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마리애 2008년 7월호
전교는 왜 하는가?
작성자 레지오마리애(legio) 작성일 2008-06-20
차동엽․노르베르토 신부
전교가 그리스도인의 지상사명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한 목소리로 동의한다.
그러나 왜, 무엇 때문에 전교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답변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전교를 하는가? 신자수를 늘려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 하는가?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전교하는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의무이기 때문에 의무감에서 전교하는가? 혹은 레지오 활동의 의무이기 때문에 활동보고를 하기위해 전교하는가? 아니면 내가 천당에 가기 위해 공로를 쌓아야 하니까 전교를 하는가?
물론 이런 이유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이 본질적인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우리는 모두 전교의 본질적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전교는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다. 전교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이없는 사랑(티토 3,4 참조)을 전하는 것이다.
히브리 성서는 하느님의 이 사랑을 라함(영어로 Compassion)이라 표현한다. 이는 애,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나타낸다. 호세아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이 마음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한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호세 11,8; 공동번역)
이 세상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꼴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였으면 간장이 녹을 지경이었을까?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 알아도 등지고 사는 이들, 죽음의 늪에서 허덕이는 이들을 향해 애간장 끓이는 마음을 품고 계실 터이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고 사랑이며 연민이다. 그리고 이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바로 전교다. 전교는 다른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지금 내 안에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전교의 사명이 도무지 생겨날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에 감읍하지 못한 채 전교한다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그치고 말 것이다. 내키지 않는 의무이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먼저다. 그 사랑으로 이웃을 위한 사랑의 마음을 품는 것이 이웃에게 전교하는 것보다 먼저다. 하느님이 내 안에 불붙이신 그 사랑으로 원죄와 죽음과 죄의 상처로 가득한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을 품는 것이 무작정 전교 활동에 나서는 것보다 먼저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확신시킬 수 있을까? 하느님의 존재 자체도 인정할지 말지인 사람들에게 그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말한들 무슨 설득력을 가질까? 그리스도교는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가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느낄 수 있도록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성탄이며, 그 사랑을 증거하고 입증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애라고 그리스도인은 고백한다. 실제로 예수님은 하느님을 보게 해달라는 필립보 사도의 당돌한 요청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본다. 가톨릭의 원로인 구상 시인은 이 사실을 함축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다만,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시요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우리는 어린애처럼 그 품에 들어서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서로를 용서하며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다함없이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이고
그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그 사랑의 진실을 목숨 바쳐 실천하고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써 증거하였다
구상, 「나자렛 예수」 中
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하느님 사랑의 진실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그 사랑의 불멸에 대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님께서 품으셨던 마음이 애간장 끓는 하느님의 마음이었다. 이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동과 기적에 앞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친지들 앞에서 그들보다 더한 감정으로 슬피 우셨다(요한 11,35 참조). 오늘도 예수님은 고통 속에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같은 마음을 품고 계시지 않을까?
예수님은 어느 날 예루살렘을 멀찍이서 바라보시다가 장차 예루살렘에 닥칠 비극적인 멸망을 예견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2-44) 오늘도 예수님은 평화의 길을 모르고 헤매는 수많은 양들을 향해 통곡하고 계시지 않을까?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던 군중들의 배고픔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안타까워하셨다(마르 14,14; 루카 9,10-17; 요한 6,1-14 참조). 오늘도 예수님은 영적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이들을 무던히도 안쓰러워하시지 않을까?
이런 것들이 예수성심의 속내가 아닐까? 우리가 그 성심의 속내를 헤아리고 그 성심의 슬픔과 눈물을 볼 줄 알고 그 성심의 뜨거움을 느낄 줄 알 때, 그리하여 그 성심을 자신의 가슴에 품을 수 있을 때만이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신 예수님의 위대한 명령을 온전히 이행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의 삶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받고 그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거리로 뛰쳐나가 복음을 외치게 되어있다. 사도들처럼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충동이 일어나 복음을 전하게 된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고속도로변에 서 있는 대형광고 글귀는 결코 빈말이 아니다. Jesus loves You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