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신학(神學)의 어의(語義)
제1절 고대
신학=Theologia=Theos(神)+Logos(말)
Θεοζ + λογοζ (希)
플라톤의 ꡔ국가론ꡕ 중에는 신(神)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읊은 시인들을 신학자(神學者)라하고, 그 노래들을 신학(神學)이라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플라톤이 말한 뜻으로도 사용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절대 움직이지 않는 절대 존재자로서 다른 움직이는 존재자들을 설명하는 사람 즉 철학자를 신학자라 했다.
이러한 신학의 우주론적 성격은 희랍사상의 특징적인 것이다. 희랍인에 있어서 신학과 철학은 불가분의 혼합체이다. 또 신탁의 해설자도 신학자라 했으니 고대에 있어서 신학이라는 말은 신화적 의미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철학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제2절 성서와 교부(敎父)
교부란 대학자(大學者) 또는 모든 공의회(公義會)에 모여온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성서에는 이런 말 마디가 없다.
초기 그리스도 교도들은 이교도들이 신학이라는 단어를 오랫동안 써 왔기때문에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이 말을 즐겨 쓰지 않았다. 서방교회에서는 성 이시도로(S. Isidorus, 7C)까지도 신학이라는 단어는 고대 이교 백성들이 뜻 그대로 사용하였다.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주로 사용한 서쪽 교회를 말하며, 동방교회는 희랍어를 주로 사용하는 교회를 말한다.
동방교회에서는 오리게네스(Origenes 3C)가 처음으로 이 말을 그리스도교의 신인식,신론에 적용하였다. Eusbius(5C) 이후 동방교회에서는 점차 이 말을 널리 사용하게 되는데 특히 Arianismus와 투쟁하면서 성삼 교리에 대하여 성삼의 신성을 논하는 것을 신학이라 혹은 신론이라 하였고 그리스도론, 은총론, 성사론, 등으로 합하여 Oeconomia (*경론-즉 하느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시는가? 이에 대해 Theologia는 하느님은 누구신가를 논하는 것.
동시대의 수도원의 저자들은 신에 대한 영성적 신비적 인식을 Theologia라 하였다.
S. Augustinua(4C-5C)도 그리스도교 신학을 Theologia라는 말로 지칭하지 않고 다만 이교도를 그리스도교로 이끌기 위해 참된 신론은 그리스도교 교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Doctrino Christiana"이라 불렀다.
제3절 현대적 어의.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뜻에 가까운 뜻으로 이 말을 처음 사람은 Abelardus(7C)이다. 그는 자기 신학책의 제목을 “Theologia Christiana"라 하였다. . 또 다른 책에는 ”Introductiio ad Theologiia"라 하였다. 중세기에 많이 사용된 말은 일반적으로 Sacra paging(거룩한 페이지) Sacra eruditio(거룩한 지식)이고 성 토마스는 Sacra doctrina(거룩한 교리)를 사용하였다.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에 약80번 사용)13C부터 대학에 신학강좌가 개설되어 Theologia라는 단어가 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대학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3C부터이다. 그래서 Theologia는 협의로는 신론을 뜻하고 광의로는 계시진리의 논리적 체계적 인식을 말하는 신학이다.
제2장 신학의 기원
제1절 계시(啓示=Revelatio)
신학의 출발점은 하느님의 지혜나 사상이나 말씀이 발표되었다는데 있다.
1. 자연 계시:창조를 통해서 즉 창조된 피조물을 관찰함으로써 피조물의 존재의 원인인 창조주를 인식할 수 있고 또 그 사물들을 통하여 하느님의뜻을 어느정도 알수 있다. 이렇게 피조물의 존재와 작용을 보고서 하느님의 존재를 알아보는 것을 자연적 계시라 한다. “사람들이 하 느님에 관해서 알만한 것은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 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때부터 창조물 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 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 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되겠습니까?”(로마1,19-20) 그러나 계시는 하느님편에서는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지혜와 전능으로써 되는것 이지만,그 나타나시는 것의 의미를 파악하는자 즉 인간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즉 세상만물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의 뜻을 이성을 가진 인간이 획득해야만 자연적 계시가 성립되는 것이다.
