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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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모처럼 들렀다.
오늘 날씨는 좋다.
맑고 햇볕 따뜻하고
바람도 시원하게 분다.
학생들은 다음주 시험기간이라
열심히 공부한다.
다들 바삐
감기
코가 맹맹하고
머리가 띵하다
정신이 맑지못하다
몸이 으슬으슬하다
날씨는 덥고 옷은 벗어야 하니
정말 진퇴양난이다.
찬바람이 싫어
교실문을 닫으니
학생들의 한숨소리
서로 양반 절반씩
창문도 절반씩 밀어본다
몸이 성할때는
고마운 줄 모르더니
아프고 나니
후회된다.
주님사랑 잃기전에
고맙다고 인사하자
감사하다고 말하자
기도하며 오늘을 보내자
미 백악관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의 석은옥씨의 고백
석은옥씨가 직접 말하는 감동 인생.“최고 엘리트였던 내가 앞 못보는 남자와 결혼,
가만히 눈을 감으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의 인생을 뒤바꾼 한 맹인 소년과의 만남!
그 후 자원봉사자로 1년,
누나로 6년, 약혼녀로 3년,
그리고 아내로 34년을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
처음엔 고개를 젓던 사람들도 이젠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찬사 뒤에는 우리 부부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강영우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
우리의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나는 걸스카우트 신입회원으로 그를 돕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 하느님께서 내게,
저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맹인 중학생이 10년 후 나의 신랑이 된다는
그때 그는 맹학교 중등부 1학년생이었고, 나는 여대생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학생은 외모만 봐서는 전혀 맹인 같지 않았다.
누군가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을 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내가 다녀오겠다”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학생의 손을 덥석 잡고 광화문 사거리로 나섰다.
나를 소개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1학년 때인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다.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 으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뒤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남편은 어렴풋이나마 내 젊은 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부터 주말이면 맹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책도 읽어주고
안내도 해주는 일을 1년 정도 봉사하다 보니 정이 들어,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잘됐다 싶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당시 나는 그가 투병과 방황으로
여러 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학생과 중학생이라는 것만 생각해 부담 없이
그의 누나가 되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한 살 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가야 했고 빨래,
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동생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내게 기쁨이었다.
물론 아가페사랑이다.
당시엔 맹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맹인이 버스를 타려고 하면 차장이 밀어내기 일쑤고,
가게에서는 재수가 없다며 오후에 오라 하고,
식당에서는 구석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와 만난 지 5 년째 되던 해,
그동안 혼자만 생각해온 유학 계획을 그에게 털어 놓았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는지, 그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지만,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결혼을 해서도 시각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할 텐데
더 늦기 전에 유학을 다녀와야겠다는 말에 결국 그도 동의했다.
나는 1967년 9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동안 정이 든 그와의 이별은 큰 아픔이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가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겹쳤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를 보내고
혼자 힘으로 다가오는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이 겹쳐 이별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내가 떠난 뒤 동생 영우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고
대학 입시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8년 연세대 문과대 교육학과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를 접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학원서조차 낼 수 없다니,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데 4주 정도 지나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영문과 교수 한 분이 대필 해 주어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교육과에 10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그는 1968년 3월, 서울맹학교 고등부에서 연세대에 입학해
그동안 박박 깎은 머리를 기른 채 교복 대신 신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첫 학기부터 장학생이 되었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나는 1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동안의 이별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함께 연세대 백양로를 걷던 중 영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도 그를 무척 좋아한 데다 남은 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헌신하려고
장래를 약속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을 올렸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른 딸을
맹인에게 준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친구들은 더 심했다.
어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며
“관상을 보면 팔자가 그렇게 센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느님이 해도 너무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학벌이 좋으면 뭐하니?
너는 좋아서 결혼한다 해도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을 생각해봐.
아버지가 장님인데” 하고 말렸다.
