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교구장 부활 메시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지 않으면”
(요한 12,24)
부활의 기쁨이 온 세상과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기를 바라며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부활은 죽음의 두려움과 죄의 어두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과 희망을 안겨주는 기쁜 날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 되었던 죽음은 삶이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믿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이들에게 신앙의 기초이며, 희망의 근거입니다. 부활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두려움이나 절망과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부활의 신비이며 진리입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때로는 희생이고, 때로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는 것이고, 때로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의미와 가치를 외면한 채 부활의 영광만을 찾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촛불과 태극기가 하나 되는 부활의 은총을 구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세상은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펼쳐지는 무대입니다. 죄악과 어두움이 있는가 하면 절망과 고통의 십자가가 있고 이를 극복하려고 애쓰는 노력들도 있습니다. 이런 세상 안에서 교회가 살아가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기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믿음과 부활의 신앙을 증거해야 하며,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마태 5,13) 할 소명 역시 잊지 않아야 합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우리 사회에는 엄청난 두 가지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건은 부활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고, 두 가지 사건 안에 우리나라의 새로운 부활을 바라는 간절함이 담겨있기에 오늘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 가지는 국정농단 사태로 나라가 온통 부서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급기야는 대통령이 파면되는 상황을 맞이한 사건입니다. 신성한 국가의 중요한 일들이 몇몇 사람들의 농단에 의해서 더렵혀졌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엄청난 비리들은 우리나라가 성숙한 법치국가요 민주주의 사회로 성장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의 존재를 실감케 해주었습니다.
지난해 10월 말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국민을 귀하게 생각하며 마음에 품고 지내지 못하는 대통령에 대한 슬픔과, 영혼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던 무책임한 관료들에 대한 노여움을 보여주었고, 진정한 민주주의와 참된 지도자가 태어나기를 간절히 보여준 소중한 행렬이었습니다.
또 한편 우리는 가까운 거리에서 있었던 태극기의 물결도 기억해야 합니다. 태극기를 흔든 분들 가운데에는 어려운 시대를 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어 낸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시절을 이겨냈고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뼈저리게 체험한 분들이기에 진심에서 우러나와 나라를 걱정하며 또 다른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평화롭고 참다운 민주주의가 세워지는 나라로 나아가기 위해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참된 평화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하나 되려는 마음들이 모아져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선물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하나 되려고 기도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실현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평화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부활의 거룩한 밤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돌들을 치우며 부활을 맞이합시다.
또 한 가지 사건은 바다에 침몰했던 세월호가 이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3년 전 성삼일이 시작되는 날 침몰했던 세월호는 우리 사회의 모든 악습과 병폐를 안고 바닷 속에 가라앉았다가, 이제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채 헝클어지고 할퀴어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많이 탓해 왔듯이 대한민국호를 상징하는 세월호는 수많은 비리, 잘못된 관행 그리고 무책임함 같은 이 사회의 총체적인 잘못들이 침몰시킨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눈물로 애원하며 진실을 밝히려는 유가족들과 국민, 그들의 진정한 마음을 외면했던 사람들…. 침몰한 후 부활을 향해 가는 사순절 막바지에 나타난 세월호는 우리에게 부활의 참된 의미를 묵상하게 해줍니다.
부활은 우리가 진실과 정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지 않으면’(요한 12,24) 안 되는 우리의 결심과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아직 우리 사회는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들이 많이 있고, 세월호를 침몰시켰던 우리 사회의 더러운 돌들이 남아 있습니다. 무덤에 있던 돌들을 치우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우리 사회의 많은 죄악의 돌들을 함께 치워나가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죄악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우리가 이 시대의 죄악과 어두움을 몰아내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부활의 빛으로 비추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갈릴래아로 향해 떠나’(마태 28,10)갔듯이, 이제 우리는 우리의 갈릴래아, 정의와 사랑과 평화가 메말라 있는 갈릴래아로 떠나도록 합시다.
2017년 부활 대축일,
교구장 이 기 헌 베드로 주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