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신앙유적지답사 : 인천교구

2016. 7. 18. 오후 7: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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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지역 성지순례
- 기도하며 순례하기 1-


  ■순례지 :  1. 답동성당
              2. 제물진두 순교터   
              3. 해안성당 + (개항박물관)
              4. 반주골 이승훈 베드로 묘  + (대골공소)
              5. 부천 함박이, 싯골
              6. 김포성당


  ■순례목적 :  순례봉사자 봉사심회복 (불씨 살리기 : 기도하며 순례하기)
          
  ■순례일시:  2016. 1. 24.(일) 09:00 절두산출발 ~

  ■순례자  :   - 이영주
                - 강길중
                - 박은자
                - 양재권             
                - 김기혁 (자료정리)
               



기도 순례


1. 답동성당

인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이전으로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인천 · 부평 · 강화 등지에서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박해 후에 살아남은 신자들은 각처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답동 본당 소속이 되었습니다. 답동 본당의 설립은 조선교구에서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예상하고 1888년부터 대지를 물색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대지 매입을 결정한 조선교구는 페낭 신학교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빌렘 신부에게 새 본당을 맡겼고, 빌렘 신부는 입국하자마자 제물포에 진출하여 본당을 설립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1889년 7월 1일이었습니다.

제물포 본당(현 답동 본당) 초대 주임이 된 빌렘 신부는 이듬해 3천여 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성당 건축을 계획하다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었고, 이어 부임한 르비엘 신부가 추가로 부지를 매입하여 1891년 임시 성당 겸 경리부를 건축했습니다. 1893년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마라발 신부는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에게 성당 설계도를 받아 기초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8월 수녀원이 완공되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부원이 설립되어 보육과 무료진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성당 건립 공사는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어 1895년 8월 정초식, 1897년 7월 4일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당시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췄는데, 1937년 확장 개축을 거쳐 1981년에는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마라발 신부는 성당 건립 외에도 1900년 9월 ‘박문소학교’(현 박문 초등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58년 10월 인천과 부천, 그리고 인근 도서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인천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고, 그 사목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면서부터 답동 본당에 큰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1961년 6월 ‘인천 대목구’로 승격되고 맥노튼(나길모)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본당이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습니다. 2001년 9월 박문 초등학교를 연수구로 이전하고 이를 리모델링하여 2002년 1월 새 교구청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09년 본당 설립 120주년을 앞두고 성당 성역화 작업을 전개하여 성당 마당을 공원화하고, 정부 지원을 받아 성당 보수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2010년 8월에는 인천시 중구와 함께 답동 성당 일대에 대한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을 통해 성지를 보존하고 지역주민들과 역사 ·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는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출처: 굿뉴스)



2. 제물진두 (순교지, 김대건부제출국지, 샬트르 첫수녀 착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제물진두는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오페르트의 무덤 도굴사건 그리고 서양 세력의 침공과 관련해 천주교 신자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척사 의식을 고양하려는 정부에 의해 인천 지역 최대 순교지가 되었습니다. 1868년 4월,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의 이모인 김씨와 남편 손 넙적이 베드로, 사위 백치문 사도 요한, 이 마리아의 손자 등 4명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1871년 5월에는 이승훈의 증손자 이연구와 이균구 형제, 이승훈의 손자 이재겸의 부인 정씨와 그의 손자 이명현, 신자로 추정되는 백용석과 김아지도 체포되어 이곳에서 함께 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성 김대건 신부가 부제품을 받고 입국하여 1년 여간 조선교회의 사정을 둘러본 후, 1845년 4월 사제품을 받기 위해 작은 목선을 타고 중국 상해로 떠났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1888년 7월 22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4명의 수녀가 이곳 제물포항을 통해 순교자의 땅인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곳입니다.

-인천교구는 제물진두 위치 규명에 이어 2011년 차이나타운 입구 한중문화관 옆 부지를 매입해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성역화를 추진해 2014년 5월 제물진두 순교기념 경당 축복미사를 봉헌했습니다. 15m 높이의 경당 외관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 모양이자 하느님께서 순교자들을 감싸는 두 손 모양을 형상화했습니다.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은 1885년 4월 5일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제물포 나루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입니다. 바로 기념탑 주변이 나루터이며 순교터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출처: 굿뉴스, 순교의 맥을 찾아서 )


3. 해안성당

해안성당의 옛 이름은 ‘선린화교성당’으로 북성동 3가 10번지 개신교회 옆 낡은 주택 이층 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일본조계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지계(선린동 일대 5,000평, 일정한 범위 안에 외국인 전용 거주 지역으로 그곳의 지방 행정권을 그들 외국인에게 위임한 지역)가 형성되었습니다. 1958년 당시 답동성당에 다니던 중국 신자들은 언어소통의 불편함과 민족 이질감을 느껴 화교성당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인천시 중구 북성동 3가 10번지 소재 개신교회 옆 이층 방에서 중국 신자들의 전례 모임이 시작되었고, 1960년 7월 17일 답동성당과 화수동성당에서 분가하여 ‘선린화교성당’이 설립되었습니다. 북성동에 소재했지만 화교들이 모여 살았던 선린동의 이름을 따라 ‘선린화교성당’이라 하였고 교적도 한문과 라틴어 두권으로 기록하였습니다.

현재 성당은 1962년 12월 31일 인천시 중구 선린동 26-1번지 소재 건물을 구입하여 1966년 6월 9일 완공한 것이며 종탑과 성당 건물 모두 완공 당시 그대로입니다. 이후 1972년 11월 12일 ‘해안성당’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출처: 굿뉴스)


4. 반주골

반주골에는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자 창립 선조의 한 명인 이승훈 베드로의 묘와 장남 이택규와 3남 이신규 마티아 순교자의 묘가 있습니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의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대의 석학들과 함께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 말 동지사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습니다.

영세 후 교리서와 성물 등을 갖고 귀국해 강학회 동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명례방 집회를 갖고 가성직제도를 주도하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과 조상 제사 문제, 부모의 적극적인 반대 등으로 잠시 교회를 떠나기도 했으나 다시 돌아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습니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반주골에 안장되었던 이승훈의 유해는 천진암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되어 정약종, 권철신 · 일신 형제, 이벽 옆에 나란히 모셔졌습니다. 이승훈 묘는 2011년 12월 인천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인천교구는 2014년 1월에는 묘역 일대를 역사문화기념관과 순례길 등을 갖춘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출처: 굿뉴스)


5. 김포성당

김포 지역의 전교 역사는 1900년경 시작되어 1910년 김포읍 걸포리에 행주 본당 걸포리 공소가 설립되었습니다. 1946년 11월 행주 본당에서 분리되어 걸포리 본당으로 승격된 후 발전 가능성이 큰 김포읍에 부지를 마련해 성당 건립에 들어갔으나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6년 12월 신인식 신부와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석조 성당을 완공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본당명은 1949년에 걸포리에서 김포로 변경되었습니다.

1961년 인천대목구의 설립으로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사목을 담당하여 활발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후 교구 사제들의 노력으로 신자 수가 증가하자 본당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1999년 석조 성당 아래 새 성당을 건립하였습니다. 이로써 신구 성당이 공존하며 과거와 현재를 통시에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6년 60주년을 기념해 교육관을 신축하고 옛 석조 성당을 대대적으로 수선하여 피정 공간으로 꾸미고 야외동산에는 십자가의 길도 새로 조성했습니다. 2013년에는 김포 지역 천주교의 모태로서 한국전쟁 이후 건축된 석조 성당을 대표하는 건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출처: 굿뉴스)


6. 부천 함박이, 싯골 , 댓골,

천주교회사 사료인《치명일기>에 보면 인천현(仁川縣)내의 함박리(咸朴里)는 순교자 심원경(스테파노) • 심봉학(심원경의 아들) • 박도섭 • 박사앙(박도섭의 아들)이 태어나 살았던 곳이고, 인접 마음 싯골[食谷]은 순교자 조학경 도사(都事)가 낙향하여 살다가 관헌에 잡혀 간 곳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1991년에 간행된 「소사 본당 반세기」(素砂本堂半世紀)에는 순교자 후손이었던 심낙천(沈樂天)이 서울에서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선영(先塋)이 있는 함박이로 숨어 들어와 살다 잡힌 은거처가 함박리라고 기록되이 있다.

함박리는 현재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옥길동 내에 있디. 함박리는 샛말과 건너말, 계일 등 3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다. 옹기말은 건너말 산 발치에 있었다. 함박리 건너말 동산 너머 바로 아래에 위치한 싯골은 Ikm 내의 두길과 숯두루지 자연부락과 맞닿아 있는데, 싯골은 광명시 옥길동에 속한다. 현재 함박리와 싯골이 속해 있는 옥길동은 인천교구 역곡 본당 관할 지역이다. 박해 때에는 인천현의 외곽 지역이었고, 인천과 수원을 통하는 길목인 댓골과 이웃하는 지역이었지만 매우 외진 자연부락이었다. 함박리는 박해가 끝난지 100년 뒤에 발발한 6.25 한국전쟁 때에도 공산군이 들어오지도 않았을 정도로 오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천혜의 조건은 말씀의 씨앗이 자라는 데 가장 좋은 지역이 된다. 인천 지역에 언제부터 천주교가 전래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인천 동부 외곽지는 서울과 안양, 수원을 잇는 지역으로 인천 지역 전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에 함박리 주위에는 민극가 성인이 전교를 하였으리라고 추정되는 1830년대에 신자들이 있었다고 보여지며. 차츰 교우들이 생겨나 비교적 박해가 뜸했던 철종(哲宗) 시대 중반인 1855년쯤에는 여러 마을에 교우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심원경과 그의 아들 봉학이 이곳에서 살다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는 양지 사기막골로 떠났다고 전해진다.
병오박해(1846) 당시 서울 종각 부근에 살던 청송 심씨 인수부원공파 심락천씨의 아버지가 천주교 신자라하여 포졸에게 잡혀 치명을 당하게 되자 아버지를 잃은 심락천씨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선향인 당시 인천 지역에 속해 있던 함박리로 내려왔다. 또 서울에서 관직에 있던 조학경 도사(都事)가 신앙을 위해 싯골로 이주하였다. 이로써 1866년 함박리에는 교회 사료에 드러나 있는 박도섭 • 박사앙 • 심낙천이 살았고, 싯골에는 조학경 도사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함박리에서는 심낙천이 잡혀가 순교(장소 미상)하였고. 싯골에서는 조학경이 경포(京捕)에게 잡혀 서울로 끌려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며, 박도섭은 인천읍으로 잡혀 간 후 수원으로 이수(移囚)되어 매맞아 순교하였고. 그의 아들 박사앙은 도망쳐 숨어 살다가 1867년에 붙잡혔으나 풀려났었는데 1870년 10월에 다시 경포에게 불잡혀 서울 옥에서 순교하였다.
이처럼 함박리는 순교자 심원경 • 심봉학 • 박도섭 • 박사앙의 탄생지요 성장지였고 신자가 되이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였던 곳이며, 순교자 심낙천에게는 신앙생활의 온거처이기도 하였다. 또 싯골은 조학경에게 신덕울 쌓는 수계지요 은거지였다. 이와 같이 함박리와 싯골은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떨어 져 새싹이 움튼 묘 터 였을 뿐만 아니라 인천 지역의 신앙의 요람이 된 곳이다. (출처: 순교의 맥을찾아서 )
 [샛말] 경기 부천시 소사구 옥길로 63-16 ( 옥길동 640-2)
 [건너말]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함박로22번길 37 (옥길동 621-1)
 [식골] 경기 광명시 옥길동 3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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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답동성당

답동성당은 인천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1889년 설립된 인천지역 최초의 본당이다.
 