2. 초자연적 계시:하느님의 뜻은 창조된 만물을 통해서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더 적극적으로 인간 역사에 들어오시어 말씀하심으로써 어느정 도 인간화 된다. 그 첫 단계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서 예언자 들이나 사도들이나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발표된 하느님의 사상 자체와 하느님의 직접간섭으로 진행되는 구세사의 내용등이 초자연적 계시이다.
이 초자연적 계시를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화의 첫 단계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뜻이 인간이 사고와 언어와 또 인간들이 사용 하는 상징을 통하여 우리에게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이 초자연 적 계시의 결정파는 하느님의 말씀자체이신 성자께서 우리와 같이 인간이 되신 강생의 신비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곧 초자 연적 계시의 내용임과 동시에 가장 큰 계시자 이시다.
“……………”(1고린1,21;히브1,1-3;요한1,14)
제2절:신앙(계시의 이성적 수용)
하느님 뜻의 인간화의 제2단계는 이 계시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데 있다. 즉 하느님의 부르신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대답이 신앙이다.
*이 계시를 모두다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지식과 다르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계시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충실한 대답을 찾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인간의 활동이기도 하다. 이것을 합리적인 순종이라하고(로마12,2)계시의 이성적 수용이라고 할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간직한다는 것은 말씀의 뜻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를 무주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맞들이고 규명하는 인간 노력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을 하느님께 대한 무저건적 신뢰로 규정하는 프로테스탄트적 신앙관은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는 ㅓ편견이고 신앙자가 믿는 바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신앙자체를 조금도 손상하지 않는다. (*프로테스탄트는 신성을 무조건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이라 함. )하느님의 계시를 신앙안에서 이해하는 데에는 2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신비적 인식인데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성령의 은사에 힘입어 하느님의 신비를 직감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감은 추리를 통하지 않고 하느님의 신비를 터득하는 것이니 인식자 자신만의 것이고 논리로써 타인에게 설득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신앙자 자신만의 구원의 길이므로 타인에게 빌려 줄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다만 증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인식은 성령의 은사중에서 통달함이라고 한다.
*은사. 恩賜:Charisma. 통달함-Intellectus.
*기적:기적이 일어나기 전과 후를 과학적으로 판단하여 증명이 될때 이를 기적이라 함. 성모의 발현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므로 기적이하고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하자 않았으며 다만 성인,성녀의 말을 신용할 따름이다.
뛰어난 신비가들의(예컨데 大데레사 또는 십자가이 요한등의)신인삭은 이러한 인식의 고차원적 현상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도달한 신비적 인식이 반드시 이러한 대신비가들의 인식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아무도 자신있게 논단할수 없다. 그리고 많은 신자 대중의 신비적 인식도 정도는 얕지만 이런 범주의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믿어보아야 한다는 경지이다.
이론적 탐구를 통하여 계시를 이해하는 길이다. 이 길은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을 근본적으로 인정하면서 그 애뇬을 우리 정신의 사유 능력으로 궁리해서 논리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단순파악)-개념-판단:-추리-체계적 추리
상식:-지식-학문
신앙안에서 인간은 자기의 양심돠 자유를 하느님의 계획안에 맡겨버리는 것이고 그 신앙안에서 인간은 지성을 활용하여 가능한 한 더 많이,더 정확하게 더 충만하게 계시내용을 인식하려는 것이니 이 인간의 지적 노력을 신학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학의 출발점은 근원적으로는 계시에 있으나 학만적으로는 신앙에 입각한 지성에 있는 것이다. *신앙에 입각하지 않은 학문은 종교철학이지 신학은 아님
제3절 신학
1)계시의 이성적 탐구-이러한 신학적 노력은 구약성서시대 즉 고대 유다이즉에는 없는 현상이다. (예외로 알렉산드리아의 Philon 그러나 그는 기원 후 사람이다. )그리스도 교도들은 일찍부터 이러한 노력을 시작했으니 신학이란 그리스도적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호교론자들은 신앙내용을 다른이에게 설명하거나 반대의 학설을 반박하기위하여 신학을 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Clemens,아우구스티노,기타 교부들은 그들이 가진 문화적 교양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봉사하기 위하여 이성이 신앙의 준비단계가 되고 신앙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신학을 하였고,Cyprianus,Tertullianus같은 이들을 전심전력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기위하여 의지뿐아니라 지성까지 동원하여 연구함으로써 결국 신학을 하였다.
