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현양과 성지 순례
차기진(양업 교회사 연구소 연구소장)
순교의 시작과 끝
한국의 성지들은 엄밀히 말해 순교 사적지(殉敎史蹟地)들이다. 성지란 팔레스티나(Palestina)를 가리키는 고유한 명칭이므로, 실제로는 성지·순교지·교우촌 등을 서로 구분해서 불러야만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103위 성인을 갖게 되면서 절두산, 서소문, 배티, 해미, 솔뫼 등 성인들과 관련된 순교지를 성지라는 개념에서 이해해 왔고, 더 나아가서는 명동 대성당, 여사울, 신리 등 일반 교회 사적지들도 성지라는 명칭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성지와 사적지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한 서울의 수표교 인근과 명례방(현재의 명동)에 깃든 신앙은 경기도 광주 일대와 충청도 내포 지방, 전라도로 번져 나가 마재, 여사울, 풍남문 등의 사적지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의 신앙이 다시 용인의 은이, 골배마실, 충청도의 배론, 서울의 새남터와 서소문, 경상도 청송의 모래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성지나 사적지를 중심으로 하여 거미줄처럼 이어진 신앙, 이것이 곧 한국 교회의 전통이었다.
물론 이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는 곳은 순교 성지나 사적지이다. 교회 전통상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한 자리가 순교자 현양 운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되어 온 때문이었다.
순교사에 끝이 있다면, 분명 그 시작도 있고 과정도 있는 법이다.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이 살았던 충청도 진산 땅은 신앙을 받아들이고 순교의 터전을 닦은 곳이며, 진산 관아에서 전주 감영에 이르는 하루 15시간, 135리 남짓 되는 고통의 시간과 거리는 순교의 과정이고, 바오로가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전주 남문(풍남문)은 바로 순교의 끝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부분 순교의 끝만을 알고 순교의 시작과 과정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우리가 박해 시대의 교우촌을 중시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곳이 바로 순교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눔과 봉사는 가정 공동체 안에서 시작되어 교우촌으로 이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공동체의 신앙 생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도 시대의 교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서 신자들은 모든 것을 서로 나누었고, 때로는 비신자들에게도 자신들의 것을 나누어 주었다. 그 한 예로 1815년의 을해 박해를 전후하여 경상도 북부에 형성되었던 교우촌들의 경우에는 흉년이 들어도 굶주리는 신자가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표현했던 것처럼 '깊은 산곡에 형성된 보잘것없고 하찮은 교우촌은 신앙의 시작이자 마지막 보루'였다. 그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교우촌 신자들은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의 방문을 받았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활발한 신앙 활동으로 다시 공동체를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각처의 교우촌은 이제 공소로 설정되었으며, 아울러 성소(聖召)의 못자리로 일구어지게 되었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을 가리켜 흔히 '숨은 꽃'(隱花) 또는 '민초'(民草)라고 표현한다. 또 그들의 신앙을 '민초의 노래' 또는 '민초의 눈물'이라고 한다. 야생의 풀씨와 같이 갖가지 고난을 헤치고 척박한 땅에서 뿌리를 내려왔음을 강조하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그렇게 살아 왔다. 일단 박해가 어느 한 지역에 휘몰아친 뒤에는 정든 거주지를 떠나야만 했고, 혹시라도 신자임이 발각될까 두려워 낯선 고장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다. 그러기에 구교우 집안치고 족보가 제대로 꾸며진 집안이 없고, 재산이 많아 거들먹거리며 살았다는 집안도 없다.
전국의 교우촌들을 돌아보면, 한결같이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또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이 많다. 교우촌의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하면 마을은 이름마저 없어지기 마련이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은 바로 이 '숨은 꽃'들에 의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왔다. 다행인 것은 박해의 바람이 강해질수록 복음의 씨앗은 민들레 씨앗처럼 더 멀리 흩어졌고, 숨은 꽃들은 순교의 영광으로 활짝 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순교자 현양에 관한 제언
순교자 현양은 초기 교회 때부터 이루어져 온 교회의 전통이었다. 초기 교회 때의 신자들은 순교자들이 고통과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함으로써 자신들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순교자 현양에 노력해야 하는 일반 신자들에게 필요한, 그리고 교회 차원에서 해야 할 몇 가지 제언을 해 두고 싶다.