 인천직할시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답동본당은 1889년에 설립되어 1961년 7월 인천교구가 서울 대교구로부터 분리 설정됨으로써 메리놀회 소속인 맥노튼(羅吉模) 주교가 인천 교구장으로 부임, 1962년 교계제도(敎階制度)의 설정과 함께 대목구에서 주교구로 승격되어 주교좌 본당이 되었다. 조선교구가 설정된 후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는 인천에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한국인 59명, 일본인 25명의 신자를 확보하여 출범하였다.
1889년 답동본당이 설립되자 빌렘(J. Wilhelm) 신부가 부임하여 지금 본당 자리에 부지 3,212평을 마련하여 성당을 건립하기 위한 정초식을 가졌고, 1891년에는 2대 르비엘(Levile, 申) 신부가 부임하여 1893년에 임시 성당을 건립한 뒤, 3대 마라발(Maraval, 徐) 신부가 부임하여 건평 396평의 본격적인 고딕식 성당을 1899년에 완공하였다. 답동본당은 1955년 송림본당이 분리되어 가기 전까지 인천 시내의 유일한 본당이었으며 신자가 늘어감에 따라 1966년에는 도화동본당이, 그리고 또 해안본당 등이 분리 설립되었다.

   답동본당의 현재 관할구역은 답동을 비롯하여 신포동, 사동, 신생동, 신흥동 1 · 2가, 경동, 내동, 용동, 유동, 율목동, 관동 3가, 송학동 3가, 인현동, 중앙동 4가 그리고 옹진군 영흥도와 선재도이고 공소는 2개소이다.

4대 주임 홍병철(洪秉喆, 루가) 신부는 1900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의 본당신부로 답동본당에 부임하였다. 그는 모든 일을 신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할 줄 아는 정신을 심어주기에 노력하였다. 전교에는 많은 힘을 기울여, 781명의 신자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5대는 드뇌(E. Deneux, 金學俊) 신부였다. 1904년 취임한 드뇌 신부는 인자하기로 유명했던 분이며 프랑스의 부유한 은행가의 둘째 아들이었다.
한국에 파견된 그는 고아들을 위해 해성보육원 건물을 확장하고, 바오로 수녀원 신축에 힘을 기울였다. 이미 그는 1900년에 인천 사립 박문소학교(博文小學校 - 현 가톨릭회관 자리)를 설립하여 신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에게 초급과정의 교육을 베풀도록 하였다. 1933년 드뇌 신부는 증가일로의 신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본당의 개축공사에 착수하였는데 이 공사는 19세기말에 건축된 구 성당을 그대로 세워둔 채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어려운 공사였다. 그러나 착공 4년 2개월 만인 1937년 6월 30일에 연건평 307.2평의 위용을 갖춘 성당을 준공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바오로 대성당이다.
그는 3층 현대식 병원도 세워 해성병원의 기초를 다졌다. 부임한 이래 본당 건립을 비롯하여 수녀원, 고아원, 병원, 학교 그리고 유치원 등을 세우는데 아낌없이 사재(私財)를 털어 답동본당의 확고한 기반을 만들고, 1947년 2월 9일 74세로 선종하였다.
   6대 주임신부는 한국인 임종국(林鍾國, 바오로) 신부였다. 그동안 외국인 신부들만 모셨던 본당 신자들은 그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수녀원에서는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한국인 신부가 왔기 때문에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본당 운영에 각별히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임신부는 제일 먼저 현재의 사목회와 같은 체제를 갖추어 평신도들로 하여금 참여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신자들은 스스로 본당운영에 적극 앞장서게 되었다. 1945년 임신부는 당시 부평에 있는 소화(昭和) 고등여학교를 인수받아 인천 박문중학교로 개편하고, 여자 중 · 고등학교도 병설하였다. 1947년에 임신부는 지금과 같은 사목회의 체제를 갖추기 위해 몇 사람의 평신도를 주축으로 신자 스스로가 본당 일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갔다.
(출처: 가톨릭대사전)


▶19세기말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본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1884∼90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개항지에서의 토지 매입과 성전 건축이 가능해지자 블랑 주교는 국제도시로 부상하고 있던 제물포에 코스트 신부(1842∼1896년)를 파견해 성당 건립을 서두르게 된다.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홍 요셉 1860∼1938년)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가 1889년 7월 1일이다. 빌렘 신부는 일주일 후 임시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84명(한국인 59명과 일본인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적인 첫 미사를 봉헌했다.

답동성전의 건립은 빌렘 신부가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함으로써 첫 발을 내딛게 된다. 1890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된 빌렘 신부에 이어 르 비엘 신부(신바오로 1890~1893)가 2대 신부로 부임해 성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를 요청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병으로 인해 휴양을 떠나면서 성전 건립은 1893년에 부임한 마라발(서요셉 1893∼1904년) 신부의 몫으로 넘어갔다.

마라발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축성식이 거행됐다.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었다.
1933년 신자수가 1500여명에 육박하게 되자 제 4대 드뇌(전 으제니오1904∼1937년) 신부는 증축계획을 세우고 1935년부터 성전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작업을 시작하여 2년 후인 1937년 원 라리보(1933∼1940년 재임) 주교 주례로 성대한 축성식을 가졌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출처: 답동성당 홈페이지)

 
▶성 바오로(67년경)는 벤야민 지파의 유다인으로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유명한 랍비 가믈리엘의 문하생으로 예루살렘에서 공부했던 분이다.
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사울이라 불렀고, 천막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엄격한 바리사이파였으며 크리스찬의 열렬한 박해자였고, 첫 순교자이신 성 스테파노의 순교 현장에도 있었다. 그는 크리스찬들을 박멸할 목적으로 다마스커스로 가던 도중에 유명한 환시를 보는데(34-36년 사이), 이것이 그의 극적인 개종과 더불어 이방인의 사도로 만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그는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지낸 다음, 설교하기 위하여 다마스커스로 돌아오면서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선교사 생활이 막을올린다. 그는 39년경에 바르나바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만나고 공식적으로 크리스찬 공동체에 입적한 후, 43년경에 안티오키아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교회의 교사가 되는데, 이것이 이방인을 상대로 하는 그의 대 전교활동의 서막을 올린 결과가 되었다.
그 이후로 바오로는 세 차례의 전교 여행을 한다. 그들은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하여 키프로스 섬에 머물렀고 그다음 지금의 터어키를 통과했다. 사도들의 예루살렘회의 후에 바오로 사도는 제2차 여행을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명백하게 '12 사도들의 파견'이라고 표현한다(사도 15,36-18,22). 터어키를 다시 횡단하여 프리기아와 그가 아팠던 갈라디아(갈라 4,13)에서 복음을 전한다. 그 다음 루가와 함께 유럽으로 들어와서 필립비 공동체를 세운다(희랍 남부). 한 동안 감옥 생활을 한 후 희랍에서 복음을 전한다. 아테네에서의 복음 전파는 철학자들 앞에서 좌절된다. 고린토에 가서 공동체를 세우는데 그 교회는 바오로 사도를 매우 성가시게 하였다. 그후 안티오키아에 되돌아 왔다. 제3차 여행 동안 바오로 사도는(사도 18,23- 21,17) 현재 터어키 지역에 속하는 교회, 특히 에페소 교회, 그 후 희랍에 속하는 교회와 고린토 교회를 두루 다녔다. 밀레도스를 지나면서 바오로 사도는 장로들에게 자기가 당한 고난을 말해준다. 이 말 그대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얼마 안되어 그는 히브리인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사도 21장).
그는 로마 시민이므로 로마에 항소하였다. 이렇게 로마를 향하여 4번째 여행이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자유의 몸이 아니다(사도21-26장). 60년 아니면 61년에 도착하여 63년경까지 감옥에 갇혔다. 한편 좀 자유스런 몸이 되면서 로마의 그리스도 신자들과 자주 만나면서 '옥중 서간'을 쓴다. 63년경 감옥에서 해방되어 아마도 스페인을 향하여 마지막 여행을 했는지도 모른다(로마 15,24-28). 아니면 다가올 자기 운명을 편지로 써서 알려준 디모테오와 디도의 공동체를 향하여 갔을지도 모른다.
로마의 클레멘스(Clemens)에 따르면 그 후 그는 에페수스,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지를 재차 방문했고(63-67년), 트로아스에서 또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가서 사도 베드로와 같은 날에 처형되었다(에우세비우스의 견해). 테르툴리아노에 의하면 그는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참수치명 하였다.
바오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저술가로 꼽힌다. 로마서(코린토스에서 57-58년); 코린토 1서(에페수스에서 54년); 코린토 2서(필립비에서 57년); 갈라티아서(에페수스에서 54년); 콜로새서, 필리피서, 에페소서, 필레몬서(로마에서 61-63년); 테살로니카1, 2서(코린토스에서 51-52년) 및 사목서간인 티모테오서와 티토서를 보냈다. 히브리서는 아마도 다른 저자인 듯하다. 공식 축일은 6월 29일이고, 개종 축일은 1월 25일에 지낸다.


