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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각의 실체는 온 세계와 같고, 신의 거울 또는 자신이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우주 전체의 거울과도 같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마을이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서로 다른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표상되는 것과 흡사하다. 이렇게 해서 우주는 실체가 있는 만큼이나 어떠한 방식으로 다양화되고, 신의 영광은 그의 작품에 대한 완전히 서로 다른 표상들을 통해 그만큼 배가된다. 모든 실체는 신의 무한한 지혜와 완전한 역량의 특징을 어떠한 방식에 따라 보유하고, 할 수 있는만큼 신을 모방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체는, 비록 모호하게나마, 과거, 현재, 미래의 우주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 (라이프니츠, 형이상학 서설, IX)
라이프니츠의 텍스트에는 본다는 행위가 자주 등장한다. 플라톤 이래로 서양 철학에서 시각에 대한 특별한 지위 부여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라이프니츠에게서 특별한 것은, 그것이 진리의 객관성에 도달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 세계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은유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각자 다른 위치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그것들 간의 차이는 새로 해소될 수 없는 실재성을 갖는데, 왜냐하면 하나의 마을을 보는데 지각의 차이가 별 것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특권적인 위치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계에는 왜 이렇게 많고 다양한 실체가 존재하는가 ? 라이프니츠가 다른 곳에서 암시한 바에 따르면, 신은 세계를 볼 수 있는 각각의 시선점마다 실체를 위치시키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의 욕망 같은 것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미니홈피와 블로그마다 넘쳐나는 사진-이미지에 담겨 있는 욕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진의 공유란 서로 다른 시선점, 내가 경험했던 시선점을 타인에게 체험할 기회를 제공 또는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세계는 신의 블로그질에서 태어났다는 점과 요즘은 사람들이 신의 그 재미를 만끽하고 있다는 점이다.
라이프니츠의 텍스트에는 본다는 행위가 자주 등장한다. 플라톤 이래로 서양 철학에서 시각에 대한 특별한 지위 부여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라이프니츠에게서 특별한 것은, 그것이 진리의 객관성에 도달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 세계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은유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각자 다른 위치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그것들 간의 차이는 새로 해소될 수 없는 실재성을 갖는데, 왜냐하면 하나의 마을을 보는데 지각의 차이가 별 것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특권적인 위치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계에는 왜 이렇게 많고 다양한 실체가 존재하는가 ? 라이프니츠가 다른 곳에서 암시한 바에 따르면, 신은 세계를 볼 수 있는 각각의 시선점마다 실체를 위치시키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의 욕망 같은 것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미니홈피와 블로그마다 넘쳐나는 사진-이미지에 담겨 있는 욕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진의 공유란 서로 다른 시선점, 내가 경험했던 시선점을 타인에게 체험할 기회를 제공 또는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세계는 신의 블로그질에서 태어났다는 점과 요즘은 사람들이 신의 그 재미를 만끽하고 있다는 점이다.
철학 ; 라이프니츠
합리론자 중에서도 라이프니츠의 접근 방식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에 비해서 합리주의적인 측면이 훨씬 약하기 때문에, 철학사가들은 칸트의 도식에 맞춰서 그를 해석해 내는 데 언제나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 직업적인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리학을 철학의 중심 논제로 보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사람들은 라이프니츠 사상에서도 형식 논리학에 관한 저작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그의 논리학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접근도 여러 가지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남겼고, 주석가들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저작에 들어 있는 다수의 기상천외한 표현들 때문에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