@유대교(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음)와*로마제국(황제를 신으로 받들게 함)의 국권과@철학(그노시스-Gnosis 인간 지성으로써 받아들여질수 있는 것만 인정하겠다는 아단자들의 사상 경향,그래서. . . )의 적에 대해 대처하다가 신학이 성립.
그러므로 신학은 인간이 자기 이성의 능력을 동원하여 체계적으로 신앙 내용을 연구하고 표현하는 학문이며 이 학문은 두 가지 대전제위에 성립한다. 그 하나는 한가지 진리가 다른 진리와 모순될수 없다는 것과 건전한 이성과 건전한 신앙사이에는 모순이 있을수 없다는 기본전제이다. 왜냐하면 이성이나 신앙의 근원은 진리하체이신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둘째 전제는 인간의 인식이란 반드시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라야 되는 것이기에 신앙도 일종의 인식이라면 무질서한 판단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우리 이성의 요구와 구조에 따라서 질서있게 이해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자연계시나 초자연계시의 내용을 인간지성의 법칙에 따라서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바로 신학하는 일이다.
2)신학의 학문성
그렇다면 신학의 내용이 되는 대상은 하느님과 관계되는 사물이요,이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은 근원적으로는 신앙의 빛이지만 직접적으로는 신앙의 빛과 이성의 능력의 공동 작용이다.
신학의 대상(Objectum quos 바로 그것)
도구방법(Objectum quo 바로 그것으로)
이것을 “신앙으로조명된 이성”이라고 한다.
신학은 그렇기 때문에 계시된 것에 대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이성과결합된 신앙으로 계시를 해명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철학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신앙으로 하는 것이지 이성만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신학과 종교철학은 본질적으로 다른 학문임이 명백하다.
무릇 모든 학문은 어떤결과 또는 현상을 그것의 원인내지 원리에서부터 논리적으로 모순없이 풀어나가서 원리에서 현상까지의 과정이 명백해질때 비로소 성립되는것이다. 이것은 신학이나,철삭이나,과학이나 모든 학문이 학문으로서 성립되는데 요구되는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 각 학문의 기초 원리는 자명하든가 아니면 그 원리를 상위의 학문에서 얻어와야 한다. 이때 하위의 학문을 종속된 학문이라 본다. 신학의 원리는 하느님의 전지하신 인식에 있으므로 신학은 신앙에 종속된 학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의 인식-계시-신앙-신학.
제3장 신학의 내용
제1절 신학의 주체(Subjectum)
신학이 하느님의 계시를 인간 지성으로 이해하는 학문이라면 신학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달리 말해서 신학이 취급하는 대상은 한 마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표시,기록된것이 성서요 문자화 되지 않고 실천으로 계승된것이 성전이라 한다.
성서=Biblia,Sacra Scritura.
성전=Sacra Traditio.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까지 도달한 모든 과정이 넓은 의미의 성전이기에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서는 기록된 성전이요,협의의 선전은 생활해온 성전이라 할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의 내용은 광의의 성전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총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과 성전을 통해서 신학자가 찾는 것은 하느님 자신이다. 성 토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학의 주체는 하느님이란 이유로 본 하느님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희랍 문화와 접촉했을때 헬레니즘으 위험앞에 서게 되었다. 헬레니즘으 세계관은 신을 우주의 정점이라 보았기 때문에 신학은 우주론의 마지막 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처음부터 희랍 철학을 경계하면서 신앙의 철학화를 반대하였다. 성 요한 사도의 Logos(말씀),성 이레네오의 반 그노시스(Gnosis),성 힐라리오의 반 Arianism등이 좋은 예이다.
요한의 로고스는 스토아 학파의 우주론적 로고스가 아닌 초월자요,이레네오의 그노시스는 Demiourgos의 그노시스가 아니다.
