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신앙유적지답사: 춘천교구 포천지역+의정부교구 양주

2016. 7. 29. 오후 2:45:27

글자


포천지역 성지순례
- 기도하며 순례하기 3-


  ■순례지 :  ○ 포천성당 : 11시미사
              ○ 포천관아와 형장터
              ○ 포천신평공소
              ○ 포천해룡마을: 최초공소
              ○ 이벽묘소, 생가터

              ○ 갈곡리공소
              ○ 우골마을(우고리)


  ■순례목적 :  순례봉사자 기도하며 순례하기
          
  ■순례일시:  2016. 3. 27.(일) 08:00 절두산출발 ~

  ■순례자  :   - 양재권
                - 김광자
                - 윤정화
                - 김기혁 (자료정리)
               



기도 순례


경기북부 포천-양주-파주
포천해룡마을 –포천성당(11시미사) -포천형장터 –포천관아옥터 -포천신평공소
-이벽묘소,생가터(14:30) -우고리,우골-갈곡리공소(15:30)-주엽역(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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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성당
춘천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138-32 소재. 1956년 2월 21일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가정.

1950년대 군부대가 세운 건축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

 포천 성당 경내에 들어서면 사제관 앞 언덕을 둔중하게 두른 거대한 축대 위에 지붕은 온데간데 없고 벽체만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석조건물 ‘성 가브리엘 성당’이 있다. 1955년 경 당시 육군 6군단 군단장이었던 이한림(가브리엘) 장군이 군의 원조를 받아 지은 고딕 양식이 가미된 장방형 평면의 강당형 석조 건물이다.
1950년대엔 유난히 석조 건물을 많이 지었는데 포천 성당은 군부대가 직접 세운 것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당이다. 1990년 사업에 실패한 전직 경찰 출신이 성당 안 제의실에서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다가 불을 내는 바람에 벽체만 남긴 채 지붕이며 제대, 성물이 모두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불이 난 뒤 지역 신자들이 건물 붕괴를 우려해 성당을 헐어 새로 짓자고 했지만 문화재의 가치가 크다고 판단한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와 포천 성당 신부, 학자들의 주장으로 등록문화재 목록에 올랐고, 2006년 9월 19일 등록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비록 성당안 구조물은 모두 소실됐지만 서쪽 벽에 뚜렷하게 남은 감실과 제의 때 신부들이 감실을 오르내리던 계단은 신자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제대가 놓여 있던 제단이 두개의 층으로 구분된 것도 흥미롭다.
건물 정면 중앙에 종탑을 두고, 벽체가 60~65cm 정도로 두꺼우며, 건축물을 외부에서 지탱해주는 버트레스 장치를 했다. 화강석 조적구법, 단일 홀로 구성된 강당형 평면, 종탑과 뾰족한 아치 창호 등 6.25 전쟁 전후 석조 건축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종교사적·건축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 1950년대 중반 군부대에 의해 지어져 역사는 그다지 오래지 않지만 훼손된 뒤 복원의 손길을 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포천 지방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그의 아들 홍인 레오의 순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믿음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신유박해 이후 박해를 피해 다른 지방의 신자들이 포천 지방으로 옮겨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900년 초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 해룡마을에 포천 지방 최초의 공소가 설치된 이후 내촌, 맑은 데미, 송우리, 고일리, 오가리, 새묵이 등지에 공소가 설정되었다고 한다. 포천 지방은 1921년경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전교 활동을 하고 있던 손성재 야고보 신부에 의해 사목되다가 그 후 1930년 개성 본당,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행주 본당, 1935년부터 덕정리 본당(현 의정부 주교좌본당)의 관할 지역에 속하였다.