 

   
  
1897년 7월 4일 뮈텔 주교 축성



1937년 원 라리보 주교 축성  (규모 약23x50 높이33)


[인천교구 100년사 중에서 발췌]

▶인천의 첫번째 본당, 제물포 본당(현 답동 본당) 설립

인천교구에는 현재 105개의 본당이 있다. 1889년 인천의 첫번째 본당인 답동본당 설립을 시작으로 1952년 부평2동(당시 부평본당), 1955년 송림동본당이 세번째로 생겨났다.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천지역의 유일한 본당으로 있었던 답동본당은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을 하는 곳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위로해 주고 고아들과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신앙으로 묶어 주었다. 이는 답동성당이 생기면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인천 초대 분원이 설립되었고 이후 해성보육원, 박문학교, 유치원 등 지역에서 꼭 필요했던 여러 기관이 설립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889년 7월 1일 설립된 답동본당에는 빌렘(한국이름 홍석구 요셉)신부가 제1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890년 9월 2일에 쓰여진 첫 보고서에는 1889년 7월 8일에 본당에서 최초로 미사를 집전하였는데 당시 신자수는 일본인 교우들을 포함하여 80명가량이었고 조촐한 방에 성체를 모실만한 장소가 없는 실정이었다고 한다. 신자들 대부분은 노동이나 소규모의 장사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신심이 깊어 빠른 속도로 신자수가 증가하였다.
1890년 빌렘신부는 병인박해를 피해 고잔지역에 정착한 민종황(요한) 일가로부터 현재 답동본당이 자리한 언덕에 부지를 마련하였다.
2년 남짓한 재임기간 동안 본당의 기반을 닦아놓은 빌렘 신부가 이임하자 같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르비엘(한국이름 신삼덕 바오로)신부가 2대 본당신부로 파견되었다. 르비엘 신부는 1891년 7월 31일 본당 경리부 건물을 짓고, 반은 경당을 만들어 제단에서 장궤틀까지 모든 제구를 손수 만들어 갖추고 감실에는 성체를 모셨다. 르비엘 신부는 특히 자선행위를 통해 교세를 확장하고 교우들 뿐 아니라 외교인들까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을 찾아 오도록 하였으며 조선관리로부터 시외의 외딴집에서 병자를 간호할 허가를 얻어 공장노동자, 짐꾼 등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 이들을 돌보는데 열심이었다.
그 후임으로 부임한 3대 마라발 신부는 초대때부터 지어온 수녀원을 완공하고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성당을 완공하여 1896년 11월 4일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이렇게 신부와 신자들의 노력으로 성당은 날로 발전하였고 1902년에는 영종도 공소를 신설하기도 하였다.
전 으제니오 신부 재임시절인 1933년에는 신자수가 1천 5백명으로 증가하였다. 4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없는 성당은 개축 공사에 착수했다. 마라발 신부가 지은 성당을 그대로 둔 채 외곽벽을 쌓아 올리는 어려운 공사였다. 이 공사는 4년 2개월만인 1937년 6월 30일 연건평 307.2평위에 성당이 완공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답동본당의 모습이다. 전 으제니오 신부는 재임 기간 동안 수녀원, 고아원, 병원, 학교, 유치원 등을 건립하였을 뿐 아니라 사재를 내놓아 확고한 기반을 마련해 놓고 1947년 2월 9일 74세를 일기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전 신부 후임으로 답동본당의 첫 한국인 사제인 임 바오로 신부가 취임하였다. 임 신부는 현재의 사목회와 같은 체제를 갖추어 평신도들의 참여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힘을 기울였고 신자들은 점차 본당일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하게 되었다.
1960년에 들어서자 인천교구는 날로 신자수가 증가하여, 1961년 인천감목대리구가 대목구로 승격되었고, 메리놀회 소속 맥노튼 주교(한국이름 나길모 굴리엘모)가 초대 주교로 부임하여 10월 26일에 본당에서 주교 착좌식이 성대하게 거행되기에 이르렀다.

▶ 인천 답동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첫 분원 설립

1893년 인천항에 장티푸스가 발병하여 많은 사람들이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서 마라발 신부(당시 답동 주임)는 본당 내 헛간을 마련하고 환자들을 거두어 보살피고, 대세도 주었다. 서 마라발 신부와 당시 인천에 부임해 있던 홍 요셉 신부는 함께 일할 수녀들이 있다면 보다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여 뮈텔주교에게 수녀원 설립의 필요성을 보고하였다.
당시 한국에 진출해 있던 유일한 수도회인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본부에서는 한국의 요청을 들어주어, 서 요셉 신부는 답동에 마련한 부지 중 한 부분에 수녀원 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8월 인천수녀원 공사가 완공되었고 8월 18일 2명의 수녀가 인천에 도착했다. 당시 상황이 위험하여 블란서 공사의 청원으로 영국군이 호위하여 수녀들은 오후 5시에 인천항에 도착, 수녀원으로 이동했다. 이것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 6년만에 첫 분원이 탄생한 일이었다.
제물포 수녀원이 시작되던 1894년 여름부터 병자들이 오기 시작했는데, 마리 클레망스 원장수녀는 베트남 통킹의 서양 군인 병원에서 여러해 동안 사도직을 수행한 일이 있어 병자 간호를 잘 하였다. 날마다 병자들이 십 여 명씩 와서 부스럼 종류의 병을 치료받았고, 약도 사갔다. 어떤 때는 수녀들이 가정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해주고 죽어가는 사람을 위로했다. 이렇게 인천에서 수녀들의 사도직 활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답동본당은 수녀원 건립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성당 건립을 시작했다. 1895년 8월 15일에 정초식을 거행하고, 1897년 7월에는 종탑을 완공하고, 10월 벽돌일도 마무리하여 1897년 7월 4일 뮈텔주교에 의해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종탑 위의 작지만 우아한 뾰족탑은 인천 시내 어느 곳에서나 바라 볼 수 있는 교회의 상징물이었다.


▶ 병인박해 순교자 처형지 ‘제물진두’
인천의 순교터로는 강화 갑곶진두와 진무영을 꼽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병인박해 중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갑곶진두), 최인서, 장치선, 박서방, 조서방(진무영) 등이 참수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인천에는 이보다 더 많은 순교자가 처형된, 잘 알려지지 않은 또다른 순교터인 ‘제물진두’가 있다.
문서상으로도 병인박해 때 제물진두에서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고 쓰여 있으나 정확한 위치가 고증되지 않았다.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 김진용(마티아)는 제물진두 순교자에 대한 관변측 사료와 교회측 사료, 박순집 증언록, 제물진두의 위치가 명시된 인천부 고지도 및 현 위치도 등 많은 문서와 증언을 연구하여 2005년 4월 제물진두의 위치가 인천 중구 항동 1가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부근임을 발표하였다. 다음은 그의 연구 결과 중 일부 내용이다.
『병인박해 중에 처형된 천주교 신자 9명의 처형지인 제물진두는 제물포항(제물진:제물포 나루터)의 출입구 부근이며, 제물포항의 출입구는, 1957년 이래 중구 항동 1가에서 거주하고 있으면서 인천항이 연안부두로 옮겨갈 때까지 직접 목격해 온 유광준씨의 증언과, 중구에서 발행한 ‘인천 중구의 옛 풍물 책 92쪽’에 있는 제물포항 화면에 나타난 출입구 부두 화면 등으로 볼 때, 순교지 제물진두의 위치는 현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남서방향 약 50m 지점이라고 확신한다.』
병인박해 때 제물진두에서 처형된 순교자는 다음과 같다. 1868년 4월 20일, 손 베드로 넓적이(박순집의 이모부), 김씨(손 베드로의 부인, 박순집의 이모), 백치문(사도 요한, 손베드로의 사위)은 포졸에게 잡혀 도끼로 순교하였다. 1871년 5월 6일에는 이승훈의 증손자인 이연구(兄), 이균구(弟)가 순교했다. 이들은 장차 미함(美艦)으로 들어가 미함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죄목으로 효수경중(梟首警衆, 목을 잘라 매달아 대중에게 경각심을 줌) 되었다. 1871년 5월 18일에는 정씨(이승훈의 손부이며, 이신규의 자부이자 이재겸의 부인), 이명현(정씨의 손자), 백용석, 김아지(김애기) 또한 사학죄인으로 이곳에서 효수경중 되었다. 이와 같이 제물포 제물진두(祭物津頭)에서는 천주교 신자 9명이 처형되었다.
참고자료:(1)인천교구 30년사, (2)‘병인박해 중 천주교 신자 처형지 제물포 제물진두 위치 소고’(김진용 마티아)

▶비밀리에 신앙을 꽃피운 대골 공소
윤선기(윤용배의 아들)가 18세 되던 해, 고향이 그리워 부인과 함께 고향 대골로 내려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윤선기는 자기가 왜 천주학쟁이의 후손이 되었으며 아버지는 왜 포졸에게 잡혀가 죽음을 당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게된 윤선기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신자가 될 것을 굳게 마음먹었다. 그때 이미 대골에는 박해를 피해 한 교우집(시흥시 대야동 326번지)에 비밀리에 공소를 설치, 정춘화라는 교우가 회장이 되어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정춘화는 원래 충청도 서산에 살던 사람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 가족들이 모두 천주교신자라고 하여 순교했다. 15살 되던 해 대골로 와 생활터전을 마련한 정춘화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천주교리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라고 마음먹고 비밀리에 교우집에 공소를 설치하고 교리를 가르쳤다. 얼마 전까지의 박해로 인해 천주교리를 전파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꿋꿋이 동네사람들에게 교리를 전파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때 윤선기도 정춘화에게 감화되어 그길로 부인과 함께 공소로 찾아가 교리를 배웠다. 교리를 배운지 약 2년여, 윤선기는 방지거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받음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정춘화의 나이 31살, 그는 15년여 동안 봉사해오던 공소회장직을 고향 사람인 윤선기에게 물려주었다.
대골공소 2대 회장이 된 윤선기는 그때 나이 20세로 천주교 신자가 된지 2년여 밖에 안되었지만 그는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다. 윤선기가 회장이 된 후 있었던 많은 사건 중 1886년 한·불 수호조약은 어둠속에 쌓였던 조선땅에 신앙의 빛이 살아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상복을 입거나 밤에만 몰래 활동하던 신자들과 신부들은 대낮에도 당당하게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후 윤선기는 서울 약현동(지금의 중림동)에 천주교 교리소가 설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그곳까지 찾아가 정확하고 올바른 교리지식을 배워 대골 공소 신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1889년 인천 답동성당(당시에는 제물포 성당)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 대골 공소에 일 년에 한 번 만이라도 신부님이 오셨으면 좋겠다고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 1904년 답동 성당 제5대 주임 전학준 으제니오 신부가 처음으로 대골공소에 머무르며 공소예절을 주례했다. 난생 처음 신부를 맞이한 대골 공소 신자들과 마을에는 일대 경사가 났었다고 한다.
이렇게 찾아온 신앙의 자유와 함께 윤선기 회장의 희생 봉사정신에 감화되어 대골 마을엔 하나 둘 전통적 유교의 가치관을 깨고 천주교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1908년 공소신자가 무려 90명에 이르러, 1908년 인근 동네 새말공소로(현 시흥시 신천동), 1938년 소사공소로 살림을 내 주었다.
이렇게 대골공소는 박해시대 때부터 일찍 시작되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렸으나 교회사 기록에는 이보다 훨씬 늦은 190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
(참고자료:답동 100년사)


2. 제물진두 순교터

인천교구 : 인천 제물진두
병인박해 때 박순집의 외가 집안과 이승훈의 후손들이 치명한 순교터

문서상으로도 병인박해 때 제물진두에서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고 쓰여 있으나 정확한 위치가 고증되지 않았다.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고 김진용(마티아) 씨는 제물진두 연구에서 제물진두는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파라다이스 호텔이 위치한 언덕에서 자유공원 방향으로, 인천교구 해안동 성당 뒤편 벼랑 아래에 이르는 장소’라고 추정하고 있다.
인천교구에는 교구내 다른 순교지보다 더 많은 순교자가 처형되었으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순교터인 제물진두가 있다. 이곳은 병인박해 때 프랑스와의 병인양요, 미국과의 신미양요 등을 치른 후, “외적과 내통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여 주민들에게 경계심을 심어 준다.”는 의도에서 대원군 정권이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두(楊花津頭, 절두산)와 함께 천주교인들에 대한 공개 처형장으로 택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진두(津頭)는 곧 나루터로서 외국 선박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군중들의 왕래가 잦은 이곳에서 공개적인 처형을 함으로써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과 함께 천주교 금단(禁斷)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박순집 베드로의 외가쪽 집안과 이승훈 베드로의 후손들이 치명한 순교터다.

