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005-04-2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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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김정희교수 ‘내가 본 베네딕토 16세’
[동아일보]
《가톨릭 여성 신학자인 김정희(金貞熙·67) 전남대 국민윤리교육과 명예교수는 신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에게서 배웠던 제자다. 김 교수가 20일 교황과의 인연 등을 담은 글을 본보로 보내 왔다.》
나는 조선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고 싶어 1966년 유학길에 올랐다. 프랑스 루르드에 평신도 사도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에서 1년 동안 성서공부에 매진하다 본격적으로 철학을 파고들고 싶어 독일로 갔다.
신학공부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던 나에게 마인츠 교구 추기경께서 “꼭 소개시켜 주고 싶은 교수님이 있다”며 그분을 찾아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그분이 다름 아닌 이번에 교황이 되신 요제프 라칭거 교수님이셨다. 그때 나는, 추기경님으로부터 라칭거 교수님의 저서 한 권을 건네받았는데 이것이 결국 나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 책은 라칭거 교수님이 튀빙겐대교수로 계시면서 쓰신 ‘그리스도 신앙의 입문’(장익 주교가 ‘그리스도 신앙 입문, 어제와 오늘’로 번역 출간)이라는 책이었다. 당시 유럽 교회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지적하면서 교회의 변신을 주문했던 획기적인 책이었다. 문장도 깊이 있고 아름다웠다.
나는 라칭거 교수님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1969년 겨울부터 교수님이 튀빙겐대에서 레겐스부르크대로 옮긴다는 말을 듣고 바로 이 학교에 등록했다. 그리고 7년 동안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모시며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동안 스승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스승께서는 당시에는 이름도 생소한 아시아의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나를 누구보다도 따뜻한 관심으로 이끌어 주셨다. 학생들과의 세미나 자리에서나, 맥주를 마시는 뒤풀이 자리에서도 늘 나를 옆 자리에 앉혔고 공부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돈이 없어 고생은 하지 않는지 물어 보셨다.
지금도 나는 매년 부활절과 성탄절에 스승님께 편지를 보내는데 바쁜 와중에 한번도 답장을 거르신 적이 없다.
1980년 여성 신학박사 1호로 귀국했지만 강사 자리조차 잡지 못하고 방황할 때도 나는 스승님께 편지를 썼다. 그때 스승님께서는 “준비 안 된 땅에서 견뎌내야 할 고통이 많을 줄 안다. 화내지 말고 힘들어 하지 말고 오라는 데 가서 응답하고 하느님을 증거하라”는 답장을 보내 주셨다. 나는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등으로 어두웠던 시절을 꿋꿋하게 견딜 수 있었고 결국 1983년 전남대 교수로 부임했다.
2001년 생신 때, 전 세계 제자 50여 명이 로마에서 신학 심포지엄을 열었다. 가족까지 초대해 저녁 식사를 베푼 뒤 추기경 예복을 그대로 입고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하며 “항상 몸 건강해라”고 손을 흔들어 주시던 나의 스승님 베네딕토 16세. 겸손하고 따뜻하며 중도의 철학을 가지신 그분과 세계 교회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빈다.
[동아일보 2005-04-2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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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 교리엔 엄격해도 가슴 따뜻한 남자
[동아일보]
《‘교리 문제에는 엄격하고 보수적이지만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1927년 4월 16일 독일 남부 마르크틀암인에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부모의 이름은 요제프와 마리아. 태어날 때부터 예수의 후계자가 될 운명을 타고났는지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6년부터 독일 뮌헨대와 프라이싱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에도 학업에 정진해 1953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7년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한 뒤 1969년까지 프라이싱, 본, 뮌스터, 튀빙겐대 등에서 교리와 신학을 가르쳤다.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여한 그는 개혁에 저항하는 성직자들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1968년 68학생운동의 파고를 겪은 뒤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그것은 인간자유와 위엄에 대한 과격한 공격이었다”고 회고했다.
1977년 뮌헨 대주교에 오른 그는 4개월 만에 추기경에 임명됐다. 1981년부터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성(聖省) 수장으로 정통 교리의 수호자 임무를 맡았다.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그를 “세련되고 생각이 열린 사람” “어려운 일도 동요하지 않고 척척 해내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디터 헨리히 당시 레겐스부르크대 총장은 “회의에서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다가도 라칭거 부총장이 한 마디 하면 분위기가 정리되곤 했다”고 회고했다.
한편으로는 겸손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다. 바티칸에 온 뒤에도 매년 4차례 이상 고향에 들렀고 수시로 형과 안부를 나눴다. 막역한 사람에게도 ‘너(du)’라고 하기보다 ‘당신(Sie)’이라고 존칭을 사용한다.
그는 교황청의 2인자였음에도 64번 버스 종점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사무실까지 매일 걸어서 출근했다. 18년 동안 한결같았다. 수수하게 차려 입고 있어서 여행객들이 그를 멈춰 세우고 길을 묻기도 했다.
그는 10개 국어를 읽을 수 있다. 그중 프랑스어를 포함해 4개 국어는 능통하다. 쉬는 시간에는 피아노를 치며 베토벤을 좋아한다. 모차르트 음악에 대해 “인간 경험의 모든 비극을 담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등산을 제외하고는 과격한 운동은 즐기지 않는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동아일보 2005-04-2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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