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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영성체를 기다리는 아이들 (사진/한상봉) |
예전엔 찰고(察考)라 했다. 대략 6개월 정도 걸리는 예비신자 교리교육이 끝나면 출석부를 점검하고 그동안 배운 내용을 물어보고 기도문도 외워보도록 해서 세례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찬찬히 짚어보는, 일종의 자격시험이다. 찰고는 꼭 세례 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성사(예를 들면 첫영성체, 견진, 혼인, 부활 성탄 판공성사 등)를 받기 전에 꼭 치러야 하는 필수 과정이다. 선배 사제들이 다 그렇게 해왔듯이 나도 보좌로 사제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한 20년 가까이 그렇게 천주교신자를 만들어냈다.
찰고를 할 때마다 나는 늘 기분이 언짢았다. 왜 그랬을까? 세례를 철저하게 준비시킨다는 것이 오히려 한 가족이 될 사제와 교우 사이를 무서운 훈육주임선생과 그 앞에 끌려온 학생 같이 부담스럽고 어렵게 만들기 일쑤였던 때문이다. 나는 한참 뒤늦게야 비로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예비신자 교육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성찰을 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교과서를 읽고 이해를 돕는 것이 교육인 줄 알았던 것이다.
예비신자 교리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묻는 것은 “얼마나 다니면 되느냐”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단다. “무엇을 공부할 것이냐”는 큰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과정을 마친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도 세례는 받겠다는 것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정말 답답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세례를 받으려 할까?
알아야 하는데 모르는 게 무엇인지는 아는가? 세례를 받으면 바로 하느님의 은혜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서 소원 성취한다고 배웠나? 그러니 일단 받고 보자는 심사인가? 하기야 예비신자를 인도하는 기성신자(이분들이 나중에 대부, 대모가 된다)들은 대부분 ‘교리반에서 배울 것’은 말하지 않고 ‘반년만 다니면 되는 것’을 말하니 그럴 만도 하다. 근래에는 세례 받고 반년도 못됐는데 얼굴이 안 보이는 신입생(?)들의 수가 부쩍 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세례를 받은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한번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당장은 아무것도 몰라서 교회에 안 나갈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간혹 듣는다. 그래서 군부대의 사병들이 주일에 초코파이 얻어먹으러 성당에 서너 번 오면 모아놓고 세례를 주나? 밑져야 본전인가? 그래서 황금어장인가? ‘교회로 돌아온다’는 표현이 탕자의 참회를 의미하나?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예비신자 교리교육은 총체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나름대로 바람직한 예비신자 교리반을 그려본다.
예비신자 공부는 단지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과정이 아니다. 예수의 삶을 배우고 실제로 예수처럼 사는 연습을 해보는 실습장이다. 세례가 목적이 아니고 예수가 목적이다. 예수처럼 아픈 사람을 돌보고, 가난한 사람과 먹을 것을 나누고, 이 사회의 비주류를 끌어안고, 옳은 일에 분연히 나서볼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용산에도 가보고,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방문하고, 지방의회나 국회의 방청석에 앉아서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토론도 해볼 일이다. 4대 강변도 걸어볼 일이다.
예수처럼 사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가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몇 가지 안 되는 교리교과서는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에 치중하니 구원(혹은 복, 은총)을 비는 것은 배워도 그분처럼 사는 연습은 하기 어렵다. 예수를 받들어 모시고 공경하는 대상으로만 본다면 그분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었는지 알 필요도 없다. 세례를 받아도 예수가 누군지 모르면 엄밀히 말해서 예수의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인구 대비 복음화율 몇%라는 교세는 완전 거품일 뿐이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반년만 다니면 되는’ 이 거품에 목을 맬 것인가?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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