*Demiourgos-만물. 창조.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이 출발점이고 귀착점이다. 초월하고 절대적이며 자유롭고 전능전지하신 하느님을 논하고,그분과 인간,그분과 우주와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에서 직접 하느님외에 다른 많은 사물을 취급하지만 (철학적 신학) 존재의 정정으로서의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지만 신학에서는 하느님이란 이유에서 하느님을 취급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성은(Deitas) 하느님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보고서 원인을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작용의 법칙에 따라서 자연적 결과 또는 초자연적 결과를 내시는 하느님을 말하다. 즉 Deus qui-(-하시는 하느님)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신의 본체나 속성의 개념을 탐구하는 순수사변적 학문일 수만 없고 (그런 학문은 자연 학문에 속함) 인간에게 자기를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인간과의 구체적인 관계를 이루시는 하느님을 탐구한다. ex)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해방하시는 하느님,그들과 특별한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우리를 위하여 강생구속하시는 하느님,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등등.
순수 철학에서 탐구한 하느님의 본질이나 속성도 신학의 내용이긴 하지만 사실은 구세사에서 구체화된 상태로서만 신학의 내용이 된다. 즉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전지하신 분,이스라엘과 이교 백성을 훈계하시고 징계하시는 공의 하신 분,또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전성하신분 등등이다.
그러므로 신학안에 여러가지 분과가 있고 명제들이 있지만 신학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느님 자신이다. 최근 신학계에 유행하는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우리가 말하는 신중심주의와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가장 적극적이고 결정적인 계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앎으로서 하느님을 알수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가신학의 중심 테마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주체-신학공부에 취급될 경우.
객체-나의 입장에서 신학을 할때 취급하는 대상 임.
신학이 생활한 하느님을 이해하려 할때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학은 방법론 상으로는 그리스도 중심주의가 되고 주체로서는 신중심주의가 된다. 그러기에 구세사를 향하여 꾸며진 어떤 신학이 결코 하느님이라는 이유에 기초를 둔 신학과 대립할수 없고,또 모든 것을 하느님 다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신학이 하느님의 자기표현인 구세사와 관련없이 성립될 수 없다.
초세기에 교부들이 갈파한 것처럼 신학은 계시의 학문이고 계시의 중심점은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소위 Misterium(신비)즉,영원한 하느님의 뜻이 시간안에서 구원의 경륜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성삼론과 그리스도론을 분리해서 그 어느것만 주장할때에 신학은 성립되지 않는다.
제2절 신학의 소재(素材)
신학의 주체가 하느님 자신이라고 말하였고 그 하느님은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지므로 계시 내용을 공부하는것이 신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계시는 인간 각자의 두뇌안에 직접 밝혀진 것만이 아니고 (자연계시) 그것만이 아니고 역사 안에 구현된 구체적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계시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통해서 계시 내용을 파악할수 있다. 그렇다면 계시전달으 과정들이 신학의 소재가 된다. 즉 신학자는 이 계시전달의 여러가지 과정과 방법을 분석 통찰함으로써 계시의 주내용인 하느님을 학문적으로 파악한다.
계시전달의 전체 과정이 광의의 성전이고 그 중에서 영감으로 기록된것을 성경or성서라 하고 성경외에 기록되었거나 기록되지 아니하였거나 교회공동체의 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 것을 협의의 성전이라 한다면 신학한다는 것은 성경과 성전을 공부 연구한다는 말이된다. 성서는 그 전부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바로 계시 내용을 구성하는 소재이고,성전은 그 내용이 광범위하고 다양해서 어떤 것은 계시 내용이 되고 어떤것은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된다. 사도 시대의 원시 교회가 가르치고 신천하던 요소는 계시 내용을 구성하고 그 후 교회역사 안에서 생활해온 교회 전통들은 이미 구성된 계시 내용을 설명하는 역활을 한다.
*계시의 전달 과정-성서
-성전(성서에 기록되지 아니한 전통,but 성서외에 다 른 기록도 포함된다. )
-사도 시대 교회의 실천. (구성)
-그 후의 교회의 실천. (설명)
=신학의 대상이 됨.
1. 성서
하느님께서 구세사의 핵심적 도구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과 교회안에서 생겨난 성서는 사건으로서의 하느님의 계시를 담은 그릇이고 하느님의 말씀의 大宗을 리루기 때문에 신학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고 소재이다.
