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신유박해 역사신문 8호(1801년 11월)

2001. 12. 1. 오후 2:54:01

글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유중철, 문철 형제 교수형(1801년 11.14-20)

 

 

(사진설명) 1797년 10월 주문모 신부의 주선으로 혼인해 4년여간 동정으로 살아온 유중철 요한 - 이순이 루갈다 부부. <탁희성 화백 작>

 

이순이(20, 루갈다)와 1797년 10월 혼인해 4년 여간 동정부부로 살아온 유중철(23, 요한)이 동생 문철(요한)과 함께 11월14일 전주 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유중철은 순교하기 전, 부인인 이순이에게 "나는 누이를 권면하며 위로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의 유언이 담긴 편지를 써보냈다.

 

유중철, 문철 형제의 교수형은 지난 10월 24일 아버지 유항검(46, 아우구스티노)이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형을 받아 순교하자 역적의 일족을 멸하는 관례에 따라 11월11일 의금부가 이들 두 형제를 "즉각 교수형에 처하라"는 명에 따라 시행된 것.

 

의금부는 또한 같은 날 이순이와 유중성(마태오)를 비롯한 유항검 일가를 '벽동'으로 11월 18일까지 유배 보낼 것을 명해 귀양 조치됐다.

 

이순이와 유중성은 이에 항의해 18일 전주 감영으로 가 "우리는 하느님을 공경하였으니 모두 국법대로 죽어야 마땅하다"며 "순교를 원하니 귀양을 보내지 말고 처형해 줄 것"을 호소했다.

 

전주 감영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지로 모두 보냈다가, 이들이 40km쯤 갔을 때 다시 체포, 전주 감영으로 압송했다. 이에 이순이는 "하마터면 치명의 큰 은혜를 받지 못하고 평생 죄인으로 살 뻔하지 않았겠는가" 하며 크게 기뻐했다. 이순이를 비롯한 가족들은 감옥에 갇힌 다음날인 19일부터 몽둥이로 정강이를 맞는 등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순교자 유중철은 1779년 전주부 초남리에서 아버지 유항검과 어머니 신희 사이의 4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나 여섯 살 때 아버지로부터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유중철은 "성경직해", "성경광익", "칠극", "천주성교일과" 등 동정생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교회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일찍부터 동정 생활을 결심하고, 1795년 주문모 신부와 아버지 유항검에게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유중철의 고백을 들은 주문모 신부는 1797년 이순이가 동정생활을 하겠다며 도움을 청하자 '부부로 맺어 주어도 오누이처럼 지내며 틀림없이 동정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두 사람을 중매해 양가 부모의 허락을 얻고 혼인성사를 베풀었다.

 

유중철과 이순이는 결혼 후에도 부모들에게 동정 서약을 밝히고, "부모의 재산을 상속 받으면 네 몫으로 나누어 한 몫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 한 몫은 동생들에게 주고, 세월이 좋아져 마음 놓고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나머지 재산을 가지고 각자 따로 살기로 하자"고 합의하고 순교할 때까지 동정부부로 살았다.

 

<평화신문, 653호(2001년 11월 25일), 리길재 기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조정, 가짜 황사영 백서 급조

 

 

(사진설명) 황사영이 상복을 입고 백서를 작성하기 위해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탁희성 화백 작>

 

1801년 신유박해 전말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변명을 적은 진정서 "토사주문 (討邪奏文)"이 11월25일 작성됐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의 지시로 대제학 이만수가 작성한 "토사주문"은 12월초 동지사 겸 진주사로 청국에 파견되는 조윤대를 통해 청나라 황제에게 전해질 예정이다.

 

정순왕후가 토사주문 작성을 지시한 것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에 따른 청나라와의 외교마찰이 있을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

 

정순왕후는 의금부에 지시해 황사영이 그의 백서 사본을 청나라에 보내 주 신부의 처형 사실을 알렸는지를 집중 추궁토록 했으나 황사영이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청나라에 먼저 이 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얻기 위해 토사주문을 작성토록 했다.

 

토사주문은 "조선은 개국 이래 중국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유교를 높이 받들어 왔으나 수 십년 전부터 사학인 천주교가 널리 퍼져 그 폐해가 크므로 이에 사학을 금하고 그 주동이 되는 이승훈, 황사영을 처형했으며, 주문모는 조선 사람인 줄 알고 처형했으나 후에 청국인으로 밝혀져 이를 청국에 보고한다"고 적고 있다.

 

정순왕후는 또 이만수에게 지시해 가짜 '황사영 백서'를 만들 것을 지시하고, 조윤대에게는 이 가백서를 "토사주문"과 함께 가져가 청 황제에게 바칠 것을 지시했다.

 

대제학 이만수는 이에 1만 3384자로 작성된 황사영 백서 원문을 923자로 축소해 가짜 백서를 만들었다. 이 가백서는 당시 조정이 먼저 천주교를 박해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을 설명하고, 주문모 신부의 처형이 청나라에 알려져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위조됐다. 이 가백서에는 황사영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제안했던 △ 조선 감호책 △ 청의 종주권 발동 △ 대박청래 등과 같은 내용은 모두 삭제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평화신문, 653호(2001년 11월 25일), 리길재 기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천주교인 조사, 도태 요청 상소

 

 

황사영 '백서'와 '일록'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조정 대신들은 물론 양반 지식층 사이에서 천주교를 '반민족적 집단'으로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게 일고 있다.

 

황사영을 조사한 좌포장 임율과 우포장 신응주는 "서폭에 꽉 찬 흉악하고 참람한 글들 중에 세 조항의 흉언이 있는데 하나는 서양인들에게 청나라 황제를 꾀어 조선에 '청의 종주권'을 발동시켜 그들과 교역하게 함이었고, 또 하나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조선의 국왕을 청 황제의 부마로 삼을 것과 이를 위해 서양국 큰 선박 수백척에 군사 5~6만명을 태워 병기로 무장해 조선을 깜짝 놀라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천주교를 배척해온 공서파 홍희운과 신귀조는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에게 "흉모를 꾀한 황사영의 배후에는 정배 죄인 정약용과 정약전, 이치훈, 이학규, 신여권 등이 있다"며 "다시 국문을 열어 이들을 벌할 것"을 상소했다.

 

정순왕후는 이에 상소를 올린 홍희운을 동부승지에 임명하고, 죄인들을 유배지에서 소환해 문초한 후 정약전을 흑산도로, 정약용을 강진으로, 이치훈을 제주로 각각 유배시켰다.

 

정순왕후는 또한 "근래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여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심하다"며 대신들에게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하고 추국에 불참하는 대신들을 유배시킬 것"을 명했다.

 

정순왕후의 이같은 조치로 황사영과 정약용, 정약전 일행의 추국에 불참한 서유기가 임실로, 한흥유는 순안으로, 이유채는 강서로 유배됐다.

 

또 교리 박명섭과 이익운, 충청감사 윤광안 등이 '사학을 금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조사하여 도태시킬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평화신문, 653호(2001년 11월 25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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