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부 · 순교자
복자 토마스 주마라가
(Thomas Zumarraga)
도마 · 성령의 · 수마라가 · 에스피리투 산토 · 토머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2일 목록에서 일본의 오무라에서 작은 형제회의 복자 아폴리나리스 프랑코(Apollinaris Franco) 신부와 도미니코 수도회의 복자 토마스 주마라가(Thomas Zumarraga) 신부가 네 명의 동료와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증오로 인해 투옥된 뒤 화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이름을 새로 추가하였다.
네 명의 동료 순교자는 작은 형제회의 수도자인 성 보나벤투라의 복자 프란치스코(Franciscus of St. Bonaventure, 일본 관동 지방 무사시 출생)와 성녀 클라라의 복자 베드로(Petrus of St. Clare, 일본인), 그리고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도자인 복자 도미니코 마고시치(Dominicus Magoshichi, 일본인)와 성 토마스의 복자 마태오(Matthaeus of St. Thomas, 또는 만치오 Mancius of St. Thomas, 1600년경 일본 히고 지방 출생)이다.
그들은 모두 1867년 7월 7일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 알폰소 나바레테(Alphonsus/Alfonso Navarrete)와 그의 동료 204위, 1617년에서 1632년 사이 일본에서 순교한 사람들’이란 명칭으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되었고, 보통 ‘일본의 205위 순교복자들’로 불린다.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2월 6일)와 25위의 동료가 순교한 이후 일본에 남은 선교사들은 모두 일본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30여 명의 사제는 교우들을 위해 남아서 숨어지냈다.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한 후 박해가 잠잠해지면서 예수회를 비롯해 선교사들의 활동이 재개되어 1612년까지 평화롭게 지내며 교회 또한 크게 성장하였다. 1612년 몇몇 지방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막부 시절에 모든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를 파괴하거나 폐쇄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금지하는 칙령이 반포되면서 박해는 더욱 광범위해졌다.
그로 인해 수천 명이 순교하면서 많은 가톨릭 신자가 지하로 숨어들어 메이지 유신 이후 1873년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기까지 은밀히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카쿠레 키리시탄’(숨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생겼고, 오늘날까지 일부 지역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전통과 신앙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복자 토마스 주마라가는 1577년 3월 9일 에스파냐 북부 바스크(Basque) 지방의 비토리아(Vitoria)에서 태어났다.
그는 1594년 10대의 나이에 고향에서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고, 살라망카(Salamanca)의 산 에스테반(San Esteban) 수도원에 들어가서 성령의 토마스(Tomas del Espiritu Santo/Thomas of the Holy Spirit)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리고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산 그레고리오 대학(San Gregorio)에서 학업을 이어간 후 1600년경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동아시아 지역 선교를 자원한 그는 1601년 에스파냐를 떠나서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해 1602년 필리핀의 마닐라(Manila)에 도착했다.
그가 마닐라에 있는 동안 도미니코 수도회는 일본에 진출해 선교 기지를 설립하려는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그는 마닐라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수도원의 원장인 복자 프란치스코 모랄레스 (Francis Morales, 9월 10일) 신부를 단장으로 일본으로 출발하는 다섯 명의 첫 선교단의 일원으로 자원했다.
일본에 도착한 후 복자 토마스 주마라가는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배운 후 주로 규슈(九州, Kyushu) 지역에서 선교 활동에 헌신했다. 1605년에 그는 도미니코 수도회 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오늘날의 교토(京都, Kyoto) 지방인 수도 미야코(宮古, Miyako)로 파견되었다.
그는 미야코에 묵주기도의 성모 수도원을 중심으로 지역 그리스도인을 위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1613년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면서 이듬해 선교사에 대한 강제 추방령과 그리스도교를 금지하는 칙령이 반포되었다.
이때 그는 일본에 남아 은밀히 선교 활동을 이어가며 공동체를 돌보는 책임을 맡았다. 1615년에 그는 미야코에 선교사와 교리교사를 위한 작은 숙소를 마련하고 비밀리에 성사를 집전하며 교리교육을 했다. 1617년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그는 오무라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박해로 시달리는 많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있었다.
그해 6월 1일에 일본 도미니코 수도회의 관구장인 복자 알폰소 나바레테 신부와 몇몇 동료가 오무라에서 순교했지만, 그는 나가사키와 오무라 지역의 산에 숨어서 사제와 신자들을 계속 돌보았다.
하지만 결국은 그해 7월 23일 체포되어 오무라 인근 스즈타(Suzuta) 감옥으로 끌려갔다.
스즈타 감옥은 새장처럼 기둥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벽도 지붕도 없는 곳이었다.
바닷가의 매서운 비바람과 뜨거운 햇볕, 겨울의 추위와 눈발에 그대로 노출된 극도로 열악한 좁은 감옥에 수십 명이 갇혀 누울 수조차 없었다.
계속해 사제와 수도자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오면서 좁은 감옥은 어느새 수도 공동체처럼 변화되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신앙교육을 실천했다.
그러면서 교리교사나 신심 단체 활동을 하다 체포된 몇몇 평신도들은 감옥 안에서 수도회에 입회해 수도 생활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렇게 5년 정도의 감옥생활 끝에 1622년 9월 12일 복자 토마스 주마라가와 동료 수도자들의 처형이 결정되어 오무라 지역의 처형장으로 이송되었다.
불과 이틀 전인 9월 10일,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에서 예수회의 복자 세바스티아노 기무라(Sebastianus Kimura) 신부와 도미니코 수도회의 복자 프란치스코 모랄레스(Franciscus Morales) 신부 그리고 동료 수도자와 신자 50명이 화형과 참수형으로 순교한 뒤였다.
복자 토마스 주마라가와 동료 수도자들은 산 채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일본의 205위 순교복자들은 개별적으로 순교한 날에 각자의 기념일을 지내지만, 일본 교회는 특별히 52명의 순교복자가 탄생한 9월 10일을 ‘일본의 205위 순교복자’를 함께 기념하는 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편 도미니코 수도회에서는 11월 6일에 일본에서 순교한 59위 순교자를 함께 기념하고 있다.♣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