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부활을 믿는가?’ 라는 질문은
‘우리는 무엇에 우리를 맡기고 살아가는가?’ 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부활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진시황제가 찾아 헤매던 불로장생의 약속이 아니며
고달픈 인생 역전의 드라마도 아니고,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숨겨둔 깜짝 선물도 아니다.
부활은 예수님에 대한 그리고 당신의 모든 자녀들에 대한
하느님의 가장 진실한 사랑의 표현이다.
부활을 통해 하느님은 예수님께
“너는 참으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사랑은 영원하다.”
고 말씀하셨고, 우리에게도
“너희는 참으로 내 사랑하는 자녀며, 내 사랑은 영원하다.”
고 약속하셨다. 부활은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새로운 삶의 차원이며 억압과 상처로 숨죽이며 살아가는
생명들을 살리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치유의 길이다.
부활은 우리 안에 살고자 원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며,
우리를 당신 안에 살게 하고픈 하느님의 초대다.
우리는 무엇에 우리를 맡기고 살아가는가?
우리 삶에 분명한 목표가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곁길로 벗어나 부수적인 것들에 골몰하고
허접스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운다.
사라져 없어져버리게 될 것들을 붙잡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몸과 마음에 영혼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 앞에서 떨게 한다.
죽음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두려워하는 소멸이기 때문이다.
부활이란, 하느님께 속한 것은 그 무엇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이다.
하느님께 속한 것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우리의 죽을 몸도 예외가 아니다.
부활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모습일까? 등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은 과연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해준다. 그 계시를 받은 우리는 모든 질문을
다 버리고 단순히 믿어야 한다. 그것은 공중 그네타기의 명수
로드레이가 캐처에게 양팔을 내밀어 맡기는 일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드리워진 그림자들 앞에서,
우리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느끼며,
삶의 길모퉁이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해질 때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시선을 향할 때
우리의 삶은 새로운 삶으로 일어난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를 맡기고 살아갈 때
영원한 것에 대한 희망이 생겨나며 영원한 삶도 시작된다.
영원한 삶은 죽은 다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가 하느님 안의 삶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다.
하느님의 사랑에 안기는 그 기쁨과 평화를 간절히 간구하고
그 사랑을 단 한 번만이라도 맛보고 나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삶으로 바뀐다. 영적인 삶은 영원한 것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삶,
내 삶의 중심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이 움직이는 삶이다.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에 우리를 온전히 맡길 수 있을 때,
죽음은 더 이상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마리아처럼 애절한 마음으로 이른 새벽에 그분을
찾아 나서기도 하고, 요한처럼 즉시 그분의 현존을 알아 치리기도
하고, 베드로처럼 느리지만 천천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생명을 얻고, 힘을 얻게 된다.
죽음처럼 모든 것이 끝장나버린 듯 한 삶의 질곡 속에서도,
빈 무덤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의 바닥에서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심지를 돋우고 오롯이 서있는 일이다.
하느님은 그 믿음의 심지에 당신 사랑의 불을 댕기신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불가해(不可解)한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생은 무의미하다.
(요한 바오로 2세, 인간의 구원자)
전주교구 천호 피정의 집
김영수 (헨리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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