모세오경 뿐 아니라 구약성서의 전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서 전체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유대인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서학자가 아닌 이상 어느날 갑자기 하늘이 내려 준 것이 아닌, 한 위대한 예언자에 의해 쓰여진 것은 더더욱 아닌, 수 천년 동안 입을 거쳐 내려오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글로 기록되고 더 붙여지고 빠지기도 하고 비슷한 내용이 중복되기도 한 구약성서 내용의 사실여부에 필요이상의 관심을 보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성서를 통해서 구체적인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하느님의 뜻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 신앙고백들을 어떻게 구체화해야 할 것인지를 읽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인 우리들이 성서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이 장편이라면 신약은…
성서가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신구약성서의 시간적 배경을 비교해 보면, 구약성서 속에서는 시간이 적어도 몇 천년이 흐르지만 신약성서는 고작 백년도 채 되질 않습니다. 구약을 장편으로 친다면 신약은 단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본적으로 신․구약의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을 ‘신앙고백’ 이라는 입장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지만 이러한 ‘시간적 길이’의 차이 때문에 신약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은 구약의 그것과는 조금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심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로부터 교회 공동체가 새로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많은 중요 인물들이 구체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등장하는 구약성서와 달리, 신약성서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됩니다. 뒤에도 나오겠지만 신약성서의 내용을 크게 나누어보면 공관복음을 비롯한 4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이며, 사도행전과 여러 서간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인 복음서를 살펴보아도 4복음서의 내용이 서로 다른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이렇게 복음서마다 다른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냥 단순히 당시 루가복음의 저자나 요한 복음의 저자가 착각을 해서, 혹은 예수에 대한 기억을 헷갈려서 실수를 했다고 넘길 수 있을까요?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가 아니다
공관 복음(마르코, 마태오, 루가)와 요한복음을 포함한 4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 복음서들이 서로 상반된 증언을 전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가령 요한복음의 예수의 성전 정화사건은 마르코, 마태오, 루가복음과는 전혀 다른 시기에 등장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 사건이 예수의 공생활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과월절에 즈음한 시기, 즉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불과 며칠전에 일어나는데(마르 11,15-19) 반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전도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에 즈음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2,13-22). 또한 복음 전체 문맥상 성전 정화사건이 배치된 상황도 서로 다른데, 마르코 복음에서는 성지주일에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을 한 이야기의 뒷부분에 배치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갈릴래아의 가나 지방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기적 이야기에 이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코복음에는 성전 정화 이야기에 이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등장하는 반면, 요한복음에는 유대인들을 매우 당황케 한 예수의 선언, 즉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성전 정화사건’이 공생활 말기에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인 행위로 기술되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앞으로의 예수의 전도 활동 성격을 암시하는 정의로운 행위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동일한 사건이 각 복음서마다 다른 위치에 배치된 것은 각 복음서의 저자들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행로가 전혀 다른 두 갈래의 예수의 여정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 사실적으로 진술한 전기가 아니라 저자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증언과 선포로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시한 신앙의 말씀이자 메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네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들을 역사적인 사실인 양 이해하여 그 이야기들을 이리저리 꿰맞추어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해보려 한다면, 결국 모순으로 뒤범벅이 된 잡동사니밖에 얻지 못할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복음서들을 각각의 독립된 책으로 이해하고, 각 저자들이 복음을 통해 어떠한 메시지를 주려 하는지를 알기 위해 노력한다면, 복음서마다의 다른 진술들을 별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가 아니다
공관 복음(마르코, 마태오, 루가)와 요한복음을 포함한 4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 복음서들이 서로 상반된 증언을 전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가령 요한복음의 예수의 성전 정화사건은 마르코, 마태오, 루가복음과는 전혀 다른 시기에 등장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 사건이 예수의 공생활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과월절에 즈음한 시기, 즉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불과 며칠전에 일어나는데(마르 11,15-19) 반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전도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에 즈음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2,13-22). 또한 복음 전체 문맥상 성전 정화사건이 배치된 상황도 서로 다른데, 마르코 복음에서는 성지주일에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을 한 이야기의 뒷부분에 배치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갈릴래아의 가나 지방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기적 이야기에 이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코복음에는 성전 정화 이야기에 이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등장하는 반면, 요한복음에는 유대인들을 매우 당황케 한 예수의 선언, 즉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성전 정화사건’이 공생활 말기에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인 행위로 기술되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앞으로의 예수의 전도 활동 성격을 암시하는 정의로운 행위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동일한 사건이 각 복음서마다 다른 위치에 배치된 것은 각 복음서의 저자들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행로가 전혀 다른 두 갈래의 예수의 여정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 사실적으로 진술한 전기가 아니라 저자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증언과 선포로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시한 신앙의 말씀이자 메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네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들을 역사적인 사실인 양 이해하여 그 이야기들을 이리저리 꿰맞추어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해보려 한다면, 결국 모순으로 뒤범벅이 된 잡동사니밖에 얻지 못할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복음서들을 각각의 독립된 책으로 이해하고, 각 저자들이 복음을 통해 어떠한 메시지를 주려 하는지를 알기 위해 노력한다면, 복음서마다의 다른 진술들을 별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