1956년 포천 본당이 설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포천 일대에 주둔한 6군단 군단장 이한림(가브리엘) 장군의 도움이 컸다. 독실한 신자였던 이한림 장군은 익명의 독지가가 기증한 1,000여 평 대지에 공병 부대의 도움을 받아 성당 건축을 추진하였다. 1955년 11월 60평의 석조 건물로 된 성당과 사제관 20평을 완공하였고, 12월에 춘천 대목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건축을 전후로 잠시 6군단 조상익(趙相益) 베드로 군종 신부가 포천 신자들의 사목을 담당하다가 1956년 2월 김진하(金瑨河) 요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포천 본당이 설립되었다.
김진하 신부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공소들을 방문하면서 사목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미국 가톨릭 복지협의회 산하 전쟁 구호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한국 전쟁 직후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의 구제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본당의 발전을 논의하기 위해 사목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뒤이어 신심 단체인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였다.
(발췌: 순교의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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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지방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그의 아들 홍인(洪鏔) 레오의 순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믿음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신유박해 이후 박해를 피해 다른 지방의 신자들이 포천 지방으로 옮겨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900년 초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 해룡마을에 포천 지방 최초의 공소가 설치된 이후 내촌, 맑은 데미, 송우리, 고일리, 오가리, 새묵이 등지에 공소가 설정되었다고 한다. 포천 지방은 1921년경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전교 활동을 하고 있던 손성재(孫聖載) 야고보 신부에 의해 사목되다가 그 후 1930년 개성 본당,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행주 본당, 1935년부터 덕정리 본당(현 의정부 주교좌본당)의 관할 지역에 속하였다.
1956년 포천 본당이 설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포천 일대에 주둔한 6군단 군단장 이한림(가브리엘) 장군의 도움이 컸다. 독실한 신자였던 이한림 장군은 익명의 독지가가 기증한 1,000여 평 대지에 공병 부대의 도움을 받아 성당 건축을 추진하였다. 1955년 11월 60평의 석조 건물로 된 성당과 사제관 20평을 완공하였고, 12월에 춘천 대목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건축을 전후로 잠시 6군단 조상익(趙相益) 베드로 군종 신부가 포천 신자들의 사목을 담당하다가 1956년 2월 김진하(金瑨河) 요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포천 본당이 설립되었다.
석조 성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구 포천 성당은 2006년 등록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김진하 신부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공소들을 방문하면서 사목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미국 가톨릭 복지협의회 산하 전쟁 구호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한국 전쟁 직후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의 구제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본당의 발전을 논의하기 위해 사목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뒤이어 신심 단체인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였다.
1969년부터 가평군과 포천군 일대가 서울대교구로부터 분할되어 춘천교구에 편입됨에 따라 강원도 일대의 선교를 담당하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크로스비(P. Crosbie, 조선희) 필립보 신부가 포천 본당의 8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70년 11월 운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하고, 양문, 관인, 지포리, 문혜리 일대 신자 306명을 이관하였다. 1971년 11월 4일에는 크로스비 신부의 권고에 따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에서 포천읍 신읍리 151-3번지에 2층 건물 44평과 2층 창고 건물 12평으로 된 수녀원을 세웠다. 같은 해 11월 7일 일동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하여 내촌면, 일동면, 이동면, 화현면 등지의 신자 279명을 이관하였다. 그리고 11월 말에는 미군 부대의 협조를 얻어 경사면의 성당 대지를 평지로 조성하였으며, 1972년 8월 해룡마을에 마을 회관을 겸한 해룡 공소 회관을 건립하였다.