문헌으로 본 성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스라엘 백성과 원시 교회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실천되었는지를 증언하는 가장 귀중한 문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성서는 단순한 역사적 사료나 전거(典據)로서의 가치를 능가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서가 단순히 그것이 기록되던 시대의 인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문헌으로서는 고 문서에 속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서는 언제나 새롭고 현실적으로 모든 시대의 인간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의 소재로서의 성서는 문헌학이나 문학이나 역사학적 연구대상을 넘는 것이다. 또 그것은 순수 성서 주석학의 범위도 넘는 것이다. (문헌학,문학,역사학적 연구)전자에 그치면 그것은 성서를 고 문서의 하나로서만 취급하는 것이고 (성서,주석학)후자에 국한하면 이스라엘이나 초대 교회가 야훼나 그리스도의 실제에 대하여,또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들 스스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던가를 인식하는가에 끝난다. 그러나 신학은 성서의 주석을 원재료로 삼아서 이것을 여기(hic) 지금(et nunc)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는 성서를 연구하되 성서 주석에 머물지 않고 주석된 내용을 기초로 하여 논리적으로,체계적으로 계시 내용을 정돈하고 오늘의 인간에게도 성서가 또는 성서 내용이 현실화 되도록 반성한다.
신학의 모든 분과는 성서에서 그 내용과 원리를 얻어올 뿐아니라 성전안에서 성전을 따라서 이해된 성서가 신학의 마지막 논거가 되는 것이다.
*교회가 이해하는 성서를 의미. . . .
성서를 주석하는 것이 성서 연구의 본 과제이나 이것을 위하여는 먼저 성서의 경전 목록(經典 目錄)-무슨 책,무슨 책이 성서이냐는 것. Canon,영감(Inspiratio),무오성(無誤性-Inerrantio)-성서안에는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정전성(正典性-Authenticitas)-정식 경전,*cf)무류성-교회안에서 인간 구원의 진리를 속지 않게 가르침. . .
원본,역본,주석의 규칙 등등을 고려해야 하며 이런것은 성서학 입문에서 취급한다.
성서 즈석을 정확하게 하는데 필요한 언어학,고고학,민속학,서지학(書誌學),역사학,지리학,비교종교학 등의 보조 과학도 크게 신학을 도와준다.
2. 성서 이외에 성전도 신학의 원천 내지 소재가 되는데 그 중요성에 따라서 첫 째로 교도권을 들수 있다.
1)敎導권(Magisterium)
교도권은 계시를 보관하고 전달하는 주체인 교회의 신앙을 지도하는 책임은 교도권에 위임되어있기 때문에 교도권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신앙 문제에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가르쳐 왔는지 보는것은 성서연구 다음으로 중요하다. 더욱 성서연구자체가 교도권의 지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 필요성은 더욱커진다.
교도권은 그발동의 형태에 따라서 통상교도권과 특별교도권으로 구분된다. 통상교도권은 주교들의 일상적 가르침을 말하는데 주교의 설교,교서,교리서 인준,사목자의 임면,교구회의,지방회의,전국회의등을 통하여 행사된다. 그런데 전 세계의 주교들이 어떤 신앙문제에 대하여 일치하여 가르치는 것은 무류한 가르침이다.
특별교도권은 특수한 환경아나 여건에 대처하여 교리나 윤리의 어떤점을 결정적으로 정의하거나 어떤 오류를 단죄하는 경우인데 공의회의 결의나 교황의 교좌선언(敎座宣言)의 경우이다. 이 두 경우의 선언은 무류한 선언이다.
신앙교리의 어떤점을 명백하게 규정하기 위하여 공의회나 교황이 결정적으로 선언한 것은 전체 교회의 사목자 입장에서 특별교도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사도단을 계승하는 주교단은 공동으로 전체 교회에 대하여 교도권을 행사하면서 전체 교회를 대표하여 교회의 신앙을 공식으로 고백하는 것이 공의회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의회는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 행위이기에 공의회 문헌은 성서다음으로 중요한 신학의 소재가 된다.
*행위-공의회 교령이나 조항은 주교의 만장일치제를 체택 but 규칙이나 방법상 의 문제를 결의할때는 반드시 만장일치제를 채택하지 않음.