1868년 4월 15일에는 부평읍내에 살던 손 베드로 넓적이(박순집의 이모부, 1801~1868, 베드로), 김씨(손 베드로의 부인, 박순집의 이모, 1811~1868), 백치문(손 베드로의 사위, 1827~1868, 사도 요한)은 포졸에게 잡혀 서울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고 인천 제물포로 압송되어 제물진두에서 4월 20일 참수형을 받아 각각 68세, 58세, 4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인천 지역에서의 박해는 다시 신미양요(1871년)를 전후하여 세차게 일어났다. 1871년 5월 17일경에는 남양에 살던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의 증손자이며 이재의(李在誼, 1808~1868, 토마스)의 두 아들 이연구(李蓮龜, ?~1871), 이균구(李筠龜, 일명 筠鶴, ?~1871)가 인천 바닷가에서 미군 함정을 살피다가 체포되어 미군 배에 들어가 길 안내를 하려고 하였다는 죄목으로 효수경중(梟首警衆, 목을 잘라 매달아 대중에게 경각심을 줌)을 받아 순교하였다.
1871년 5월 21일에는 인천에 살던 이재겸(李在謙, 이승훈의 손자, 이신규의 아들)의 부인 정씨(이승훈의 손부이며, 이신규의 자부이자 이재겸의 부인), 이명현(정씨의 손자), 백용석, 김아지(김애기) 또한 사학죄인으로 이곳에서 효수경중 되었다.
이와 같이 인천 제물진두에서는 기록상 나타난 것만 해도 천주교 신자 9명이 처형된 것으로 나온다.
이곳 주변에 있는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은 1885년 4월 5일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아펜젤러: 펜실베이니아주(州) 손더튼 출생. 1882년 펜실베이니아주 랭카스터의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거쳐 뉴저지주 매디슨의 드류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1884년(고종 21) 미국감리교 선교회에서 한국 선교사 임명을 받고 갓 결혼한 아내 D.엘라와 함께 1885년 초 한국에 와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다. 1887년 한국 성경번역부가 생기자 H.G.언더우드, J.S.게일 등과 함께 성경 국역사업에 참여,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I ·II)의 번역을 마쳤다. 그는 암기 위주인 한국의 교육방식을 이해중심적인 교육방식으로 고치는 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1902년(광무 6) 목포(木浦)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충돌사고로 익사하였다. 마포구 양화진외인묘지에 묻혔다.[출처]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 두산백과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 언더우드: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런던 출생. 1881년 뉴욕대학교를, 1884년 뉴브런즈윅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885년 H.G.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다. 1887년 벽지전도부터 시작하고,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으며,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하였다.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 그 회장 등을 역임하며 성서의 번역사업을 주관하는 한편, 1890년에 《한영사전》 《영한사전》을 출판하고,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으며, 1915년에는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1916년 신병으로 귀국, 애틀랜틱시티에서 죽었다. 한국 개화기에 종교·정치·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출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 두산백과
가 제물포 나루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바로 기념탑 주변이 나루터이며 순교터라고 추정할 수 있다.

■  제물진두 순교터에 대한 수정 연구
-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 김진용씨 논문 -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 9명이 처형된 제물포 제물진두(祭物津頭) 순교터는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파라다이스호텔이 위치한 언덕에서 자유공원 방향으로, 인천교구 해안동성당 뒤편 벼랑 아래에 이르는 장소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인천교구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 김진용(마티아, 82, 사진)씨는 최근 양업교회사연구소를 통해 발표한 '병인박해 중 천주교 신자 순교성지 제물포 제물진두 위치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이 같이 밝혔다.
김씨는 "「인천개항 120년사」 저자인 향토사학자 나채훈 교수의 소견과 「인천부사」(仁川府史, 1883~1933)에 기록된 해안 매립사업(1899~1931) 등을 고려해 볼 때, 순교터인 옛 제물포 나루터는 파라다이스호텔 부지 언덕 일대로 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로써 강화 갑곶진두 및 진무영과 더불어 인천교구 내 중요한 순교터인 제물진두의 보다 정확한 위치를 규명하게 되었다. 인천교구는 교구설정 50주년(2011년)을 맞아 제물진두 순교터를 순례지로 개발할 계획을 갖고 있다.
김씨는 제물진두 위치가 명시된 인천부 고지도와 순교자들 행적을 기록한 '박순집 증언록' 등 각종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2005년 4월 제물진두 위치가 인천 중구 항동1가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남서쪽 50m 지점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지속적 연구를 통해 일제 강점기 인천항 축항사업 이전, 즉 병인박해 당시 순교지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해안선에서 육지 쪽으로 좀 더 들어온 지점이라고 이날 정정했다.[자료 : 평화신문 서영호 기자, amotu@pbc.co.kr, 2010. 05. 23 발행 1069호] 

■ 제물포(濟物浦)
인천 중구 지역에 있던 조선 시대의 포구(浦口)이다. 수도의 관문으로 조선 시대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 종4품)를 두었다. 한말 개항 당시에는 구미 열강(歐美列强) 및 일본 등의 함선이 여러 번 입항하여 조선 정부와의 개국 교섭이 행하여졌다. 1883년 1월 인천이 개항되면서 그때까지 인천의 일부로서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제물포는 급격히 인천항의 근거지로 부상하였다.
부산항이 주로 일본을 상대로 한 항구임에 대하여 제물포항은 구미 여러 나라를 상대로 하는 문호였으며, 1902년 12월 제1차 하와이 이민선(121명 출발)이 여기에서 조국 땅을 떠났고, 이듬해에는 러시아·일본군 간의 충돌 사고가 부두에서 발생하는 등 다사다난한 역사를 기록하며 1983년에 개항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 인천 자유공원의 내력
인천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인 ‘자유공원’이 있다. 1888년 인천 응봉산 일대에 조성된 이 공원은 처음 ‘각국 공원’으로 명명되었다가 ‘만국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일제 강점기인 1924년 이후에는 ‘서공원’으로, 1957년 인천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동상이 건립되면서 ‘자유공원’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명칭의 변화는 바로 만국 공원의 역사, 나아가 인천의 역사 그리고 한국의 근대사가 갖는 격변과 굴절을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이 공원은 1884년 체결된 ‘각국 조계 장정’에 의해 탄생했다. 러시아 측량 기사이자 건축가인 사바찐에 의해 설계된 만국 공원은 서울의 탑골 공원보다 9년이나 먼저 조성됐다. 각국 조계지에 있는 만큼 그 조성 목적은 조계지에 거주하는 외국인(일본인 포함)의 휴식 공간 확보였다. 만국 공원이 있는 각국 조계지는 ‘나라 속의 나라’였다. ‘장정’에 의해 조선인은 모두 철수되었고 조선인은 새로 건물을 지을 수도 없게 되었다. 외국인 건축물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출처: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 인천개항박물관

인천개항의 모습- 조계의 설치
개항 년표
1883 : 인천개항 / 일본조계설정/ 해관건립 / 일본제1은행 진출
1884 : 영국영사관 개설/ 청국조계 설정/ 청국영사관 설치/ 각국공동조계 설정
1888 : 각국공원(자유공원) 설치
1889 : 제물포성당(답동성당)설립
1897 : 답동성당 축성
1899 : 경인철도 개통 (인천~노량진)
1902 : 러시아영사관 설치/ 하와이 이민 인천항 출발
1903 : 최초군함 양무호 인천 입항/ 팔미도 소월미도 등대 점등
1905 : 인천측후소 건립/ 공화춘 건립 / 사이다 생산
1914 : 조계제도 철폐
1918 : 인천항 준공
1937 : 수인선 개통
1950 : 인천상륙작전
1957 : 맥아더장군 동상 건립
1969 : 경인고속도로 완공
1982 : 한미수교 100주년기념탑 건립

과 함께 외국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제물포항은 우리 나라 개화기에 서구의 문물이 들어온 중심항으로 일본을 선두로 청국,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외국 영사관이 설치되고 통상활동이 시작되면서 각국의 문화가 공존하는 국제도시로 변화했다.


상인들이 몰려오고 무역상이 자리 잡으면서 개항장에는 일본조계, 청국조계, 각국 공동조계와 같은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거주 할 수 있는 거류지가 생겨나면서 외국인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국적인 풍취를 느낄 수 있는 서구식 건물과 시설들이 조성되었다.
제물포항은 우리나라 개화기에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는 통로로서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본을 선두로 청국(중국),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국영사관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통상활동을 시작하였다. 더불어 상인과 무역상들이 몰려들면서 외국인이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제물포 지역을 거주지로 빌려준다는 조계계약을 열강들과 맺게 되었다.

조계제도란?
일정한 지역범위 안에 외국인전용 거주지역을 설정해, 그곳의 지방행정권을 외국인 에게 위임하는 제도를 말한다. 처음 일본조계로 설정된 지역은 제물포에 면한 현재의 자유공원 남쪽 관동 1·2가이며, 각국의 조계는 1910년 일본이 한국을 완전히 강점 함에 따라 그 존폐여부가 제기되었으며, 결국 일본은 1914년 4월 1일부로 각국공동 조계와 청국조계를 일괄 폐지하고 인천부관할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1883년 개항과 함께 시작된 조계제도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공화춘(共和春)은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에 위치하는 옛 중화요리 식당 건물이며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246호이다. 1912년에 개업한 공화춘은 대한민국에서 짜장면 짜장면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개발한 곳으로 알려진 공화춘. 1883년에 인천의 개항과 더불어 현재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일대에는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었다. 공화춘 건물은 청나라 조계지에 1908년 무렵 중국 산둥 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중정을 갖춘 지상 2층으로 건립되었다. 준공 당시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객잔으로 사용되었다.중화요리 식당 공화춘은 산둥 성 출신의 화교 우희광(于希光, 1886년 ~ 1949년)이 1912년에 개업하여 운영하다가 1983년에 폐업하였다. 공화춘의 전신은 현재 공화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우희광이 개업한 숙식업소 산동회관(山東會館)으로 1912년경에 중화민국의 수립을 기념하여 공화춘(공화국 원년의 봄)으로 개명하였다.
을 최초로 개발하여 판매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3. 반주골 : 이승훈 베드로 묘

인천교구 : 반주골 이승훈 베드로 묘
한국 천주교회의 선각자,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묘가 있는 곳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반주골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선각자,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과 그의 아들 신규(李身逵, 1794~1866, 마티아), 택규(李宅逵, 비신자)의 묘가 있는 곳이다. 오랫동안 교회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반대파들로부터는 천주교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 원흉으로 지목되어 어려움을 겪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참수되었다.
 일찍부터 이승훈은 외숙 이가환(李家煥, 1742~1801, 호 錦帶)의 영향을 받아 서학서들을 접하였으며, 그중에도 서양의 천문, 사상, 특히 수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783년 말에는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부친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북경에 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무렵 천주교 교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이벽(李檗, 1754~1785, 세자 요한)이 이승훈을 찾아왔고, 북경에 가게 되면 선교사들로부터 영세를 받고 서양 서적을 얻어오도록 부탁하였다.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한 이승훈은 즉시 북당(北堂)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만났으며, 특히 궁정의 수학자로 활동하였던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Grammont, 梁棟材, 1736~1812, 요셉) 신부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1784년 2월경 그는 세례명을 베드로로 정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그는 한국인 최초의 세례자가 되었다. 1874년 초 교리서적, 십자고상, 상본을 갖고 귀국, 이벽,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 巽庵)·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형제, 권일신(權日身, 1753~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崔昌顯, 1759~1801, 요한), 최인길(崔仁吉, 1765~1795, 마티아), 김종교(金宗敎, 1754~1801, 프란치스코)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하자 친척과 집안 식구들의 탄압으로 배교,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 제도를 주도,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등 성사를 집전했고, 1787년 겨울에는 정약용, 강이원(姜履元) 등과 함께 반촌(泮村, 현재의 혜화동)에서 교리를 연구하였다.