1990년 구 성당이 방화로 전소된 후 1992년 새로 신축하여 봉헌한 새 성당 외관.9대 주임 페리(F. Ferrie, 황) 프란치스코 신부 재임기인 1977년 2월에는 본당 신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포천 대건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1978년에는 신자들이 영적 독서와 성서에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본당 내 교리실을 도서관으로 바꿨고, 1979년 11월 약 40평 규모의 유치원 건물을 완공하였다. 10대 주임 누젠트(W. Nugent, 유) 월터 신부 재임기인 1980년 4월에는 유아들의 교육을 위해 복자유치원을 개원하였고, 1982년 5월에는 성당 정문부터 사제관까지 도로 포장공사를 시행하였으며, 1983년 11월에는 2층 건물로 된 사제관을 완공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1대 주임 엘리스(G. Ellis, 엄) 제라르도 신부 재임기인 1984년 4월에는 레지오 마리애 첫 모임을 개최하였고, 1985년 1월 13일에는 성체회를 발족하였으며, 1월 26일에는 청년회를 26세 이상 청년회원을 중심으로 ‘젊은이의 모임’이란 명칭으로 분리하였다. 또한 1987년 3월 초등부 주일학교를 후원하기 위한 자모회를 조직하는 등 본당 내 각 단체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88년에는 1969년부터 약 20년간 본당의 사목을 담당해 오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들 대신 한국인 사제인 허동선(許東善) 마태오 신부가 1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허동선 신부 재임기인 1988년에는 신평 공소 내에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청년 레지오인 황금 궁전 쁘레시디움과 부부들의 모임인 M.E.를 새롭게 결성하였다. 13대 주임 박우성(朴宇成) 사무엘 신부 재임기인 1989년 6월에는 송우리 공소 사도회를 발족하였고, 7월에는 청장년들의 모임인 프란치스코회를 창단하는 등 신심 단체 조직을 통해 본당 활성화에 주력하였다.
새 성당 제대.1990년 7월 11일 한 취객의 방화로 인해 성당이 완전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주임 신부와 신자들은 화재 발생 다음날인 7월 12일 성당 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성당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였다. 박우성 신부와 신자들은 새 성당 건립을 위한 ‘사랑과 나눔의 바자회’ 개최 등을 통해 모금한 기금과 전국 각지에서 받은 성금으로 1992년 3월 새 성당 기공식을 거행하였고, 12월 10일 총건평 205평, 연건평 204평의 지하 1층 · 지상 2층으로 된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91년 8월에는 송우리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하였다.
14대 주임 김정식(金晶植) 토마스 신부 재임기인 1994년 10월부터 수녀원 보수와 증축 공사를 시작하여 12월에 축복식을 거행하였고, 1999년 5월에는 서울대교구 동두천 · 노원 · 덕정 본당 및 춘천교구 송우리(현 솔모루) 본당 신자들과 함께 ‘한마음 가족 체육대회’에 참여하여 교구의 벽을 넘어 친교의 장을 마련하였다. 15대 주임 강성구(姜成求) 요한 신부 재임기인 2000년 6월 철원 월정리에서 개최된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 대회’에 본당 신자 150여 명이 참석하여 남북한의 화합을 기원하였고, 2003년에는 타본당 돕기의 일환으로 2차 헌금을 모아 신남 본당에 전달하였다. [출처 : 양인성,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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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전쟁 후 군부대 지원을 받아 지어진 옛 포천 성당은 1990년 한 취객의 방화로 목조 마룻바닥과 지붕틀 등이 불타 뼈대만 남았지만 역사 보존 차원에서 1992년 새 성당을 건립한 후에도 헐지 않고 보존해왔다. 이한림 장군은 신앙 역사가 신유박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포천에 성당이 없는 것을 알고 1955년 포천 어디서든 잘 보이는 왕방산 기슭 언덕에 인근 덕정리에서 가져온 화강석으로 성당을 건립하였다. 이듬해 본당으로 설립된 포천 본당은 그 후 춘천교구 서부 지역, 즉 경기북부 지역 복음화의 산실이 되었다.
옛 포천 성당은 한국 전쟁 직후에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의장적 특징(종탑과 뾰족한 아치 창호)과 공간적 특징(단일 홀로 구성된 강당형 평면), 화강석 조적구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또 한국전쟁 이후 많은 교회 건물을 석조로 지었지만 군부대가 직접 세운 것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9월 19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옛 성당은 내벽 풍화와 균열이 심하고, 외벽도 인위적 충격이 가해지거나 강풍이 불면 붕괴될 가능성이 있어 출입로를 폐쇄하고 위험 경고판을 세워 놓았다.
2006년 5월 1일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진 포천 성당은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홍인 레오 부자의 순교 정신을 계승하여 보다 활기찬 신앙 공동체로 거듭나고자 내실을 기하고 있다. 2011년 초에는 성당 구내에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할 레오 회관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포천의 사도인 홍교만과 홍인 부자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최종수정 2014년 8월 22일] (발췌: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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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관아와 형장 터