가장 권위있는 계시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교황의 특별교도권의 발동은 교황이 전체교회의 최고 목자로서의 권위를 발동할 의사를 표명하면서 신앙이나 도덕의ㅣ 어떤점에 대하여 결정적인 결단을 내릴때에 공의회의 결의와 같은 성질의 계시 해설이 성립된다. 이 경우를 교좌선언(Ex Cathedra-상징적)이라 한다.
공의회나 교황의 특별교도권에 의한 결정이라도 신앙이나 도덕 문제를 지적해서 의식적의로 결정적으로 선언한 결론만이 신앙의 내용이고,그러한 결론을 이끌어낸 논거나 논증까지 신앙의 대상은 아니고 다만 신학적으로 참고 자료가 될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결점은 그 당시 시대배경에 비추어서 해석하되 최대한 정확하게 축소하여 해석해야 한다.
3. 전례 典禮(Litugia)
전례는 교도권 다음가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전례는 교회가 믿고 있는 것을 경신례를 통하여 실천하는 행위이므로 신앙고백 행위이고 성서와 교리를 표현하는 문헌들로 짜여져 있으며 또 어떤 교리적 의도에서 어떤 전례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전례행위(ex축일)가 어떤 신조와 내적 관련이 있고 온 교회안에 실시되고 있을때에 그 전례행위는 교회의 믿음을 구현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교회의 최초의 전례행위:최후만찬시 성체성사,즉 미사이다.
그러나,어떤 축일이나 어떤 전례행위에 사용되는 문장이나 동작이 개별적으로 다 교리적이라는 말은 아니며 종합적으로 볼때 교회의 교리적 감각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전례가 신학의 소재가 된다는 뜻은 그것이 신학적 논쟁의 집합이라기 보다는 계시의 어떤 점에 대한 전체 교회의 생각을 표명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전례는 그리스도교 신비의 적극적,전체적,미학적,표현일뿐아니라 뛰어난 교육행위요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의미와 계시의 핵심적 요소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종교적 관계의 웅변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성경과 성전을 구체적으로 행동으로써 해석하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심비안에 잠기게 하는 신앙의 샘이다.
전례에 관계되는 고고학, 학(Epigraphy)성화학(Iconography)성음악학 교회안의 오랜관습들 예를 들어 어린이 세례,성상공경,은사,죽은이들을 위한 기도,부제를 바로 주교로 서품하는 등등의 교회의 실천도 신학의 소재로서의 전례에 속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례에 채용된 성서나 성전의 상징적 비유적 해석도 신학적으로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성서 주석학에서 볼때는 덜 정확할지라도 살아있는 교회의 감각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4. 교부 敎父(Patres)
원래 교부란 말은 사목적을 수행하는 모든 주교를 지칭하고 또 공의회에 참집한 정회원들을 뜻하고 또 초기 교회의 정통신앙을 가르친 학자들을 가르친다. 이 학자들의 증언이나 행동은 사도 시대에 접근한 분일수록 우리에세는 더 권위있는 계시의 해설자들이다.
신하계에서 교부라부르는 범주는 일정한 규칙이 없지만 일반적으로 고대 교회의 저자일 것과 거룩한 생애와 그 가르침에 정통성 및 완전한 교회 공동체와의 일치가 어떤 저자를 교부라 부르는 표준이 된다. 다시 말해서 고대성(고대 사람),성성(거룩한 사람),정통성(정통적인 사람),이 세가지중 어느 한 가지라도 결핍되면 그냥 교회 저자라고 만 한다.
고대사에 있어서 성상론과 그리스도론이 활발하게 논의될때에 교부들이 많이 거론되었고 중세에는 이 고대 교부들을 아주 중요시하였다. 교부들의 권위를 그 후시대와 절연시켜서 생각할 수는 없다. 초대 교회에서 권한이란 그 후대 교회의 성령에도 작용하신다. 그러나,우리가 교부들을 특별히 중요시하는 이유는 그들의 시대에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적 부분이 대략 기틀을 잡았기 때문이다 성삼론과 그리스도론과 성사론의 골자가 성립되었고 미사의 전례의 기본형태가 정업되었고 교회 생활의 기본 범주가 성립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부들 전반의 일치된 견해는 우리에게 중요한 표준이 될 수 있다. 물론 교부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장이 다 절대적이란 뜻이 아니고 종합적으로 그들의 일치된 견해는 신앙문제에 대한 교회의 생각과 실천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위에 말한 여러 조건을 전제로 하여 동방교회에서는 다마스코의 요한 성인까지를Joannes Damascenus(+749) 서방교회에서는 Isidorus(+636)까지를 교부시대라 부른다.
