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기해박해 1절2절

2015. 1. 5. 오후 3:56:18

글자
 

정리: 김 기 혁

2015명례강학

[A]

한국천주교회사-3

4장 기해박해/1,2

2015.1.5()

 

4장 기해박해

 

1절 박해의 원인

-신유박해(1801) 후 교회성장: 회장중심, 교회서적간행, 신심회

-선교사영입운동지속 : 정하상 남이관 등이 북경 남경 로마교황청에 서신

-1831. 조선대목구설정

-1834. 유 파치피코(여항덕) 신부입국, 3년간 조선선교

-1836. 모방 +샤스탕 신부입국 1837. +앵베르 주교입국

-선교사입국후 신자급증 (인구대비 1/1,000)

-조선인성직자 양성시도: 1836. 신학생3 마카오 유학, 국내 신학생4 별도 교육

 

-효명세자 사후 8살 헌종. 순원왕후(안동김씨) 수렴첨정

-기해박해는 안동김씨로부터 풍양조씨의 정권탈취 과정에서 천주교 빌미.

 

 

 

 

2절 박해의 전개

-1839.4. 권득인 9 순교

-최해성(원주,서지골) , 박아기 , 김성우, 남명혁, 이광헌, 이매임, 허계임, 등 체포

-형조(조병현)에서는 회유책, 우의정(이지연)은 엄겪하게 다룸.

-사학토치령 반포

-정해박해(1827) 체포자, 상주진영 전주감영 수감자 참수

-정하상 상재상서체포전 작성, 체포시 전달

-앵베르 주교 경기도 피난처(화성시 서신면 송교리) 자수, +모방 샤스탕 자수, 새남터 효수

-지도급신자 처형: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남이관, 김제준, 김유리대, 전경협, 박봉손, 홍금주, 허계임, 김효임, ..

-김순성 밀고자

-원주 최해성 참수, 유진길 아들 유대철 최희득 고집종 교수, 해미 전베드로 옥사,

전주감영 송인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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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파치피코 (여항덕)

 

우리나라에 두 번째로 입국한 중국인 신부. 원래이름 여항덕.

조선에 들어올 때 이름 유방제 (** 유방제이름은 아니 부르기로 함: 한국천주교회사23)

세례명 파치피코. 1831년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은 조선 교우들의 신부 파견 요청을 접수하여 브뤼기에르(Burguiere, ) 주교의 조선 파견을 지지, 그의 자원을 허락키로 하였다. 이 때 이탈리아 나폴리(Napoli)의 중국인 신학교에서 7년간 수업하여 사제서품을 받은 유 파치피코 신부는 로마 교황청에서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도 조선에 가기를 지원하였다. 이에 포교성성은 이를 수락하고 먼저 조선에 들어가 주교의 입국을 준비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유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보다 먼저 길을 떠나, 브뤼기에르 주교가 싱가포르를 떠났을 때에는 이미 중국에 들어가 조선 입국의 길을 찾고 있었다.

183413일 정하상(丁夏祥) 등의 안내로 변문(邊門)을 통과하여 조선 입국에 성공한 그는 16일에는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조선에 입구하자 주교의 입국을 준비할 사명을 지니고 주교의 입국을 방해 내지는 지연시키려고 하였다. 그로 인해서 주교는 조선 교우와의 연락이 제대로 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 신부의 사주에 의한 반감에 부딪쳐, 조선 입국의 길을 찾지 못하고 중국대륙을 갖은 고생을 해 가며 방황하다가, 183510월 조선입국 직전에 선종하였다.