하느님의 종 홍인 레오가 참수형으로 신앙의 씨를 뿌린 증거터

 경기도 포천은 한국 천주교 전래 초기 신유박해 때 포천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씨앗을 뿌린 ‘하느님의 종’들인 홍교만과 그의 아들 홍인 부자가 한양에서 이주해서 살던 곳이며, 아들 홍인 레오가 신앙을 증거하고 참수 치명한 곳이다. 포천 지역에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이들의 순교 정신 때문이다.
구 천주교 포천 성당이 처음 지어질 때만 해도 이렇다 할 신앙 공간이 없었지만 포천 지역은 원래 믿음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이 포천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 바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홍인(洪鏔, 1758~1802, 레오)으로, 지금도 천주교사에 굵은 선으로 남아 있다.
경기도 포천은 하느님의 종들인 홍교만(洪敎萬, 1783~1801,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그의 아들 홍인 부자가 한양에서 이주해 와서 살던 곳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모두 체포되어 홍교만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고, 그의 아들 홍인은 고향 포천으로 이송되어 참수 치명하였다. 포천 지역에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죽음을 초월한 이들의 열성 때문이었다.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양 출신으로 훗날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해 와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해 오고 있었으며, 그도 높은 벼슬을 지낸 맏형과 함께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진사가 되었다. 포천으로 이주해 사는 동안, 그는 양근에 사는 고종사촌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을 왕래하다가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나, 그는 즉시 신앙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먼저 천주교에 입교한 아들 홍인으로부터 교리에 대해 자세히 들은 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찾던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실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자신의 학식을 이용하여 더 깊이 교리를 연구하고 포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노력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사돈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두다 발각되었고, 아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즉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가 1801년 4월 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홍인 레오는 포천에서 첫 번째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의 부친 홍교만은 그보다 먼저 한양으로 압송된 지 얼마 안 되어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고, 그 뒤를 이어 홍인도 포도청과 형조에서의 문초를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포천으로 이송되어 1802년 1월 30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 순교자
◆ 복자 홍인 레오 (1758∼1802년) >
홍인 레오의 집안은 본래 한양의 이름 있는 집안이었으나, 그의 부친이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 한양에서 순교한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바로 그의 부친이다. 그의 가족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1791년경 그의 부친이 양근 땅에 살던 고종 사촌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이후 그는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는데, 오히려 부친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교리를 전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부친을 신앙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부친과 함께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서(庶) 5촌 당숙인 홍익만(안토니오), 황사영(알렉시오) 등과 함께 교류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 부친과 같이 포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부친 홍교만은 한양으로, 그는 포천으로 각각 압송되었다가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그에 앞서 그의 부친은 한양으로 압송된 지 얼마 안되어 순교하고, 홍인도 그 뒤를 이어 고향 포천으로 이송되어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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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이벽묘소
-묘소 : 경기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산 289-1
-생가터 : 경기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543-1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중 한 명인 이벽의 묘와 탄생지

 한국교회 창설 주역 중 한 명인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5)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자 초기 신앙공동체를 구성한 인물이다. 이벽은 이승훈을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아오게 했으며, 그 역시 1784년 겨울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식으로, 이벽의 집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처음 세례식이 집전된 역사적 장소이다. 이벽은 조선왕조 치하에서 순교한 신앙선조 가운데 제2차 시복추진 대상자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시복절차를 밟고 있다.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인 이벽은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건장한 신체에 무술에도 능했으며, 경서(經書)에 전통하고 언변도 좋아 물 흐르듯 했다고 한다. 아버지 부만은 이벽이 무관으로 출세하길 바랐으나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벽(僻)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이벽은 조선 천주교 창설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1777년 이래 주어사, 천진암에서 있었던 수사학(洙泗學)적 분위기의 강학을 그리스도교 진리 탐구와 실천적인 분위기로 바꿨고, 이승훈에게 천주교를 소개하여 중국에 가 영세를 받게 함으로써 1784년 많은 조선인 신자 공동체를 이룩하게 하였다. 한국 천주교가 이 해를 천주교 창설의 원년으로 삼아 기념하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이벽의 선구자적 역할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천주교 신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기 집안에 불행을 가지고 올지도 모를 이 종교를 버리게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썼다. 이벽의 아버지도 이벽을 배교시키기 위해 나섰다. 이에 이벽은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고 그 후로는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그는 가정의 박해속에 살다가 1785년(또는 1786년) 33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 이벽의 묘 이장
 이벽의 묘와 그 후손들의 흔적을 찾아오던 변기영 신부는 백방으로 꾸준히 노력한 끝에 1979년 2월 15일 마침내 경기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산 289-1 번지 공동묘지 갓등산 낮은봉에서 이벽의 묘를 발견했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곳에서 이벽 성조의 부친 이부만 옹의 묘와 동생 이석의 묘도 함께 발견됐다. 묘지 아래 동네(화현리 543-1번지)를 생가터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장이 불가피하고 시급한 처지였으므로 이장 준비위원회를 꾸려 1979년 6월 21일 목요일에 주교들과 많은 신부, 수녀, 평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묘를 발굴하니 “통덕랑 경주 이벽지묘”라는 지석이 한가운데서, "공인 안동권씨지묘"와 "공인해주정씨묘"라는 두 부인들의 지석 좌우편에서 나오고 그들의 유해가 완연하게 나왔다.
당일로 이벽 성조의 유해는 혜화동 성당에 안치됐고 다음날 혜화동 성당에서 이벽 성조의 유해를 새 관에 입관하면서 머리 상투와 치아 23개, 우측 두골 등을 취해 냈으며, 그 유해들은 묘지석, 관조들과 함께 새로 건립될 기념관에 모시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 이벽 성조의 유해는 주교좌 명동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다음 날 즉 24일, 주일이며 동시에 이벽 성조의 영세 본명 축일을 맞아 낮 12시에 그곳 명동 성당에서 한국인 최초의 주교 노기남 대주교와 역시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의 공동 집전으로 이장 미사를 성대히 거행됐다. 유해는 미사가 끝난 후 즉시 출발해 15일 전부터 구축된 천진암 새 묘지에 1979년 6월 24일 오후 3시 30분에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하관 예절을 마쳤다.