5. 교회사의 흐름.
앞에 열거한 성서 성전 교도권 전례,교부외에 교회역사안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이나 일반 신자들의 신앙감(信仰感-Sensus fide)도,특히 어떤형태의 제도, 관습,문헌들이 일시적인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오랫동안 또는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서 인정되거나 실시되어 오는 것이면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성령의 작용이 암시되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교회법들 지방 교회의 회으록 수도회들의 역사,정신,규칙들 기타 교회내의 여러 제도(성직자,독신제도,교회의 사목체계 등등. . . )또 성인들의 행적,지방교회의 관습들이 신학의 소재가 된다.
물론 위에 말한 교회사의 구체적 신앙 생활의 형태들은 그 시대의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다음 시대의 신학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여리로 우리는 성서 이전의 교회가 있었던것처럼 신학이전에 교회의 생활이 있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무시하고 신학을 할 수 없다.
6. 신학자
신학자는 교회안에서 배우는 교회에 속한다. 교회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은 교도권의 임무이지 신학자의 임무가 아니다. 그러나,신학자들은 그들의 신학지식으로 계시의 어떤 정보를 더욱 명백히 또는 깊이 설명할수 있고 그들의 일치된 견해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신학자들의 일치란 다양한 시대와 장소와 학파들이 합의 할수록 효과있는 논쟁이 될수 있다. 어떤 학파의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반복되는 견해만 가지고는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는 볼수 없고 또 다른 면에서 일치된 견해라도 그것을 틀림없는 진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신학자들은 그들의 시대와 환경과 문화적 배경과 교육 과정과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여러학파나 개인의 주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신앙에서 이탈하지 않는한 어떤 신학파만 옳다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가톨릭 신학계의 경향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외에는 중세이후 지금까지 가톨릭 신학자나 가톨릭 신학파의 견해만을 취급하는 편협한 것이있으나 앞으로의 가톨릭 신학계는 동방교회와 계신교회의 신학자의 연구를 많이 참고해야 될 것이다. Orthodox(正敎합)의 성학자들의 의견은 큰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성령론,교회론,성화론등에서 배울점이 너무나 많다. 개신교 신학자중에서도 초기의 개혁 주장자들이나 현대의 개신교 신학자의 주장은 별로 참고 될것이 없다.
지금까지 신학의 고유한 소재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외에도 오늘의 신학이 당면한 많은 문제들이 있어서 인문과학과 자연과학도 신학이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이런것들은 아직까지 정립되지 아니했기 때문에 신학사 개요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겠다.
제4장 신학적 사변(思辯)
신학의 소재들을 연구 정리하는 실정신학이 제시하는 연구 결과는 하느님의 계시를 확인하고 그 계시의 표현양사을 파악하는데 의미가 있지만 그것만으로 신학이라는 학문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이성의 인식 법칙에 따라서 개념 규정과 명제의 판단과 추리작용을 통하여 계시된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설명하고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진술할 수 있어야 신학이 성립된다. 이러한 작업을 사변 신학이라 한다. 모든 과제에 대하여 실정(室訂)신학과 사변신학이 합해져야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신학적 사변을 전개하려면 먼저 계시의 전제 조건이 되는 하느님의 존재와 그 속성에 대한 규명과 인간 영성의 본질에 대한 규명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것은 건전한 철학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논리와 역사에 의겨하여 계시의 가능성과 계시사실의 존재를 논증하는 계시외적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교리가 인간의 건전한 이성적 진리와 모순되지 않으며 인간 본성의 요청에 부응한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들은 신학의 성립 가능성을 밝히는 일이기에 기초 신학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이것은 반대자들의 공격을 반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호교론(Apologetica)이라고도 한다.
기초신학을 한 후에 본격적으로 계시 내용 자체에 대한 연구가 따른다. 여기에는 당연히 철학적 인식론에 의한 논리적 방법이 사용된다.
