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부 · 순교자
복자 알폰소 나바레테
(Alphonsus Navarrete)
알론소 · 알폰수스 · 알퐁소 · 알퐁수스 · 나바레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1일 목록에서 일본의 오무라에서 도미니코 수도회의 복자 알폰소 나바레테(Alphonsus/Alfonso Navarrete) 신부와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복자 페르디난도 아얄라(Ferdinandus Ayala) 신부, 예수회의 레오 타나카(Leo Tanaka) 수도자가 최고 통치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증오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이름을 새로 추가하였다.
그들은 모두 1867년 7월 7일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 알폰소 나바레테와 그의 동료 204위, 1617년에서 1632년 사이 일본에서 순교한 사람들’이란 명칭으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되었고, 보통 ‘일본의 205위 순교복자들’로 불린다.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2월 6일)와 25위의 동료가 순교한 이후 일본에 남은 선교사들은 모두 일본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30여 명의 사제는 교우들을 위해 남아서 숨어지냈다.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한 후 박해가 잠잠해지면서 예수회를 비롯해 선교사들의 활동이 재개되어 1612년까지 평화롭게 지내며 교회 또한 크게 성장하였다. 1612년 몇몇 지방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막부 시절에 모든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를 파괴하거나 폐쇄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금지하는 칙령이 반포되면서 박해는 더욱 광범위해졌다.
그로 인해 수천 명이 순교하면서 많은 가톨릭 신자가 지하로 숨어들어 메이지 유신 이후 1873년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기까지 은밀히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카쿠레 키리시탄’(숨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생겼고, 오늘날까지 일부 지역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전통과 신앙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복자 알폰수스 나바레테(또는 알폰소 나바레테)는 1571년 9월 21일 에스파냐 북부 카스티야(Castilla) 지방의 로그로뇨(Logrono)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으로 추정되는 그는 어린 나이에 상속권을 포기하고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산 파올로(San Paolo) 수도원에서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살라망카(Salamanca)의 산 에스테반(San Esteban) 수도원에서 학업을 마친 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598년 동아시아 선교사로서 필리핀의 마닐라(Manila)로 파견되었다.
그가 동아시아 선교의 거점인 마닐라로 파견되었을 때는 1597년 2월 5일 일본의 나가사키(Nagasaki)에서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2월 6일)와 25위의 동료가 순교한 지 불과 1년이 지난 후였다.
그는 필리핀의 여러 섬을 다니며 열정적으로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건강을 해쳐 1602년 관구장의 명으로 바야돌리드로 되돌아와야 했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그는 1609년 로마(Roma)로 가서 총장에게 자신과 함께 필리핀으로 갈 수도자를 모집할 허락을 받았다. 1610년 유럽 여러 나라에서 성공적으로 선교사 모집 임무를 수행한 그는 1611년 동아시아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 선교를 자원해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그는 일본어와 문화를 배우며 그리 길지 않은 평화 시기에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점점 박해의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일본에서 6년의 선교 활동 중에 복자 알폰소 나바레테가 가장 열정적으로 했던 것은 일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을 위한 사회사업이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회와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보호소를 설립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이를 위해 부유한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구걸하면서 ‘일본의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 9월 27일)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는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며 설교하는 데도 힘썼고, 어느 시점에 일본 도미니코 수도회의 관구장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동시에 제3회, 묵주기도 형제회와 같은 도미니코 수도회의 평신도 조직까지 돌보게 되었다. 1614년 일본에서 선교사 추방령과 함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해졌을 때, 그는 외국으로 나가지 않고 일본에 남아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다.
그는 박해가 심해지는 나가사키를 피해 오무라 지역으로 가서 은밀히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일본에서 두 번째 대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첫 출발은 1617년 5월 22일 나가사키 근처 오무라 다이묘(大帝)의 근거지인 쿠시마 성(玖島城, Kushima) 인근 코리(Kori) 지역에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소속 승천의 복자 베드로(Petrus of the Assumption) 신부와 예수회의 요한 세례자 마차도(Joannes Baptista Machado) 신부가 참수당한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을 들은 복자 알폰소 나바레테는 목숨을 걸고 오무라로 가서 두 선교사의 유해를 수습하고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동요하는 신자들을 격려하고자 했다.
그의 이 원대한 계획을 들은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복자 페르디난도 아얄라 신부는 기꺼이 그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걷기로 했다.
두 용감한 선교 사제가 나가사키를 떠나 오무라로 향하자 인근 지역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들을 찾아와 고해성사를 요청했다.
그 여정에 예수회의 수도자 또는 교리교사인 복자 레오 타나카도 함께 했다.
그들은 오무라에 도착해 먼저 두 순교자의 무덤을 찾아 기도하고, 동요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3년 전에 벗었던 수도복도 다시 입었다.
신자들이 운집하는데 격분한 오무라의 영주는 병사들을 시켜 그들을 체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지역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많아 폭동을 두려워한 나머지 복자 알폰소 나바레테 신부 일행을 배에 태워 무인도에서 처형하기로 했다.
결국 그들은 6월 1일 오무라 인근의 여러 섬을 돌다가 인적이 없는 섬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복자 알폰소 나바레테는 한 손에는 묵주를, 다른 한 손에는 나무 십자가를 든 채 순교했다고 한다.
처형 후 그들의 시신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찾을 수 없도록 돌과 함께 바다에 던져졌다.
일본의 205위 순교복자들은 개별적으로 순교한 날에 각자의 기념일을 지내지만, 일본 교회는 특별히 52명의 순교복자가 탄생한 9월 10일을 ‘일본의 205위 순교복자’를 함께 기념하는 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편 도미니코 수도회에서는 11월 6일에 일본에서 순교한 59위 순교자를 함께 기념하고 있다.♣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