1791년 진산 사건으로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평택 현감 재직시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 반촌에서 서학서를 공부했던 사건[丁未泮會事件]이 문제되자 다시 배교, 관직을 삭탈당하고 석방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이듬해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1751~1801, 루카)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의 국청에서 배교했으나 4월 8일(음 2월 26일)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 홍낙민, 홍교만(洪敎萬, 1738~1801,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이승훈은 비록 여러 번 배교하고 교회를 떠났던 인물이지만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했고 가성직 제도를 주도했던 인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장을 연 인물로 평가된다.

■ 정미반회 사건(丁未泮會事件)
정미년(丁未年) 즉 1787년 10월경에 이승훈(李承薰), 정약용(丁若鏞) 등이 반촌(泮村)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걸 목격하고 성토한 사건을 말한다. 이 정미반회 사건을 발설한 사람은 이기경(李基慶)으로, 원래 그는 이승훈, 정약용과는 친밀한 사이로, 그들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대하며 보조를 같이했었다. 그러나 정미년부터 그들과 떨어져 오히려 그들을 반대하고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이기경은 정미년 겨울에 이승훈, 정약용 등이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石太) 집에 모여서 서학서를 보고 있는 걸 목격했었다고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洪樂安)에게 폭로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홍낙안은 이를 왕에게 알려 그들을 벌 주어야 한다고 극렬하게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서 직접적인 박해가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내려지지는 않았으나, 점차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라고 하는 상소문이 잇달아 장차 박해를 유발케 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 그라몽(Grammont)
그라몽(1736~1812)은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 1750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1768년 중국으로 파견되어 북경에 머무르면서 흠천감 중국 명·청대에 천문·역법·시각 측정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서로 우리나라의 *관상감에 해당한다.


(欽天監)에 종사, 수학자와 통역관으로 활약하였다. 1773년 예수회의 해산령이 중국에 선포된 2년 후에도 그는 계속 1785년까지 북경의 북당(北堂)에 머물렀다. 1784년 동지사를 따라 북경에 온 이승훈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줌으로써 교회 창설의 기반을 만들었다. 그 뒤 1785년 광동(廣東)으로 갔다가 1790년 북경으로 되돌아왔으나 병이 재발되어 1812년 북경의 북당에서 사망하였다.
[시대참조]

❙한말 주요년표

1875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남        
1876년 조선과 일본간에 조일수호조규가 체결 - 병자수호조약     
1880년 일본으로 수신사 파견       
1881년 일본으로 조사시찰단 파견, 별기군 설치      
1882년 조미수호조약 체결, 임오군란이 일어남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남 (청프전쟁)       
1885년 영국군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남, 갑오·을미 개혁, 청일 전쟁이 발발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남        
1896년 아관파천 ,연호를 건양으로 정함       
1897년 대한제국수립 고종 황제 등극 연호는 광무     
1900년 경인선 철도 개통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한국과 일본간에 한일의정서 체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1906년 통감부 설치        
1907년 국채보상운동,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순종황제가 즉위, 한국과 일본간에         한·일 신협약 체결, 군대 해산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강화도조약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조약.

공식 명칭은 조일수호조약이며,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이미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에 왕정복고를 통고하는 한편, 대마도주 무세[宗義達]를 외국사무국보(外國事務局輔)로 임명하여 조선에 대한 국교의 재개를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왔으나 조선은 서식과 직함이 다르다 하여 국서의 접수를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생겨난 사족(士族)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고, 또 구미 제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다른 나라의 문호를 개방시키려 했으며 조선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개화세력들에 의한 문호개방의식이 자라고 있었고 민씨정권으로서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국과의 분쟁을 피하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청국도 조선에 미국·프랑스와의 국교수립을 권고하고 일본의 대만정벌 소식을 접하고는 조선의 대일본정책의 전환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세에 편승한 일본은 부산항에서 함포시위를 벌여 조야에 충격을 준 후, 강화도에서 운요호사건을 유발함으로써 마침내 1876년 2월 27일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사이에 12개조로 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5조, 조선은 부산 이외의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용한다. 제7조, 조선은 일본의 해안측량을 허용한다. 제10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영·일조약(1858)을 모방한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일본에 부산·원산·인천의 3개 항구를 개방하고(제5조) 치외법권을 인정했으며(제10조), 일본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했다(통상장정).
또 제1조의 내용은 조선과 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일본이 조선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저의가 담긴 것이고, 제7조는 군사작전시의 상륙지점을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이후 일본의 적극적인 조선진출을 견제하려는 청국의 주선으로 미국과도 통상조약을 체결하고(1882),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세계자본주의 질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어갔다.

▶수신사: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정부가 일본에 파견 수신사: 1876년 2월 27일 체결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제2관에 의하면, 일본정부는 15개월 뒤 수시로 서울에 사절을 파견하여 교제사무를 상의할 수 있으며, 제11관에는 6개월 이내에 양국은 위원을 파견하여 통상장정과 수호조규 부록을 체결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사절을 파견했던 만큼 그 답례로서 조선도 사절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조선측 협상대표였던 신헌(申憲)도 일본의 개화문물을 시찰하고 외침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를 올려서 마침내 수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해 4월 예조참의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로 한 일행 76명은 4월말 일본에 도착하여 20여 일 동안 도쿄[東京]에 체류하면서 일본의 신식기관과 시설을 시찰하고 7월 하순 귀국했다. 김기수의 견문기인 〈일동기유 日東記遊〉·〈수신사일기〉를 보면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보고에서 "일본은 모두 부강에 힘쓰고 있으며 군대는 강장(强壯)하다"며 일본의 개화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수신사 일행이 귀국하자 일본은 곧 수호조규부록과 통상장정 체결을 위해 서둘러 미야모토[宮本小一]를 조선에 파견했고, 1879년에는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를 파견하여 부산에 이어 원산을 개항하게 했으나 인천개항, 부산의 관세배상, 미곡금수(米穀禁輸) 등 현안은 해결되지 못했다. 또한 청의 이홍장[李鴻章]은 그해 8월에 조선의 대외문제에 대해 일본의 침략을 경고하고 서양의 여러 나라와 입약 통상하여 이에 대처하라는 조언을 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일본정부의 진의와 개화정책을 알아보기 위해 제2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고 1880년 5월 예조참의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했다.


한 외교사절.
▶조선책략: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하기 위한 조선·일본·청 등 동양 3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서술한 책. 1책. 1880년경 일본 주재 청국공사관 참찬관(參贊官)인 황쭌셴[黃遵憲]이 지은 것으로, 원래의 제목은 〈사의조선책략 私擬朝鮮策略〉이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러시아를 방어 러시아방어책: 황쭌셴은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경계하고, 조선이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친중국(親中國)하고 결일본(結日本)하며 연미국(聯美國)하여 자체의 자강을 도모해야 러시아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다고 했다. 친중국의 이유는 중국이 물질이나 형세에서 러시아를 능가하고, 조선은 중국의 번속국(藩屬國)으로 1,000년이라는 세월을 지내왔기 때문에 금일에도 더욱 우호를 증대하여 러시아를 공동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이 중국 이외에 수호한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에 서로 결합해야 하며, 미국은 독립정신이 남아 있는 민주국가로서 약소국을 돕고 서양의 침략적인 악행을 막아주고 있으니 비록 조선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연합하면 화를 면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이나 일본도 선진국 세력에 적대하고서는 국가의 안위가 위태롭기 때문에 개국한 것이므로, 조선의 쇄국정책도 끝까지 고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대외세력의 방어에 자신이 없으면 개국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일본·미국과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곧바로 중국과 일본에 학생을 파견하여 병기제조·군대편성·외국어교육과 천문·화학 등 서구의 여러 학문을 습득하게 하는 한편, 부산 등지에 학교를 세워 서구의 기술을 교육하고 무기를 구입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친중국·결일본·연미국의 외교정책은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무사할 때에 공평한 조약을 맺게 해주며, 통상에도 이익을 가져다주고, 국가 부의 축적 및 군비강화에도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므로, 결국 조선이 자강하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했다. 1880년(고종 17)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金弘集)이 청국 공관을 왕래하면서 외교정책에 관해 황쭌셴과 의견을 교환하고, 귀국하는 길에 이 책을 얻어와 고종에게 바쳤다. 이에 대하여 조선정부에서는 찬반 논의가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특히 위정척사론을 기반으로 하는 유생들은 이듬해 영남유생 이만손(李晩孫) 등이 주동이 되어 〈영남만인소 嶺南萬人疏〉를 올려 김홍집 일파를 탄핵했다. 여기에서 이만손 등은 〈조선책략〉이 패륜망덕한 불온문서라고 단정하고 그 8대불가론(八大不可論)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책은 당시 외교정책에 대해 무지하던 조선정부의 외교정책에 큰 영향을 주어 1880년대 정부가 주도적으로 서구문물을 수용하는 개화정책을 활발하게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기 위한 조선의 외교정책에 대한 서술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

1882년(고종 19) 조선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수교와 통상에 관한 조약.