대학생이던 약혼자를 졸업하기까지 만 3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난 다른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늦은 편이었고,
모두 판사, 의사, 약사, 대기업 간부의 부인이 되어 있을 때
연하인 맹인 학사를 신랑으로 맞은 것이다.
그래도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 하객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였다.
1972년 8월, 우리 부부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LA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에는 장애가 해외유학의 결격사유에
한미재단총재와 연세대 총장이 공동으로 제안한 청원서에 문교부장관이
LA에 도착해 여러 해 동안 그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 양부모님을
서울을 떠나기 직전까지 맹인재활센터에서 일했고, 입덧도 심했다.
그러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돕지 않으면 강의실에도 갈 수 없어
하루는 남편을 강의실에 들여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녹음하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며 화를 버럭 냈다. 나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항상 잘하다가 한 번 실수했는데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나 싶어
섭섭한 마음에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미국에 와서 처음 한 부부싸움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남편은 보행훈련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혼자 강의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미루던
하지만 아무리 보행훈련을 받아도 자주 다니지 않은 곳이나 생소한 지역을
그러니까 보행훈련을 받아 나에 대한 의존도가 다소 줄어들 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안내해주어야 했다.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남편의 강의가 먼저였다.
혹시 불이라도 날까 불안했지만 그의 눈이 되고 지팡이가 되는것이 먼저였다.
몸이 아플 겨를도 없이 매일 동분서주하는 고달프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후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수업료는 문제가 없었는데,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이 만료된 것이다.
닥치는 대로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병원 청소원으로 겨우 취업이 되었는데 이민국에서 노동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민하던 어느 날, 캠퍼스 근처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한 맹인
그랬더니 그네를 밀어주던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했다.
과부가 과부사정을 안다고,
우리 사정을 이해할 것 같아서 초면에 우리 형편을 털어놓았다.
대신 식사 후 설거지를 해주고, 두 내외가 외출할 때 어린 두 자녀를
생각할 것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머지않아 박사가 될
그러한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주관 적인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남의 식모살이나 하는 처지가 행복해 보이지는
그러나 나는 그때가 오히려 아파트에 살 때보다 더 행복했다.
우리와 처지도 같고 동년배라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를 배우는 계기도 되었다.
또 두 살 된 진석이도 네 살, 다섯 살이던 그 집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고통 속에서도 절대 좌절하거나 울지 않았다”
우리 내외는 출세지향적이 아닌, 성취지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맹인이기 때문에 넘어야 할 물리적, 심리적, 법적, 제도적 장벽을 넘을
승리감과 보람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다.
1976년 4월 25일, 남편이 드디어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당국의 배려로 박사복을 입은 남편을 총장 앞으로 안내하면서
느낀 보람과 행복이란….
“마음껏 사랑하고 즐긴 것은 결코 잊히지 않으며,
자신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는 헬렌 켈러의 말이 생각났다.
물론 아무나 맹인의 아내가 되어 어려운 내조를 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때로는 희생을 요하는 힘겨운 내조를
나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느껴져 더 행복했다.
어려움이 닥치고 고난이 겹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편은 고국에 돌아가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직자로 8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논문지도를 할 수 있겠느냐며, 어디에서도 남편을 채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네 식구가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형편이었다.
장학금으로 지급되던 생활비가 졸업과 동시에 끊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만료된 유학생비자를 다시 살리기 위해
남편이 포스트 닥터럴 프로그램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오도가도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배수진을 친 남편의 고통을 너무나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성공의
지금도 남편은 당시 자신의 고통을 함께하면서 그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1월 3일 첫 출근을 하게 되어 서둘러 인디애나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인디애나에 도착해 남편의 첫 출근과 함께 나는 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30년이 흘렀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동안 무사고 운전으로 남편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녁에는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대학원에 출강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터리 클럽 회원으로 매주 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운전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그런 기억은 없다. 아마도 내조하는 기쁨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유학을 떠난 지 6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뒤에는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며 석사학위 교사까지 된 부인의
1983년 6월 5일은 남편이 최초로 국제무대에 등단한 날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 로터리 세계대회에서 그가 연설을 한 것이다.
