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극적인 시선으로 ~ - 8/8 -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보다는 그 상황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가 하느님 현존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관건이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바라보면 열린 시야로 선택하고 대응할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닫힌 시야로 즉각적인 반응을 하게 된다.
- 시선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짓는 무의식적 방향키다. -
시련과 어려움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평소 어떤 시선으로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인생의 날수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그 깊이와 넓이는 결정할 수 있다. 얼굴 모습 역시 우리가 결정할 수는 없지만 얼굴 표정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덮쳐오는 외적 상황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그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가는 철저히 우리 몫이란 뜻이다. ‘우리 몫’이란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과 나의 몫이란 뜻이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의 도움을 통해 어떤 환경에서든 적극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바오로 사도가 힘든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소극적인 자세로 살아가고 있다. 신자 백 명을 대상으로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을 하자
“그럭저럭 살아간다”는 대답이 가장 많았고, 두 번째는 “마지못해 살아간다”, 세 번째는 “죽지 못해 살아간다”였다고 한다. ‘그럭저럭’, ‘마지못해’, ‘죽지 못해’ 살아가니 주일날 어둡고 우울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눈앞의 현실을 보면 그런 대답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기쁜 소식을 듣고 구원 약속을 얻은 신자들이 아닌가? 바오로 사도는 어떤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늘 기뻐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가?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요 구원받은 자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딘가 구멍이 뚫려 있어 기쁨이 새고 있다는 말이다. 기쁨과 즐거움은 다르다. 즐거움은 가변적이고 일시적이지만 기쁨은 항구하며 영속적이다. 즐거움은 주변 환경에서 비롯되지만 기쁨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한테서 비롯된다. 우리는 자주 주변 환경에 따라 즐거웠다가 우울했다가 한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감정이 널뛰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쁨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주님께 그 바탕을 두기에 기복이 없다. 기쁨은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이기에 항구하고 영속적이다. 그러므로 기쁨은 신앙 문제라 할 수 있다.
-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 송봉모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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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본 공부 ----
제7항 : 이미 너무나 많은 단체가 있다. 그러니 이런 기 존 단체들을 활성화시키거나 그 기능을 확대시켜 레지오가 하려는 일들을 맡기는 것이 올바르다
프랑스에서 기존 가톨릭 액션을 지원하던 어느 주교가 레지오 도입을 전적으로 반대하면서 어떤 수사신부로 하여금 레지오를 비방하는 소책자를 만들게 하였다. 그 결과 레지오에 대한 거부반응이 생겨 이미 레지오 도입을 허락했던 주교들까지도 허락을 취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런 혹독한 기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것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왜 그랬던가 반성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레지오는 관심을 더 끌게 되었고 신속히 전파되는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cf, Hilde Firtel, A Man for Our Time, pp.79-80).
레지오의 초창기에 비해 오늘날엔 신심 단체나 운동이 많이 늘어났고 나름대로의 사업과 활동을 하면서 시대에 맞게 활성화되고 있다. 신심, 활동 단체가 많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사도직 활동 분야가 넓고 다양해지고 신자들의 사도직 참여도가 높아지며 활성화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성격의 단체를 묶어서 통합한다든지 새로운 단체가 하려는 일을 도맡아 함으로써 아예 새 단체의 설립을 막아 버리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닐 것이다.
레지오 역시 독특한 소명과 임무를 지니고 있기에 활성화되어야 할 매우 요긴한 단체이다. 이 점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레지오 단원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 보자 : "오늘날 평신도 사도직의 분야는 널리 확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특별한 소명에서 오는 임무는 더욱 더 절실하게 요구되며 마땅히 활성화되어야 하겠습니다. 평신도가 활성화되었다는 것은 곧 교회 자체가 활성화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레지오 단원들의 임무는 더욱 더 중요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레지오는 이탈리아 사회와 오래된 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진 나라들에서 절실히 요구될 뿐 아니라 여러분 단체의 선임자들이 보여 준 빛나는 모범적 헌신 행위를 생각할 때 레지오는 매우 요긴한 단체입니다"(6쪽 : 교본 (13)-(14)쪽).
이미 너무나 많은 단체가 있어서 새로운 단체인 레지오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견에 대해 교본 본문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 "새로운 것이 새롭다는 이유로 거부될 수는 없다. 때로는 그것으로 위대한 발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지오도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요구한다. 레지오가 '단순히 또는 하나의 단체'가 아니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문 앞에서 돌려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손실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