첫째, 우리 고유의 것을 바로 알고, 가능하거나 필요한 경우 이를 현재에 되살려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고유한 전통의 회복'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교회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토착 문화와의 융화, 평신도들의 활동, 복음의 실천 과정에서 나타나는 서적 중심의 신앙 생활, 영성과 나눔의 생활 등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둘재, 순교자에 대해 알고 그들의 신앙 생활을 이어받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론이나 시청각 교육, 주일 학교에서의 가벼운 언급만으로는 안 된다. 이보다는 [은화](隱花)와 같은 순교 소설을 읽는 것이 더 도움이 되며, 순교시나 우리 고유의 천주가사, 순교자들의 행적 등을 정기적으로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교적 영성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신앙 실천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고유한 신심을 이어받는 생활 또한 개인 영성의 한 부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순교자들의 밤' 행사나 성지 순례를 통해 우리는 자주 기도와 묵상을 한다. 이때 한국 순교자에 대한 행적과 신심을 이야기하고, 개개인이 이를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더 없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넷째, 순교자의 삶을 이해하고 그 신심을 이어받는 일과 함께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이 실천은 또 다른 영성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나눔의 생활과 이웃 사랑 같은 육화론적 영성을 스스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다섯째,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철저히 조사하여 추측이나 가정으로 발생하는 역사적 오류를 남겨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순교자들의 유물이나 유해, 순교자들의 복음 전파 경로나 활동 지역, 관련 순교 사적지들을 잘 보존하고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겨 두는 일도 필요하다. 유물이나 유해는 남아 있지만 관련 기록이 없다면 그 가치를 잃어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성지 순례의 의미
교우촌과 성지, 그 신앙의 숨결을 찾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뒤에 숨겨 있는 사실들을 잘 알아야 한다. 깨끗하게 가꾸어진 성지를 찾아 순례하면서 그저 드러난 외양만을 보고 돌아온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례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지 순례가 순례자 현양과 신심 활동의 한 표현이라면, 오히려 그러한 순례는 숨은 꽃들의 신앙에 관한 오해를 낳을 뿐이다.
맨 처음에 잠깐 설명한 것처럼 성지 순례는 전통을 되찾는 일, 곧 '고유한 전통의 회복' 또는 '우리 것의 자리 매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신앙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순교자의 모범을 따르고, 이를 현양해 온 영성(spirituality)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도 하다. 순례하는 가운데 '복음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신앙 선조들이 남겨 놓은 극기와 희생 정신, 영성의 함양, 나눔의 실천 등을 이어받을 수 있으며, 이처럼 자발적으로 복음을 깨닫는 가운데서 고유한 전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성지와 사적지 중에서 순교자와 관련된 곳이 가장 관심을 끄는 것처럼 성지 순례는 자발적인 순교자 현양 운동의 가장 좋은 표현이 된다. 반면에 시복이나 시성 작업은 교회 차원에서 전개하는 제도적 측면에서의 순교자 현양 운동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신자 개개인의 자발적인 현양 운동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며, 그 둘이 합일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복·시성 운동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교회의 복자나 성인 칭호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의미를 담고 있다. 곧 '성스러운 성품(聖性)이나 순교의 덕행(信心)을 지닌 분을 교회에서 공적으로 공경해 부르는 칭호'인 것이다. 다만, 아무리 그 호칭이 숭고하다고 하더라도 그분을 공경하고 현양하는 마음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숭고함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 무한한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우리에게 세례명을 주고, 주보를 모시도록 하고, 성지와 사적지를 가꾸거나 순례를 권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 가지 덧붙여 말한다면, 한국 교회의 순교사와 순교 신심은 박해가 끝나면서 소멸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 당시에 보여 준 또 다른 순교자들의 태도는 이러한 신심이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알게 해 준다. 양양 본당의 제3대 주임이던 이광재(디모테오) 신부의 경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남하하는 성직자나 수도자들, 그리고 신학생·신자들을 도와 준 뒤 자신은 공산당의 박해로 순교하였으며, 평양교구장이던 홍용호(프란치스코) 주교 또한 "일어나 가자."(Surgite, eamus. / 마태 26,46)라는 자신의 좌우명대로 시련을 해치고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에게 희생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두려움 없이 어려움과 희생을 감수하고자 하는 순교자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
<차기진, 사목 256호(2000년 5월호), pp.115-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