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의 염소가 좁은 산길을 가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위로 오르려 하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이 너무 좁아서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자리가 있을 뿐이었지요. 그리고 길옆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고요. 결국 두 마리는 도중에서 만나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 마리는 서로 바라보다가 꼿꼿이 서서 마치 한 판 싸움이라도 벌일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두 마리의 염소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두 마리의 염소 중의 한 마리가 길옆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한 마리만 무사히 그 길을 지나가던지, 아니면 싸우다가 두 마리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래쪽에서 올라가던 염소가 길 위에 누었거든요. 아래로 내려가던 염소는 그 등을 딛고 내려갔고, 그제야 누운 염소는 일어나서 제 길로 올라갔습니다.
싸움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싸워서 힘들게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낮춤으로 인해 더 쉽게 쟁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힘없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그것도 가장 초라한 마구간의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들이 만든 법칙인 정결례를 따르는 모습까지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힘이 없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힘으로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사랑’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낮추는 하느님의 사랑에 시메온 예언자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제가 신학생 때 가장 존경했던 영성지도 신부님이 계십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신부님의 영성지도 방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영성면담을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도무지 말씀을 안 하세요. 말씀 좀 하셔서 제가 올바른 영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으면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저 혼자만 말을 하게 합니다. 당시 저는 신부님의 이 모습을 직무유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지요. 사실 말로 지도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없거든요. 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올바르게 인도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말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들어만 주실 뿐이었던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말을 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데 있다는 것. 즉 사랑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낮추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내 자신을 계속 낮추어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주님의 사랑이 뿌리 내릴 수 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두 마리의 염소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두 마리의 염소 중의 한 마리가 길옆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한 마리만 무사히 그 길을 지나가던지, 아니면 싸우다가 두 마리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래쪽에서 올라가던 염소가 길 위에 누었거든요. 아래로 내려가던 염소는 그 등을 딛고 내려갔고, 그제야 누운 염소는 일어나서 제 길로 올라갔습니다.
싸움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싸워서 힘들게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낮춤으로 인해 더 쉽게 쟁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힘없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그것도 가장 초라한 마구간의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들이 만든 법칙인 정결례를 따르는 모습까지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힘이 없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힘으로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사랑’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낮추는 하느님의 사랑에 시메온 예언자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제가 신학생 때 가장 존경했던 영성지도 신부님이 계십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신부님의 영성지도 방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영성면담을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도무지 말씀을 안 하세요. 말씀 좀 하셔서 제가 올바른 영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으면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저 혼자만 말을 하게 합니다. 당시 저는 신부님의 이 모습을 직무유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지요. 사실 말로 지도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없거든요. 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올바르게 인도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말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들어만 주실 뿐이었던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말을 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데 있다는 것. 즉 사랑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낮추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내 자신을 계속 낮추어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주님의 사랑이 뿌리 내릴 수 있습니다.
말하기보다는 들어주세요.
비워야 채워지는삶(‘좋은 글’ 중에서)
예전엔 몰랐습니다.
비워야 채워지는 삶을 어제보다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려고 발버둥만 치는 삶이었습니다.
항상 내일을 보며 살았으니까요
오늘은 늘 욕심으로 채워 항상 욕구불만에
남보다 더 갖고 싶은 생각에 나보다 못가진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깨닫습니다.
가득 차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현실을..
이제 마음을 비웠습니다.
또 욕심이 찬다면 멀리 갖다가 버리겠습니다.
무엇이 필요 하다면 조금만 갖겠습니다.
그리고 나누겠습니다.
가식과 허영을 보며 웃음도 지어보이겠습니다.
내 안의 가득 찬 욕심을 버리니 세상이 넓어 보이고
내가 쥔 게 없으니 지킬 걱정도 없어 행복합니다.
예전에 헌 자전거를 두고 새 자전거를 사서
잃어버릴까 걱정하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마음하나 비우면 세상이 달라지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비워야 채워지는 삶을 어제보다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려고 발버둥만 치는 삶이었습니다.
항상 내일을 보며 살았으니까요
오늘은 늘 욕심으로 채워 항상 욕구불만에
남보다 더 갖고 싶은 생각에 나보다 못가진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깨닫습니다.
가득 차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현실을..
이제 마음을 비웠습니다.
또 욕심이 찬다면 멀리 갖다가 버리겠습니다.
무엇이 필요 하다면 조금만 갖겠습니다.
그리고 나누겠습니다.
가식과 허영을 보며 웃음도 지어보이겠습니다.
내 안의 가득 찬 욕심을 버리니 세상이 넓어 보이고
내가 쥔 게 없으니 지킬 걱정도 없어 행복합니다.
예전에 헌 자전거를 두고 새 자전거를 사서
잃어버릴까 걱정하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마음하나 비우면 세상이 달라지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