23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연설자도 아닌 내가 극도로 긴장해 떨기까지 했다.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은 450만 명에 달한다.
그중 2500명이 대통령의 임명을 받으며, 그중 500명은 상원 인준까지
불쌍한 맹인 중학생을 안내하기 시작한 지 40년,
이젠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는 자랑스러운 남편을 안내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링컨 대통령의 장남 로버트 토드와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하버드대
그리고 안과의사의 꿈을 이루어 듀크대학병원에 근무 중이며, 산부인과

케이크를 앞에 두고 축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남편이 말했다.
“아들, 며느리 네 명의 박사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니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잖아요.”
그렇다. 한집에 다섯 명의 박사가 있는 것이다.
가을
| 가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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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은행나무의 잎사귀가
떨어져 바닥을 뒹군다.
멀리는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돈다.
온몸을 뒤척여 보지만
늘 그자리
넓적한 배를 대고
일어나려고 한다.
고마운 바람 오늘도 나를 띄운다.
스삭 스삭 빗자루 소리
흐트러진 잎을 한곳으로 밀어부친다.
자리를 뜨지않으려고 배를 깔고 납작 엎드린다.
스삭 스삭 휙 휙 부는 바람 소리에
따뜻한 배를 움켜쥐어본다.
|
||
^^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어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나비가 될 것인가 아니면 껍질 속에 갇혀 지낼 것인가는 애벌레가 선택합니다.
그는 나비가 될 수도 있고 영원히 애벌레로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비가 되었던 그는 다시 껍질 속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내가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세월이라는 시간이 나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의 회개만으로는 부족한가봅니다. 끊임없이 나를 갈고 닦아야 할 것입니다.
비가 내리네
대림 1주를 보내며
올해 마지막 달 12월 그리고 4일 지나가고 있습니다.
벌써 대림 1주가 다 지나가고 내일이면 2주를 맞이 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속좁은 저는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새벽 바람을 맞으며 현관 문을 나서면 예의 물리치료실 지붕은 하얀 서리가
앉아 ''''눈이 왔나?''''하고 착각할 정도입니다. 고요한 새벽과 너무 잘 어울리는
풍경입니다.
오늘 아침은 멋진 원두막이 앞마당 놓여 졌습니다.
이제 그곳은 우리들이 두런두런 얘기하는 정다운 공간이 되고
뜨거운 햇볕을 막아주는 재활원 가족들의 고마운 장소가
되겠지요.
그 옆에는 고구마를 구워되는 화롯이 연신 연기를 품고 있습니다.
어저께는 오며 가며 연신 구워되는 노란 호박고구마를 달게 먹고
어제는 두개의 화로에 직원들과 둘러 서서 삽겹살을 구웠답니다.
참 고맙고 정겨운 장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받으면서도
인간적인 한계에 갇혀 고민하는 저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단순하게 보다 자신에게 너그러움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님이 오시는 날을 준비해 봅니다.
합창 선생님들 올 성탄은 어떤 이벤트로 즐거운 시간을 가질런지요?
궁금합니다!!
준비하면서 서로의 소중함과 귀함을 알아가는 좋은 대림절 되세요!
추석이 다가오네요.
오늘 운동하고 돌아오는데
밤하늘의 달이 반달을 지나가고 있어요.
이제 좀 있으면 보름이 다 오겠지요.
나머지 반쪽을 채우기 위해 달려가고 있지요.
비 온 뒤라 그런지 밤 하늘이 맑아 보여요.
달 주변의 구름은 더욱 하얗게 빛을 발하고요.
우리네 마음도 이번 한가위에는 맑고 환했으면 좋겠어요.
다들 건강하시지요?
여러분~가을이예요^^
가을 하늘
감사
안녕하세요?이제야 들리네요~~~음~~~~
한달만에야 들립니다.성지도보순례를 하면서....
매일 찬미와 감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