미국은 구미의 어느 나라 보다도 오래 전부터 조선과의 수교를 원하여 이에 대한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183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에 대한 관심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로 구체화되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포함외교(砲艦外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은 종래의 무력시위를 통한 방식 대신에 일본의 우호적 알선에 의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여,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을 찾기 위해 조선에 온 적이 있는 슈펠트 제독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일본의 중재가 걸림돌이 되어 조선과의 수교를 위한 슈펠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의 조선과의 수교는 청나라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의 거중조정 의사표명으로 활로를 찾게 되었다. 당시 청(淸)은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남진과 일본의 조선침략을 견제하는 '연미론'(聯美論)을 구상하고 있었다.
를 통해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항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미국의 포함외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880년 8월 톈진[天津]에서 이홍장과 회담을 가진 슈펠트는 곧 귀국 길에 올라 조미교섭에 관해 이홍장으로부터 알선의 확약을 받았다는 사실을 본국에 보고했다. 이에 미국 정부에서는 조미조약의 체결 1881년 7월 톈진에서 이홍장과 2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진 슈펠트는 그 내용을 미국 정부에 보고했고, 미국 정부에서는 11월 14일자로 조미조약 체결에 필요한 일반훈령과 이에 필요한 전권위임장, 미국 대통령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친서를 발송했다. 한편 이홍장은 조선 정부에 밀서를 보내 미국과의 조약체결의 긴요성을 역설했다. 조선 정부에서는 연미론에 호응하여 미국과의 수교에 어느 정도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으나,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청의 힘을 빌려 이를 추진하되 그 과정은 비밀에 붙여지게 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1882년 1월 영선사(領選使)로 파견된 김윤식(金允植)과 이홍장의 4차례에 걸친 비공식 예비회담과 3~4월의 이홍장과 슈펠트와의 회담을 통해 기안되었는데, 여기서 이홍장이 조선은 중국의 속방(屬邦)이라고 하는 조항을 명문화할 것을 주장하자 슈펠트 역시 조선이 내치와 외교에 자주권이 있다면 중국의 종주권(宗主權)과 관계 없이 미국은 조선을 대등하게 취급할 권리가 있다고 맞서 결국 별도 조회문(照會文)을 통해 속방 부분을 밝히기로 하는 선에서 타결을 보게 되었다.
을 교섭할 특별사명을 그에게 부여했다.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선 전권대신(全權大臣) 신헌(申櫶)·김홍집(金弘集)과 미국 전권 슈펠트 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조선과 미국과의 수교관계가 시작되었다. 조미조약은 비록 체결과정에서 당사자인 조선 정부가 일부 배제되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제3국으로부터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필수상조(必須相助)한다는 규정(제1조), 치외법권이 잠정적이라는 규정(제4조), 거류지는 조선의 불가분의 영토의 일부라는 규정(제6조), 양국간 문화학술교류에 대한 규정(제11조) 등 당시 중국이나 일본이 서유럽 제국과 맺은 조약에 비해 불평등이 어느 정도 배제된 주권국간의 쌍무적 협약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갖는다





❙임오군란

1882년 6월 5일 무위영 소속 구훈련도감 군병들이 선혜청 도봉소에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급료로 지급하려던 관리들을 구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하급군병과 서울 빈민층의 민씨정권에 대한 투쟁을 촉발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도봉소 사건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보고되자 그는 즉시 훈련도감 군병들 가운데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 등 4명을 주동자로 잡아들여 포도청에 가두었다. 이들이 사형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훈련도감 하급군병이 많이 살고 있던 왕십리 왕십리는 하급군병·빈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으로, 잡혀간 군병 4명 가운데 3명이 왕십리 거주자였다. 하급군병과 빈민들은 계층적으로 일치했는데 서울의 하급군병은 대부분 서울의 빈민층 가운데서 충당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빈민층과 마찬가지로 낮은 급료 때문에 대부분 적은 자본으로 수공업·상업을 하거나 도시근교에 야채를 재배해서 팔거나 막노동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서울의 빈민층은 도성 내의 빈촌이나 교외, 한강 연안 지역의 변두리 마을 등에 촌락을 형성하고 집단적으로 거주했는데 왕십리도 그런 곳 중의 하나였다.
 지역을 중심으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들 빈민은 민씨 정권 아래 각종 수탈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개항 이후 영세 수공업의 몰락, 미곡수출로 말미암은 곡가 앙등 등으로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더욱이 하급군병들은 5군영의 폐지로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남아 있는 군병들도 별기군별기군: 1881년(고종 18) 군사제도 개편에 따라 설치된 신식군대.별기대(別技隊)라고도 했으며, 일본인 교관에 의해 훈련된다고 하여 왜별기(倭別技)라고도 불렸다. 조선정부는 개항 이후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의정부 아래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는 등 관제의 개편을 단행했다. 군사제도에서도 종래 훈련도감·어영청·수어청·금위영·총융청의 5군영제를 무위영·장용영의 2영으로 개편했고, 별도로 무위영 소속하에 별기군을 창설했다. 선발과 조련에 관한 책임은 별도로 장령(將領)을 두어 맡기되, 문(文)·음(蔭)·무(武)를 구별하지 않고 선발하게 했다. 이에 군무사에서는 별군관(別軍官) 윤웅열(尹雄烈)을 중심으로 신체가 강건한 지원자 80여 명을 특별히 선발했다. 별기군의 총책임자인 교련소당상에 민영익, 정령관(正領官)에는 한성근(韓聖根), 좌부령관(左副領官)에 윤웅열, 우부령관에 김노완(金魯完), 참령관(參領官)에 우범선(禹範善)을 임명했다. 일본공사관 소속의 공병소위 호리모토[掘本禮造]를 초빙하여 신식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군제가 다시 5군영제로 돌아가자 폐지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민씨일파를 몰아내고 재집권한 대원군이 1개월 만인 1882년(고종 19년) 7월 청나라로 납치되어 3년간 강제로 연금당한 사건.
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에 불만을 품었으며 13개월이나 급료가 지불되지 않자 불만은 한층 고조되었다. 결국 군병들의 거주지인 빈민촌락에 통문이 돌려졌다. 통문의 내용은 무위영 소속 훈련도감 군병들은 6월 9일 아침 동별영에 집합하라는 것이었다. 통문에 호응하여 모인 군병들은 먼저 무위대장 이경하와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붙잡아간 사람들을 풀어달라는 등소(等疏)를 올렸다. 등소가 실패로 돌아가자 모인 군병들은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지르고 무력행사에 돌입했다. 동별영 창고를 열어 각종 무기를 꺼내 무장하고 무위영과 장어영의 다른 군병들을 소집했으며, 영세상인·수공업자 등도 군병에 가세했다. 이들은 포도청을 습격해 붙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고 의금부로 가서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별기군 교련장을 습격하고 경기감영과 일본공사관을 습격했다. 시간이 갈수록 하급군병·빈민 들이 가세해 대규모의 세력을 형성했다. 10일에는 흥인군 이최응의 집을 습격·살해하고, 민비를 공격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겸호·김보현 등을 살해하고 민비를 찾기 위해 사방을 수색했다.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원군은 곧바로 정상적인 급료 지급을 약속하고 별기군을 폐지했으며 5군영 체제를 복구시키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후 폭동은 가라앉았으나 군병들은 소규모 부대를 이루어 활동을 계속했다. 대원군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과 청국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즉시 군대를 파견했다.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온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는 주모자 처벌, 피해보상, 개항 및 통상의 확대, 병력주둔을 비롯한 8개 조항을 요구했다. 대원군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에 무력으로 대응할 방침을 세우고 마산포에 상륙중인 청국군에게 일본군을 견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서울에 들어온 청군은 대원군 정권과 일본측을 중재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 대원군납치사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일 양국은 앞을 다투어 군대를 파견하는 등 이를 세력확장의 기회로 삼았다. 공사관을 철수당한 일본은 거류민 보호를 내세워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에게 군함 4척, 육군 1개 대대를 주어 조선에 파견했다. 일본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한 청의 양무파정권 역시 당시 톈진[天津]에 있던 영선사 김윤식, 어윤중의 출병 요청을 받자 즉시 4척의 군함과 약 3,000명의 군대를 파병했다. 약 이틀간의 전투 끝에 군란을 진압한 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진출을 저지시키고자 대원군을 거세하고 민씨 정권을 다시 세우려고 했다. 7월 12일 한양에 입성한 청나라 장수 오장경·마건충(馬建忠)은 군사문제로 회담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오늘 밤 남양만에서 배를 타고 톈진에 가서 황제의 유지(諭旨)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강제로 보교에 태워 남양만으로 갔다. 7월 20일 대원군이 청나라에 도착하자 이홍장(李鴻章)은 임오군란 발생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그 책임을 힐난했고 곧이어 그를 보정부(保定府)로 옮겨 감금했다.이와 같이 청나라가 대원군을 납치한 이유는 개항이후 일본의 조선진출이 독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반일의 거두인 대원군이 계속적으로 일본에 대해 강경하게 나갈 경우 일본을 자극하여 오히려 일본의 무력개입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고, 또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서는 민씨일파를 내세워 이용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실제 대원군이 거세됨으로써 일본은 마건충의 주선에 따라 조선정부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여 임오군란 주모자의 처벌, 배상금 지불, 공사관 경비를 위한 군대주둔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청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은 날로 심해져 정치적 간섭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권도 그들의 수중에 장악되어갔다.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지휘하는 군대가 주둔하여 조선군대를 훈련시켰으며, 마건상(馬建常)과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을 정치 및 외교고문으로 보내어 관제와 군제를 개편했다. 또한 1882년 8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어 청나라 상인의 내륙여행과 통상권이 규정됨으로써 청나라 상인이 조선의 상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특히 이 장정의 앞부분에서는 조선국왕과 청의 북양대신을 대등한 지위에 놓고, 영사재판권을 인정하고 있어 청에 대한 종속관계를 명시한 셈이었다. 이러한 청에 대한 종속관계를 배제하고 민씨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1884년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화파들이 발표한 신정강에서도 청에 대한 종속관계의 청산과 대원군의 귀국이 요구되고 있듯이, 당시 대원군 납치사건은 임오군란 이후 고양된 외세 특히 청나라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더욱 자극시킨 사건이었다. 개화파들은 비록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단행하고 왕권강화 등 보수적인 정책을 취하여 노선상으로는 일치할 수가 없었지만, 청에 대한 종속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귀환을 반드시 실현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갑신정변이 3일간의 짧은 집권 후 실패로 끝나자 조선은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0년간 청의 정치적·외교적 간섭을 받는 종속국의 처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은 1885년 8월에 귀국하여 운현궁에 은거해 있다가 1894년 청일전쟁 후 갑오정권에 의해 일시적으로 추대되었다.


해가는 한편, 군대를 몰아 서울 시내와 궁궐을 장악했다. 대원군 정권이 민씨정권의 폭압과 외세의 침략을 막아줄 것을 기대했던 군병과 서울의 빈민들은 청군에 저항하여 무기를 들고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를 전개했다. 청군은 대원군 세력을 체포·투옥하여 대원군 정권을 무너뜨리는 한편, 군병의 집단적 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을 공격하여 저항 세력을 진압했다. 임오군란은 개항 이후 대규모로 전개된 최초의 반봉건·반외세 투쟁이었다.