◆ 이벽의 출생지와 순교지의 화현리설
 서종태 교수는 강원교회사연구소 주최로 2012년 3월 17일 춘천교구 포천 성당 레오회관에서 개최된 ‘광암(曠庵) 이벽과 포천 지역 천주교’를 주제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서 “이벽이 속한 경주 이씨 족보에 의하면 포천 화현리에 이벽의 부친인 이부만과 그 후손들의 묘를 비롯해 이부만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집터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에 따라 포천 화현리는 이부만부터 그의 가계가 대대로 살았던 세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또 이벽의 탄생지로 광주 두미와 포천 화현리가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포천 화현리는 이부만부터 그의 증손대까지 4대의 묘가 들어선 선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부만부터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집터가 있었고, 「이벽젼」에서 이벽의 탄생지를 포천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벽의 탄생지로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서 박사는 이어 "자식을 배교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던 이벽의 부친은 그를 고향집으로 불러들여 천주교인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 분명하다"면서 "이벽이 가정의 박해를 받아 치명한 곳은 객지살이하던 광주 두미나 서울 수표교 인근 집이 아니라 포천 화현리에 있던 고향집으로 이해하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 1754 ~ 1785?)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인 이벽은 경주 이(李)씨 부만(溥萬)의 둘째 아들로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광암(曠菴)이다. 건장한 신체에 무술에도 능했으며, 경서(經書)에 전통하고 언변도 좋아 물 흐르듯 했다고 한다. 아버지 부만은 이벽이 무관으로 출세하길 바랐으나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벽(僻)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1년) 권철신 · 정약전 등과 함께 강학에 참가하여 하늘, 세상, 인성(人性)에 대해 토론하였고 옛 성현들의 윤리서 등을 함께 검토함과 아울러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한역판(漢譯版) 철학, 수학, 종교서적 등을 공부하였다. 1783년 정약전 · 약종 형제들과 함께 하느님의 존재와 그 유일성, 천지창조, 영혼의 신령성(神靈性)과 불면성, 후세에서의 상선벌악 등의 철학적 논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초보적인 지식 속에서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던 이벽은 1783년 겨울 이승훈이 북경사절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훈에게 찾아가 천주교에 대해 소개하고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도 받아서 돌아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구해 오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북경에서 그라몽(Grammont, 梁東材)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은 이승훈이 1784년 천주실의, 기하원본과 같은 서학서적, 상본, 망원경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이것을 받아든 이벽은 외딴 집을 세내어 천주교 교리연구와 묵상에 몰두하였다.
이를 통해 이벽은 종교의 진리에 대해 더욱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고, 중국과 조선의 미신에 대해 철저히 반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칠성사와 연중기도, 성인의 행적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도 연구하였다. 이벽은 드디어 1784년 음력 9월경 수표교에 있던 자기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복음의 전파에 나섰다.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김범우, 지황 등의 중인계급과 마현의 정약전 · 약용 형제,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 등의 양반계층에도 복음을 전파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유림(儒林)은 천주교 교리가 국가의 지도이념인 성리학적 윤리체제를 송두리째 파괴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중 이가환은 “서교(西敎)가 비록 명설(明說)이긴 하지만 정학(正學)은 아니다”고 하면서 이벽을 토론으로써 설득하려 했으나 이벽의 정치한 논리와 장하(長河) 같은 웅변에 오히려 설득 당했다 한다. 이기양도 이벽과 토론했으나 이벽이 세상의 기원, 우주의 질서, 하느님의 섭리, 영혼의 본성, 후세의 상벌과 조화에 대해 설명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로부터 1년 후인 1785년 중인 김범우가 형조에 잡혀가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단양(丹陽)으로 귀양가는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화로 평소 천주교에 대해 못 마땅하게 생각하던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천주교 신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기 집안에 불행을 가지고 올지도 모를 이 종교를 버리게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썼다. 이벽의 아버지도 이벽을 배교시키기 위해 나섰다. 그는 성질이 급한 사람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벽의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배교만을 강요하였다. 이벽이 말을 듣지 않자 그는 목을 매어 자살하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이벽은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을 써서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고 그 후로는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그는 자신의 배교적  행위에 대하여 무서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다가 1786년 33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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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곡리공소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