이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조선교구 관할에 필요한 전 권한을 위임받은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곧 달려가 주교의 장례를 치른 다음, 1835년 말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모방 신부는 곧 유 신부가 묶고 있는 처소로 들어가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유 신부가 그 동안 주교의 입국을 방해한 사실과, 선교에는 뜻을 두지 않고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등 비위사실로 인하여, 조선 교우들의 신앙심을 잃고 있음을 알고는 이를 충고하였으나 끝내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으므로, 마침내 부주교의 권한으로 그에게 모든 성무집행을 정지시키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을 단념한 유 신부는 1836122일 서울을 떠나 고향인 중국 산서성(山西省)으로 돌아가게 되자 모방 신부에 의해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 가게 된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齊) 등 세 명의 어린 신학생들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이후 만주 · 몽고 ·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8개월 만에 그들을 무사히 마카오에 도착케 하였다. 고향에 돌아간 유 신부는 그때서야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신부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조선에 입국하여 주교의 입국을 방해한 것은 조선교구의 관할권이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로 넘어가자, 양자 간에 알력이 생겨, 북경교구를 맡고 있던 포르투갈 출신 성직자들이 뒤에서 이를 조종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天主敎會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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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성

 

평안북도 의주성(義州城) 밖 만주(滿洲)와의 국경지역에 있던 관문(關門)이다. 예로부터 중국으로 가는 조선 사신은 물론 조선으로 가는 중국 사신들이 꼭 거쳐 가야 하는 유일한 관문으로, 일종의 국경을 표시하는 역할로 세워졌는데 변문과 만주 봉황성의 책문(柵門)까지의 장소에서는 무역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특히 변문은 한국 친주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으로서 동지사(冬至使)를 위시하여 부연사행(赴燕使行)으로 북경(北京)을 왕래하던 조선 교회의 밀사들이 무수히 이곳을 넘나들었으며, 모방(Maubant, ) 신부, 샤스탕(Chastan, ) 신부. 앵베르(Imbert, 范世亭) 주교 등 많은 선교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 곳 수구문을 통하여 조선에 잠입하였다.

[개설]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큰 산성의 하나로, 오골성(烏骨城)이라고 불렸다.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중국 요녕성 단동시의 동북쪽 20km쯤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산성은 요동반도 동남부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서쪽으로는 낭낭산성(娘娘山城)을 비롯하여 수암(岫巖)의 여러 성을 거쳐 안시성(安市城)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백암성(白巖城)을 지나 요동성(遼東城)에 도달하며, 동쪽은 압록강 물길을 따라 박작성(泊汋城)을 지나 중상류에 자리한 고구려의 중심부로 이어진다.

[역사적 변천]

오골성은 고구려 때 불렸던 이름이지만, 명나라 때부터는 봉황성이라고 불렸다. 명나라 때에는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을 다룬 민간 전승의 문학작품이 유행하였는데, 이 책들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왔다. 책에는 설인귀(薛仁貴)의 영웅담을 실은 무대로 봉황산이 묘사되었고, 역사연의(歷史演義)의 무대인 안시성과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의 활약도 담겼다.

17세기 이후에 조선 사신인연행사(燕行使)가 중국을 오가면서 봉황성을 접하였다.봉황성과 안시성을 다룬 민간 전승의 문학작품을 읽었던 연행사는 자연스럽게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이해하였고, 이러한 이해는 병자호란 이후에 민족의식이 확대되면서 점차 굳어져이계집(耳溪集)이나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등에 실리게 되었다.

17세기 중반에 남구만(南九萬), 김창업(金昌業) 등은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등에 나타나는 지리적 문제점을 근거로 삼아 봉황성설을 부인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 박지원(朴趾源), 안정복(安鼎福) 등이한서(漢書)지리지와구당서(舊唐書)의 기록을 인용하여 봉황성설의 오류를 지적하고서 안시성은 개주(蓋州)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내용]