❙갑신정변
1884년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국과의 종속 관계를 청산하고자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으로 국민주권국가 건설을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
한국사에서 정치세력으로서 근대적 개혁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것은 개화파였다. 실학의 북학사상을 계승한 이들은 문호개방을 전후한 시기에는 박규수·오경석·유대치 등을 중심으로 그 움직임이 보다 적극화되고 조직화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젊은 양반계급 지식인들을 핵심으로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해가며 정부의 개화정책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민씨정권의 친청수구정책은 날로 횡포를 더해갔고, 청국은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획책함에 따라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는 높아져갔다. 이에 따라 개화파는 정변을 통해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할 것을 결정했다. 마침 월남문제를 둘러싸고 청-프랑스 청프전쟁: 1884∼1885년에 베트남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청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청불(淸佛)전쟁이라고도 한다. 프랑스는 1874년의 사이공 조약에 따라 베트남의 남부 6성(코친차이나 전역)을 식민지로 할양하도록 함과 동시에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는데, 이 통고를 받은 청국은 이를 승인하지 않고 종주국으로서 이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였으며, 베트남에서도 양이(攘夷)운동이 맹렬하게 일어났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베트남 원정군을 파견하여 1883∼1884년에 걸쳐 수도 위에와 각지에서 항(抗)프랑스군을 제압하고, 그 동안에 위에에서 2개의 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 정부에 프랑스의 보호권을 확인시켰으나, 청국은 프랑스와의 회담을 진행하는 한편, 베트남 북부에 군대를 파견하여 중국인으로 편성된 흑기군(黑旗軍)과 연합하여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계속시켰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 함대는 타이완의 지룽[基隆]이나 푸저우[福州] 및 민장[閩江] 연안을 공격해, 1885년 초에는 닝보[寧波]를 봉쇄하고 펑후군도[澎湖群島]를 점령하는 등 청국 해군을 압도하였다. 한편 베트남 북부에서의 지상전에서는 청군의 세력이 대단히 강하였으나, 동년 6월 청국 정부는 톈진[天津]에서 강화조약을 체결,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였다.
   [출처] 청-프랑스전쟁 | 두산백과
 전쟁이 터져 청국이 패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간섭이 약화되고 또 임오군란 이후 냉담했던 일본공사가 다시 접근해왔다. 개화파는 일본공사관의 후원을 확인하고 계획대로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 우선 축하연에 참석한 민영익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국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겨 50여 명의 개화파 군사력과 200여 명의 일본군으로 호위케 하고 수구파 우두머리를 처단했다. 이어서 개화파들은 홍영식이 우의정, 박영효가 좌포도대장, 서광범이 우포도대장, 김옥균이 호조참판이 되어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정강을 제정·발표했다. 정변의 실패로 이 정강·정책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중 14개 조가 뒷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하여 저술한 〈갑신일록〉에 실려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청국에 대한 종속관계의 청산, 문벌폐지와 인민평등권의 제정 및 능력에 따르는 인재의 등용, 지조법(地租法) 개혁, 탐관오리 처벌, 백성들이 빚진 환자미[還上米]의 영원한 면제, 모든 재정의 호조 관할, 경찰제도의 실시, 혜상공국(惠商工局)의 혁파 등이었다. 청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지향했고, 아직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적극적인 자세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양반지배체제를 청산하려 했으며, 또 뒷날의 갑오농민전쟁에서 요구된 농민적 토지소유가 제기되지는 않았으나 지조법의 개혁이 제시되었고, 왕실경비와 정부재정을 구분하고 호조가 국가재정을 전담케 하며 특권상인의 존재를 부인한 것 등은 개화파의 국정개혁 의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을 일으켰다.
그러나 국왕의 정치혁신 조서가 내려짐과 동시에 청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퇴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측은 오히려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와 1885년 1월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일본에 사의를 표명하고 10만 원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공사관 수축비를 부담하게 되었다. 한편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반도를 둘러싼 청국과의 경쟁관계에서 다시 불리한 처지에 빠진 일본은 정세를 만회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담판하게 한 결과,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군의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서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에는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天津] 조약을 체결했다(1885. 4. 18). 이로써 갑신정변의 뒷마무리는 일단 끝났지만,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문제에 있어서 청국과 같은 파병권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0년 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되었다.
하자 개화파들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청일전쟁

1894~95년 청(淸)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였던 전쟁.

전쟁의 결과 일본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조선과 중국은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대상이 되어갔다.

배경
1880년대 후반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급속히 발전한 일본자본주의는 1890년에 시작된 경제공황을 통해 그 모순을 드러냈다. 즉 값싼 노동력의 국내시장 발전제약과 섬유공업·군수공업 등에 대한 수년 간의 투자확장이 공황의 원인이었다. 1889년의 흉작으로 인한 쌀 생산의 감소도 공황을 더욱 촉진시켰다. 결국 1890년도의 일본경제는 심한 수입초과를 나타냈으며 일본은 무역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해 해외시장 침략을 꾀하게 되었다. 1890~94년 일본 의회에서 나타난 일본지배층 내부의 대립 격화와 농민·노동자들의 경제상태 악화 및 불만의 증대는 지배층의 침략기도를 부추겼다.

한편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영토분할을 주도하고 있던 영국은 당시 제정 러시아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로 보고,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반대하는 동맹세력을 찾고 있었다. 영국은 일본을 장래의 동맹국으로 보고 청일전쟁 개시 2주일 전인 1894년 7월 16일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에 동의했는데, 이는 일본의 침략전쟁 개시를 승인한 것을 의미했다. 미국도 러시아를 위험시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게 했다. 반면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침략 기도에 대해서는 경계하면서도, 일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려는 정책은 취하지 않고 장차의 침략기회만 노리고 있는 단계였다. 1894년 조선에서 발생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조선정부의 청군개입 요청은 일본에게 침략동기를 제공했다. 순식간에 남부지방 전역을 휩쓴 농민군의 기세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청나라에 차병(借兵)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6월 8~9일 청군 2,400여 명이 아산만(牙山灣)에 상륙하여 12일부터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조선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톈진 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청군의 조선출동 통고를 받자마자 곧 조선에 침입했다. 그들은 일본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아래 해군과 육군의 대부대를 파병했고, 이어 인천-서울 간의 정치적·군사적 요충을 장악했다.

전쟁의 경과
일본군의 침입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갑오농민전쟁이 이미 진정되었음을 이유로 청·일 양군의 동시철병을 요구했다. 일본의 오오토리[大鳥] 공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갑오농민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의 내정개혁(內政改革)을 구실로 철수를 거부했다.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는 겉으로는 '일본의 자위(自衛)를 위해 조선내정의 개혁을 촉구하여 변란의 근원을 단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러시아에 대처할 전략적 시설을 한반도 안에서 확보하고 불평등조약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본원적 축적을 강행하려는 것이었고, 나아가 조선을 보호국화(保護國化)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이 철수한 후 비로소 내정개혁을 실시할 수 있다고 하여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은 7월 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했고, 7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8월초에 일본군은 아산·공주(公州)·성환(成歡)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에 공격을 가하여 승리하고, 계속 북상하여 9월에는 평양에서 청군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청군은 9월 16일 밤 평양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평양전투의 승리를 전기로 하여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고, 갑오정권(甲午政權)의 개혁적 성격도 희석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군수물자만 자국에서 가지고 왔을 뿐, 8월 27일 체결된 '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對朝鮮對日本兩國盟約:朝日盟約)에 의해 식량·부식물·군수물자 수송의 노동력을 대부분 현지에서 조달했으므로 전쟁터가 된 조선의 민중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의 자주권은 유린되었다. 이에 농민군은 그해 10월 다시 전면적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공주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급히 남하하여 조선정부군과 함께 농민군토벌에 나섰다. 결국 농민군은 12월 우금치전투에서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한편 9월 17일 황해해전(黃海海戰)에서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주력을 격파한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하고 11월 6일 진저우 성[錦州城]을 점령했다. 부패한 청군 지도부의 무책임한 대처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11월 22일 뤼순[旅順]이 점령되었다. 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강화교섭과 시모노세키 조약전쟁에 참패한 청나라정부는 강화를 시도하고 대표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청나라 대표단이 파견되기 직전, 일본에서는 조선의 독립승인(청의 종주권 파기), 랴오둥[遼東]·타이완[臺灣]·펑후[澎湖]의 할양, 배상금지불, 서구열강과 맺은 것과 같은 통상조약(불평등조약)을 일본과 체결할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강화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1895년 1월 30일 청나라 대표단이 도착하자, 일본은 시간을 지연시켜 점령지를 확대함으로써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하려는 속셈에서, 대표단의 권한부족을 트집잡아 귀국시켰다. 그동안 일본 해군은 1월 20~23일 위해위(威海衛)를 봉쇄한 다음, 2월 12일 육군의 상륙작전으로 이를 함락시켰다. 사태의 급진전에 놀란 청나라 정부는 이홍장(李鴻章)을 강화전권대사로 하는 새로운 대표단을 시모노세키[下關]파견하고, 일본측이 제시하는 강화초안을 수용하여 4월 17일 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은 배상금 2억 냥(3억 엔) 지불과 랴오둥·타이완·펑후의 할양, 쑤저우[蘇州] 등 4개 도시의 개항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대 강국이 산둥 반도[山東半島] 부근에 함대를 집결시키고 랴오둥 반도 포기를 권고해왔으므로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랴오둥 반도 반환의 보상으로 일본은 3,000만 냥을 더 얻었다.

역사적 의의
청일전쟁은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얻은 막대한 배상금, 과중한 세금수탈로 만들어진 군사비, 식민지 타이완으로부터 얻은 이윤, 전쟁으로 축재한 자본가의 이윤 등을 바탕으로 전쟁 후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반면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었던 변혁의지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으로 압살당함으로써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었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되어갔다. 또한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렸다.




❙을미사변

싸이월드미투데이요즘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지휘하는 폭도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당시에는 왕비)를 시해 1895년 3국간섭 이후 한국정부 내에서 이완용(李完用)·민영환(閔泳煥)·윤치호(尹致昊) 등 소위 '정동파'들은 왕비 민씨의 세력을 앞세워 친러·친미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일제는 세력만회를 위해 7월 13일 이노우에[井上馨] 대신에 군국주의 군벌인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임명했다. 한국정부는 10월 민영환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하는 한편, 일본군 장교가 훈련시키던 훈련대를 해산하고 미군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를 중용하기로 결정했다. 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김가진(金嘉鎭)을 면직시키는 대신 친러계 이범진(李範晉)을 등용하는 등 배일정책을 더욱 추진했다. 일본은 한국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왕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고 방책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미우라 등은 대원군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간섭하지 않으며, 김홍집(金弘集)·어윤중·김윤식(金允植)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이재면(李載冕)과 이준용(李埈鎔)을 중용할 것 등을 조건으로 대원군 세력의 협조를 얻었다. 이와는 별도로 미우라는 일본인 아다치[安達謙藏]가 경영하는 한성신보사(漢城新報社)의 수십 명의 일인 낭인, 일본 수비대와 거류지 담당 경찰관들을 하수인으로 고용하고, 훈련대 간부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친일파들도 포섭했다. 훈련대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미우라 등은 왕비 시해 예정일이었던 8월 22일을 앞당겨 8월 20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했다. 일인들은 우선 대원군에게 가서 고유문(告諭文)을 결재받고, 서대문에서 훈련대 병사들과 합류하여 광화문에 도착했다. 여기서 폭도들은 훈련대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죽이고, 왕궁을 호위하던 다이 지휘하의 시위대들과 교전하여 패배시켰다. 폭도들은 고종과 중전의 침소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廢黜詔書)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했다. 그러나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왕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궁내부대신 이경직(李景稙)을 살해한 뒤, 옥호루(玉壺樓)에서 왕비를 무참하게 시해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다. 이후 대원군을 고종과 대면시켜 미리 준비한 조칙 3개안을 재가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왕비 시해를 일본인들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위장처리방안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이번 사건은 훈련대와 대원군이 결탁하여 행한 쿠데타이며, 일본군은 고종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여 훈련대와 시위대의 싸움을 진압했고, 왕비 시해는 아는 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운 다음, 8월 22일 왕비 민씨의 폐위조칙을 위장 발표했다. 그러나 고종, 러시아인 사바틴, 미국인 다이 등 목격자가 많아 사건의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이에 미국공사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의 회합 후 일본의 관여사실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발표했다. 또 이들은 일본이 뒷받침하고 있는 김홍집 내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난처해진 일본은 사건관련자를 형식적으로 처벌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일본인들을 체포하여 히로시마[廣島]로 압송하는 한편, 미우라 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를 주한공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철수와 대한불간섭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이노우에를 왕실위문사로 파견하여 사건에 관련된 훈련대를 해산하고 왕비 민씨를 복위시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10월 12일 정동파들이 러시아와 미국인의 협조를 얻어 고종을 궁 밖으로 빼돌리려 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이 일어나자, 일본은 사건에 외국인들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자신들의 만행을 희석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다음해 1월 만행을 자행한 미우라 이하 폭도 48명을 증거불충분이란 명목으로 석방했다. 한편 12월 1일 고종은 정식으로 왕비가 승하했음을 발표했으나 일본인의 관련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여 이주회(李周會)·윤석우(尹錫禹)를 범인으로 몰아 처형하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후 이준용이 일본으로 망명하는 데서 사건을 매듭지으려 했다. 또 내외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개혁정책을 추진, 단발령과 건양(建陽)연호의 사용, 친위대·진위대 등으로 군제 개편, 소학교령 공포, 태양력 사용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왕비시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서 친일내각에 의해 추진된 개혁은 전국적인 반일의병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 사건.




