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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지나 인천 못미쳐 전철 동암역. 북쪽 광장으로 나와 큰 길을 따라 가다보면 ‘삶이 보이는 창’을 만난다.
현관 문을 열면 마루를 깔아놓은 무대 위에 2대의 기타가 벽을 의지삼아 기대서 있고, 그 옆에 텁수룩한 머리로 가디건을 걸치고 꼭 ‘동네 건달’ 같은 그가 서 있을 것이다. 그는 ‘어서옵쇼’라는 말 대신 슬그머니 웃음을 지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그의 스웨터 안에는 수줍은 듯 하얗게 로만칼라가 보일 것이다. 김정대 프란치스코 신부(44).
그는 성당에 있지 않고 ‘술집’에 있다. 그는 “성당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술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가 있다”고 했다.
“사제가 웬 술집이냐고 많이들 묻더라고요. 제가 원래 교육에 관심이 없어요. 그냥 사람들과 어울리며 삶을 나누다보면 서로 좋은 점들을 배우는 게 아니겠어요.”
김신부는 신부가 되기 전 회사생활을 했다. 신학과가 아닌 물리학과를 나온 그는 인천의 공장에서 생산 관련 일을 맡아봤다. 그러던 중 노사간에 문제가 터졌다. 그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지만 ‘높으신 분’들에게 노동자를 두둔하는 말을 했다. 그래서 ‘높으신 분’들에게 찍혔다.
“사람이 산다는 게 뭔가, 그런 회의가 들더라고요. 그게 수도원에 들어간 계기가 됐지요.”
그는 수도원에서 기도 생활을 하며 노동자들을 생각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떠올리며 그들과 같이 했던 ‘술집’을 떠올렸다. ‘그렇다! 술집을 하자.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잠시 들러 자신들의 삶과 노동의 고단함을 풀고 내일을 준비하는 곳.’
꼭 10년이 지나 그는 꿈을 이뤘다. 2000년 여름, 서품을 받고 부천 심곡동 본당에서 사목을 하던 김신부가 소속 예수회에서 가게를 얻어줘 지난해 7월 또 다른 노동사목으로 ‘술집 사목’을 시작했다.
그는 10여평 가게를 노동자뿐 아니라 모든 삶이 모일 수 있는 곳으로 꾸몄다. 무대를 만들고 기타를 가져다 뒀다. 노래방이자 무슨 일인가 저지를 수 있는 무대다. 문 앞, 컴퓨터 2대를 설치하고 책꽂이를 장만했다. 거금을 들여 프로젝션 TV도 설치했다. 소식을 들은 인천의 공단 노동자들이 ‘김신부님’을 찾아왔다.
그들은 빈 책꽂이에 책을 가져다 채워놓기도 하고 빌려가기도 했다. 노동을 끝내고 모인 아주머니들은 그곳에서 술 한 잔을 마시고 무대에 올라가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김신부는 이익을 남길 필요가 없는 술집이지만 적자는 면해야 했다. 그래야 삶이 보이는 창에 성에가 끼지 않을 터이니. 후원회원을 모집했다. 한달에 2만원. 회원들에게는 술과 안주를 싸게 줬다. 그러나 5개월을 넘어선 지금까지도 적자다.
오후 4시에 열리는 ‘삶이 보이는 창’은 6시가 되도록 창 밖만큼 어둠침침했고 찬기가 돌았다. 그때 텁수룩한 머리를 한 사내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는 여기저기 놓인 가스난로를 지폈다. 그제서야 구석구석 숨어있던 찬기가 슬금슬금 물러났다.
“삼류로 사는 걸 목표로 합니다. 최초니, 최대니 그걸 미친듯 좇는 게 얼마나 유치하고 역겹습니까? 오가다 틈 나면 여기 와서 창 밖으로 삶을 내려다 보세요.”
〈윤성노기자 3Dysn04@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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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서 옮겼습니다

글쎄,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이 술집을 차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 신부님들에겐 술 마시는 게 금기는 아니다. 술이야 마실 수 있다치자. 그렇지만 아예 술집을 차리고 나섰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