 갈곡리 공소는 약 110여 년 전 홍천과 인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 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이다. 성당 앞 마당도 옹기를 굽던 곳이며, 신앙의 역사답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공소다.
의정부에서 서북쪽으로 20km, 문산에서 동쪽으로 12km 지점에 있는 갈곡리 공소는 옛날에는 칡이 많던 곳이라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리었고 순수 우리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다. 이 마을이야말로 파주 지방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다. 이 마을은 6·25 전쟁 전만 해도 수풀과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험한 지대였고, 동쪽에 있는 커다란 고개를 넘으려면 20여 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하여 “스르내미”(스물 넘어) 고개라 한다.
이렇게 험한 첩첩산중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10년 전이다. 홍천과 인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처음에는 칠울에서 남동쪽 6km 떨어져 있는 “우골”(현 우고리,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5년째 되던 해인 1896년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프란치스코, 박 베드로 가족이 이곳 칠울로 이주 정착하게 된다.
이로써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곳 칠울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칠울과 우고리 고령 등 인근에 옹기 그릇을 만드는 점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성당 앞마당도 옹기를 굽던 곳이었다고 한다.
1898년 신자 수 65명으로 약현 본당 칠울 공소가 설립되고 1900년 2년 사이에 신자 수가 곱절이 넘는 145명으로 늘어났다. 1901년 송도(개성) 본당이 새로 설립되어 약현 본당에서 송도 본당 공소로 이관되었고, 1923년 신암리 본당 신설로 인하여 칠울 공소는 11년 동안 신암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 1934년 신자 수가 급격히 줄어든 신암리 본당이 공소로 환원되고 덕정리 본당이 신설되어 칠울 공소는 1947년까지 13년 동안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
1947년에는 의정부 본당이 신설되어 1963년까지 16년 동안 의정부 본당 공소가 되었으며, 1955년 1월 군종 신부 에드워드 마 신부의 도움으로 현재와 같은 공소 건물이 건립되어 노기남(盧基南, 1902~1984, 바오로) 대주교의 주례로 축성 봉헌되었다. 1963년 7월 4일 법원리 본당 신설과 함께 의정부 본당에서 법원리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신앙의 역사답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공소다.




양주 신암리 성당

의정부 지역에 박해를 피해 모여 들어온 사람들이 형성한 교우촌


 신암리는 지금은 농촌이지만 예전에는 산림이 울창했던 곳으로 신암리 성당은 모진 박해를 피해 모여든 사람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생겨났던 공소다. 구한말 우고리와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와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2008년 9월 12일 준본당으로 승격하였다.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성당 건물도 새로 건립하였다.

신암리에 개성 본당 관할의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9년이었다. 이때 개성 본당의 주임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1866~1928, 루이) 신부였고,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신암리로 와서 판공성사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런데 개성과 신암리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신앙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당시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1926년 대주교로 승품)는 신암리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최문식(崔文植, 1881~1952, 베드로) 신부가 초대 주임 신부가 되었다. 1931년 신암리는 다시 행주 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1935년에는 양주군 덕정리에 본당이 생기고, 덕정리 성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46년 김피득(金彼得, 1904~1954, 베드로) 신부가 덕정리 본당의 주임 신부로 부임해 왔다. 김피득 신부는 덕정리 성당을 매각하고 의정부시 의정부동에 대지 1,625평을 매입하여 성당을 옮겼다. 이때부터 신암리 공소는 의정부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6.25때 신암리는 폭격을 당해 초토화되고 말았다. 1952년 9월 의정부 본당에 이계광(요한)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신암리 공소는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박복선 형제의 주도로 신암리 신자들의 노력과 영국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 공소를 재건하였다.
구한말 박해를 피해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된 신암리 신앙 공동체는 1909년 개성 본당 관할 공소로 설립된 후 1925년 3월 본당으로 승격돼 본격적인 지역 복음화의 길을 걸었다. 1930년 다시 공소로 환원된 후 지난 1959년부터 동두천 본당 공소로 편입돼 신앙의 명맥을 이어 오다가 2008년 9월 12일 준본당으로 승격하는 등 다난한 역사를 걸어왔다.
이곳이 고향인 서울대교구이경훈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은인들의 도움으로 성당 건물을 새로 건립하여 이곳 출신 순교자로 전해져 오는 박 다미아노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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