❙아관파천

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의 공모하에 고종과 왕세자가 궁궐을 벗어나 지금의 서울특별시 정동(貞洞)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간 사건 아관파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랴오둥[遼東] 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자 1860년대 이후 끊임없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조선 내에도 친러세력을 부식하려 했던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받아 조선의 왕실 및 일부 정치세력 내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동안 친일개화파 정권에 의해 눌려 있던 민비를 비롯한 척족세력과 구미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고 있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때 러시아 공사 K. 베베르[韋貝]는 미국공사와 함께 민비세력에 접근하여 친러정책 실시를 권유했다. 이에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20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학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써 일본세력을 만회하고자 했다. 그리고 친일 개화파 내각은 단발령의 실시를 비롯한 급진적인 개혁사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민비학살과 단발령은 조선민들의 반일감정을 폭발시켜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민비가 경복궁에서 학살되고 난 후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친미·친러 세력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1895년 10월 12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은 친러세력이었던 이범진(李範晋) 등이 춘생문으로 입궐하여 고종을 데려오려는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범진은 또다시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그당시 친미파였던 이완용·이윤용 등과 모의하여 고종에게 접근,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고종은 마침내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여 1896년 2월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파천 직후 고종의 명령으로 개화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가 참형되었고, 내부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도망가던 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은신중이던 친미·친러파 인물들이 대거 등용되어 내각을 구성했다. 친러내각은 친일내각이 실시한 갑오·을미 개혁사업을 중단하고 내각은 의정부로 환원되어 한동안 약화되었던 전제왕권이 다시 강화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 파천은 기본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한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의 세력다툼의 결과였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해갔다.




.이를 계기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친일 개화파 정권이 무너지고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대한제국

1897년 10월부터 1910년 8월 22일까지 존속한 조선왕조의 국가.

대한제국의 성립 대한제국 배경: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청국으로부터,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극심한 내정간섭을 받아 심지어 왕비가 학살되기까지 했다. 아관파천 이후에는 다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받기 시작했으며, 중요한 이권이 차례로 외국인에게 넘어갔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조선 내부에서는 국민적 자각이 일기 시작하여 당시 국가의 중요한 과제가 자주 독립에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독립문 건설운동(1896)은 이러한 국민적 자각을 반영하는 것이며,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慶運宮:德壽宮)으로 환어(還御)한 것(1897. 2)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청국의 후퇴와 아관파천 이후 열강 간의 세력균형이 대한제국 성립의 외적 요인이었다고 한다면, 아관파천은 그 전후하여 일기 시작한 자주 독립에 대한 국민적 여망이 내적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국왕을 황제로 존칭하여야 한다는 논의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칭제(稱帝) 논의도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뒤 을미사변 직후 친일적 각료를 중심으로 다시 칭제논의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국왕을 황제로 존칭하고 국호를 대조선제국으로 고치며 10월 26일 즉위식을 거행한다는 각의의 결정을 보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명성황후 시해 등 당면문제를 호도하려는 일본측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으며, 그때문에 러시아·프랑스·미국의 반대를 받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칭제논의는 1896년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면서 재개되었다. 제일 먼저 국왕에게 칭제를 건의한 사람은 상하이[上海]에서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한 홍종우(洪鍾宇)로 전해지고 있다. 국왕도 일찍부터 칭제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홍종우의 건의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열강의 반대를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밀지(密旨)를 내려 제위(帝位)에 오르도록 진정하게 하는 우회적 방법으로 이를 추진하였다. 1897년 5월 이후 정부관원, 각도 유생, 시전상인과 일부(개신유학 계열) 독립협회 회원 등 각계각층의 잇달은 칭제 요청은 그 대부분이 국왕의 밀지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열강도 이당시 이미 러시아·프랑스·일본·영국을 주축으로 하여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일본·미국·영국 등이 냉담한 편이었지만, 그 어느쪽으로부터도 칭제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은 없었다. 그리하여 정부주도하에 제위에 오르는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어 갔다. 이해 8월 1일부터 사용한 연호가 광무(光武)로 정해지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원구단(圓丘壇) 자리가 남서(南署) 회현방(會賢坊) 소공동(小公洞:지금의 조선 호텔)으로 정해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어 의정대신 심순택(沈舜澤), 특진관 조병세(趙秉世) 등의 의례적인 황제요청이 계속되는 가운데 즉위식 거행 일자가 10월 12일로 결정되었다. 예정대로 이 날 원구단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13일에는 국왕이 제위에 오른 것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였음을 선포하였고, 14일에는 이러한 사실을 외부를 통하여 각국 공사관·영사관에 통보하였다. '대한'(大韓)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다는 뜻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청일전쟁(1894~95)의 결과 임오군란(1882) 이래 조선에서 강력한 지위를 유지해오던 청국이 후퇴했다. 대신 일본이 그 지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요동반도를 획득함으로써 만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틀까지 마련했다. 일본은 러시아·프랑스·독일의 간섭을 받아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했다(삼국간섭, 1895. 5)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일본의 지원하에 개혁(갑오·을미 개혁)을 추진해오던 온건개화파 내각이 동요하는 반면, 왕비 민씨의 지지를 받는 보수파 인물들이 입각함으로써 정부는 배일·친러적 경향을 띠어갔다. 일본은 퇴세(退勢)를 만회하기 위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고(→ 을미사변, 1895. 8), 내각은 다시 온건개화파로 개편되었다. 이 새 내각은 명성황후 시해와 같은 중요한 사건을 호도하는 대신 단발령(斷髮令:1895. 11. 17)과 같은 과격한 시책을 펴나갔다.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와 친일내각의 단발령은 민심을 동요시켰으며,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와 단발의 반대를 표방한 의병이 전국 각처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아관파천, 1896. 2). 그결과 친일 온건개화파 내각은 실각하고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어 대한제국에서는 일본 세력이 약화되는 반면 러시아의 진출이 현저해졌다. 한반도에서 열강간의 세력균형이 틀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러일전쟁

1904~05년 만주와 한국의 배타적인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
배경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을 독점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의해 일시적으로 저지되었다. 일본은 정치적 열세러일전쟁배경: 1896년 2월 친러파에 의해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친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후 조선의 대외무역에서 일본은 수입의 60~70%, 수출의 80%를 차지함으로써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권(利權)면에서도 열강에 분할되는 이권을 최혜국대우 조항에 의해 획득하거나 위협함으로써 확보해 갔다.
   한편으로는 조선에 대한 경제적 지위를 확실하게 굳히면서 이를 군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대(對) 러시아 전쟁을 상정한 군비확장에 주력했다.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받은 전쟁배상금 3억 6,000만 엔 중 2억 2,000만 엔을 군비확장에 사용하고, 1896~1903년 예산세출의 평균 5할을 군비로 충당했다.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힘으로 러시아와 싸워 승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시아에 대한 영국·미국의 이권을 지키는 헌병 역할을 스스로 떠맡고 나섰다. 이로써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의 막대한 전비 17억 엔 중에서 8억 엔을 영국과 미국에서의 외채모집으로 보충했다.
   또한 러시아도 삼국간섭 후 1896년 러청은행을 설립하고, 북만주를 횡단하여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단거리로 잇는 동청철도(東淸鐵道)의 부설권을 획득했다. 또 1898년 뤼순[旅順]·다롄[大連]을 조차하고 여기에 대규모 해군 근거지를 계획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도 1897년 재정고문 알렉세예프와 군사고문을 파견하고, 1898년에는 한러은행 등을 설립했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 일어난 이권반대운동과 영·일 양국의 방해로, 알렉세예프는 취임하지 못하고 곧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한러은행도 폐쇄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 일보 후퇴하여 만주에 침략의 발판을 굳혔다. 1900년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제국주의 열강과 공동 출병한 러시아군은 만주를 점령, 조선을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삼으려 했다. 일본은 1902년 1월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대응했으며, 러시아도 양보의 태도를 보여 4월 만주철병을 내용으로 하는 만주환부조약(滿州還付條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의해 1902년 10월 제1차 철병을 단행했으나, 이후 러시아의 적극적인 대만주정책으로의 선회로 1903년 4월로 예정된 제2차 철병을 거부하는 대신에 오히려 만주에 군대를 증파했다.
   이후 러시아는 봉황성·안동성 일대를 그 지배하에 두고 뤼순을 요새화했으며, 같은 해 7월 동청철도를 완성했다. 또 8월 아무르 지역과 관동지역을 동아시아 총독구로 하는 이른바 동아시아 총독부의 설립을 발표했으며, 1903년 4월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조차를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만한교환(滿韓交換)의 원칙으로 수차례 교섭을 시도했으나, 더이상 협상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결의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 교섭 단절과 아울러 개전을 결정했다. 2월 8일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하고, 9일 인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10일 선전포고를 했다.
   진행과정: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열국에게 통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2월 9일 서울에 진주했다. 2월 23일 일본은 공수동맹의 성격을 띤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하고, 병력과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4월 1일에는 한국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5월 18일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 혹은 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九連城)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다음 랴오양[遼陽]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8월 28일부터 일본군 13만여 명과 러시아군 22만 명 간에 대격전이 벌어졌으나, 9월 4일 일본군은 펑톈[奉天]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여세를 몰아 1905년 1월초 뤼순항을 함락시키자, 러시아군은 대세를 만회하고자 발틱 함대를 파견했으나,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일본해군과의 격전에서 참패를 당함으로써 전세를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제1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전쟁을 더이상 지속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권고를 수락하여 일본과 포츠머드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를 만회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으나, 반일 의병투쟁을 야기함으로써 더욱 수세에 몰렸다.
의의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식민지분할을 위한 열강간의 세력각축의 결과였으며, 이는 한국 및 만주를 둘러싼 양제국주의 국가의 무력충돌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배후에는 영국·미국의 자본이, 러시아의 배경에는 프랑스의 자본이 각각 지원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한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 내지 묵인하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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