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대금동
∎지리자표 : 황씨 문중 사당 옆 북위 37°45′52″ 동경 126°29′51″
∎연락처 : 강화 성당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5리 643) (032) 933-2282 FAX (032) 934-5622
∎미사시간 : 평일 : (월목) 오전 6:00, (수) 오전 10:00, (화, 금) 오후 7:30, (토) 오후 3:00, 5:00
주일 : 오전 6:00, 11:00, 오후 7:30
백서(帛書)의 주인공 황사영 알렉시오의 탄생지
1801년 신유박해의 상황을 적은 백서(帛書)의 주인공 황사영 알렉시오의 탄생지이자 소년 시절을 보낸 대금동 마을은 대대로 창원 황씨의 세도가 크게 떨치던 곳으로 말끔하게 단장돼 서있는 황씨 문중 사당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바로 그 문중 사당 옆에 황사영의 생가 터가 남아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사당 옆에 황사영의 생가는 흔적도 없고 다만 길게 자란 잡초와 갈대 사이로 약간의 공터만이 그 자취를 짐작케 해준다.
황사영은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돼 한림 학사로 있었다. 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 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활짝 열려 있던 출세길을 마다하고 주 신부를 도와 전교에 전력했으며 그와 함께 동숙하며 전교길에 올랐다.
그 후 10년 후인 1801년, 전국에는 신유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몰아친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이승훈, 정약종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순교한다. 황사영 역시 몸을 피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충북 배론에 있는 토굴에 몸을 숨긴다. 조정에서는 그를 서학의 주요 지도자로 간주했고 박해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김 대왕 대비는 특별히 그를 10일 내 시한부로 잡아들이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조선 교회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를 지켜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리던 황사영은 마침내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가로 38센티미터, 세로 62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깨알 같은 글씨로 한줄에 1백10여 자씩, 1백21행, 모두 1만 3천3백11자를 써서 교회에 대한 박해와 앞으로의 전교를 위한 근본 대책 등을 적었던 것이다. 이렇게 쓰여진 백서는 같은 해 10월 동지사 편으로 북경 주교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힌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 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헌(黃景憲)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의 묘는 서울교구인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 있다.
▒ 죽음으로 비밀의 문 열고 (황사영 생가터에서) <김영수> ▒
빈 터에는 햇살 가득 고여
향기 진한 바람소리 깊습니라
눈 밝은 소년 하나
대지 누르는 비바람을 뚫으며
죽음으로 비밀의 문 열고
겹겹 여울진 골짜기에다
새 숨결을 펴고 있습니다
어느 사랑인들 슬픔 아닐까만
또한 어느 슬픔인들 사랑 아닐까만
푸르게 예비된 하늘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뜨거운 노래입니다
내가 새로이 상처를 입어
목숨 뜨거워지는 기도 그리워하며
빈 터에다 얼굴 비춰봅니다
나는 다만
어느 고독에서 숨쉬는 것입니까
어느 침묵에서 깨어나는 것입니까
상한 갈대들 사이에서
둥지를 트는 바람들이나 새들의 아침은
더욱 빛나게 눈을 뜹니다
■ 순교자
◆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
황사영 알렉시오는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돼 한림 학사로 있었다. 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 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시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힌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 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헌(黃景憲)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의 묘는 서울교구인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 있다.
황사영 증거자의 세례명은 알렉시오
황사영 증거자의 세례명은 통상적으로 "알렉산델"로 알려져 있었으나, 교회사가들의 연구에 의하여 알렉시오임이 밝혀졌다.
리옹판 파리외방선교회 사목지 「Annales de la Proragation de la Foi」에서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가 황사영의 세례명을 "알렉시오"로 밝히는 등 여러 사료들에 의하여 입증된 바, 현재 황사영 증거자의 세례명은 "알렉시오"로 정정되었다. (의정부교구 주보 2004.11.14)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어떠한 시련에서도 주님을 외면하지 않는 신앙정신을 갖도록 빌어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