봉황산의 최고봉은 해발 836m의 찬운봉이다. 이 봉우리를 정점으로 우뚝 솟은 여러 봉우리와 가파른 바위 절벽들이 험준한 산세를 이루는데, 가파른 바위 절벽을 성벽으로 삼았고, 봉우리 사이의 낮은 지대에도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길이는 15.955인데, 돌로 쌓은 길이는 7.525정도이고, 나머지 구간은 천연 절벽을 성벽으로 삼았는데, 성벽의 높이는 50m가 넘는다. 현재 동북쪽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성벽의 일부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 치성(雉城)을 두었고, 성벽 모서리에는 주변 동향을 살피기 위한 시설로 고대(高臺)를 쌓았다. 현재 남쪽과 북쪽 문터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옹성을 둘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계곡에 설치된 남문은 군사와 무기를 산성 안으로 옮겼던 정문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는 상당한 규모의 평지가 분포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 보장왕조에는 보장왕 4(645)에 당나라 이세적(李世勣)이 이끈 군대가 백암성을 공격하자 오골성에서 군사를 지원하였고, 648년에 당나라 설만철(薛萬徹)이 박작성을 포위하자 오골성과 안시성 등에서 군사 3만 명을 보냈다고 하였다. 고구려 당시에 오골성이 주위의 크고 작은 성을 지원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오골성을 압록강 이북의 땅을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거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 안시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당나라에 항복한 고구려 장군 고연수(高延壽)와 고혜란은 오골성이 압록강 이북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였으므로, 오골성을 먼저 공격하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건안성(建安城)과 신성(新城)10만명의 군사가 있고 안시성의 군사가 퇴로를 막을까 두려워 봉황성을 치지 않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가 패하였다. 이보다 이전인 영양왕 23(612)에는 수나라 군대가 이곳을 지나 평양을 공격하려다가 살수(薩水)에서 크게 패배하기도 하였다.

조선 인조 20(1642)에 청나라와의 척화를 주장하였던 이경석(李景奭), 김상헌(金尙憲) 등은 청나라 군사에 의해 심양(瀋陽)에 끌려갔다가 1년 동안 봉황성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당시 봉황성의 책문(柵門)은 조선 관리들이 청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신고하던 오늘날의 세관과 같은 곳이었다. 조선 관리는 봉황성 책문을 지난 뒤 진동보(鎭東堡, 松站), 진이보(鎭夷堡, 通遠堡), 연산관(連山關), 첨수참(甛水站), 요동(遼東), 십리보(十里堡)을 거쳐 심양으로 들어갔다. 그 뒤 봉황성은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봉황성과 안동성 일대에 점령하면서 일본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전장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한인들이 봉성농우회(鳳城農友會)를 조직하며 활동하였던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참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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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성 밀고자의 말로

 

김순성(?~1862). 천주교 배교자. 밀고자. 세례명 요한. 일명 여상.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유다로 불린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치열해지자 자신의 출세를 위해 박해를 이용,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유진길(劉進吉) 등 지도급 교우들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을 밀고, 처형케 했고, 앵베르(Imbert, 范世亭) 주교의 하인 정화경을 속여 앵베르 주교와 다른 두 선교사를 체포하게 하였다. 교우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항상 참석, 교리문답과 성서를 읽으며 모범을 보이는 체하면서 선교사들과 교우들의 공정을 염탐하였고, 또 자신의 밀고에 의해 체포된 처녀 교우들을 농락하려고 하였다. 앵베르 주교 체포의 공로로 오위장(五偉將)의 관직을 얻었으나 1840년 죄인으로 몰려 전라남도 신지도(新智島)로 유배되었고, 1853년 특사로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1862년 이재두(李載斗) 등과 공모하여 방계 왕족 이하전(李夏銓)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 이해 718() 대역부도죄인(大逆不道罪人)으로 참수(斬首)되었다.

(참조:가톨릭백과사전)

 

댓글 3

  • 2015년 1월 6일 오전 10:57

    조선시대 더욱 큰 죄인일 경우 군율에 따라 목을 베고 군문에 매달던 형벌은? p30

  • 2015년 1월 6일 오후 11:17

    p30 의 마지막단락의 서양인 범세영과 나백다록,정아각백의 서양이름은?

  • 2015년 1월 7일 오후 7:23

    얼굴을 북쪽으로 향한다는뜻으로 임금을 섬기는 신하라는의미로사용된말 18p

천주교회사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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