1)통속적인 언어로 계시되었거나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된 것은 보다 명확하고 엄밀한 세련된 개념으로 설명한다.
ex)성삼교리의 Persona 개념,바울로의 in Christ,사랑의 여러 개념.
2)계시내용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고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사물과 비교해서 유추적으로(Analogice) 설명한다.
ex)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아버지의 개념을 유추한 것임.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어머니의 개념을 유추한 것임.
아우구스티노가 삼위 일체의 개념을 설명할때 사용 결과를 보고서 원 인을 유추하기도 한다.
*존재가치-선:당연히 있어야 할 상태를 그대로 간직한 것.
악:선해야만 당연한데 그 선이 없는 상태.
-물리적 악(=장애자)
윤리적 악=죄.
*악>죄:악자체는 죄라고 할 수 있고 죄는 반드시 악이다. 사회적 “악”속에 개인이 죄를 짓는 것이지 사회적 악은 반드시 죄는아님.
단,사회적 악이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 제공.
3)계시된 단편적인 명제들을 논리적으로 원인과 결과의 상호 관련을 밝힘으로써 체계화하는 일이 신학의 주된 임무이다.
ex)우리의 부활을 jxt의 부활에 연결.
하느님이 보편적 현존을 보편적 원인성을 밝힌다는 것.
4)이미 확인된 두개의 계시 진리에서 추리를 통하여 새로운 진리를 도출할 수도 있다. -교리
또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 계시진리와 또 다른 한 가지 이성적 진리를 전제로 하는 추리를 통하여 어떤 신학적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이 경우에는 매우 세심한 주의가 요망된다. -신학적 결론임. 교리화 아님(믿을 교리 아님)
ex)성체성사에서 축성된 제병을 주님의 살과 피로 여김,-성경말씀 그대로.
신학은 여러가지 분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그 모든 분과는 합하여 종합적인 단일 학문이다. 신학이 방법론적으로 또는 실용적 이유에서 여러개의 분과로 나누어 연구할 수 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계시에 입각한 신앙의 조명을 받은 이성으로써 탐구하기 때문에 하나의 신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3C까지는 신학은 실제로 단일 학문이었으나,14C부터 신비가들의 영적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관조하고 영성적 진보를 도모하려는 수덕신학(修德神學-Th. ascetica)과 신비(神秘-Th. mystica)신학이 분과 학문으로 분리되었다.
13C부터 사목자들의 고해성사 집전에 참고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실용적 참고서가 출연하였는데 그런 것들이
종합되어 16C부터 윤리신학(Theologia Moralis)이 분리되었다.
14-15C의 신학이 난삽하고 추상적인 테마에 몰두하여 구세사적 관점을 소홀히 하는데 대한 반동으로 계시의 소재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실증신학(室證神學-Th. Positiva)이 대두하였다.
종교 개혁 이후로는 개혁주의자들의 공격을 방어하고 역공을 하기위해서 시비 거리가 되는 것들을 주로 취급하는 논쟁론적 포교론이 발달하였고 17C에 이르러서는 분리 학문으로 정착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외에 각 분야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전문화되고 학교 교육의 편의상 프로그램의 필요성에 의하여 17C부터 마리아론,교부학,성서신학,사목신학등이 서서히 분과로 성립되었고 최근세에 오면서 선교 신학 Oecumenism(us)-교회 일치 운동 분과도 성립되었다.
신학 연구가 깊어지고 연구결과의 유용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보조 학문이 신설되기도 하였다. 철학은 처음부터 신학의 도구적 역할을 했지만,실증신학에서는 언어학,성서학,교회사,교부학등이 요청되었고 포교학에는 철학,사상사,문화사,종교학,종교철학등이 필요해졌고 실천신학에서는 윤리학,심리학,교육학,사회학,교회법학,전례학,웅변학 뿐아니라 분과에 따라서는 경제학,정치학,생리학,의학등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이 모든 보조 학문들이 신학 연구에 유용하려면 보조학문 자체가 정통학문이라야지 신학자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서 취사 선택되어서 이용당해서는 정상적인 신학 연구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학은 사변적이고 동시에 실천적인 학문이다. 하느님이 신비를 관조하는 것만이 신학으 목적이 아니고 구세사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목적 즉 인간의 구원에 이바지하는데 신학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