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성서 모임. (11월 12일 저녁 7시 사제관): 가나안 스켐 땅에서 일어난 일.

박상훈

2010. 11. 11. 오후 6:01:44

창세기 33:18-34: 31. 가나안 스켐 땅에서 일어난 일.
이 부분은 이전 이야기와는 큰 연관이 없는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우리가 생각해 볼만한 한 가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현실은 여러 갈등과 긴장으로 가득합니다. 그 속에서 신앙 공동체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요?  
우선 여기선 이방인의 땅에서 야곱과 그의 가족이 겪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주류인 새로운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주류 사회에 위치 시키는가가 새로운 문제 입니다. 적응과 저항, 두 흐름이 긴장을 이루며 생존과 신앙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누가 적응하려 하고 누가 저항하는지는 아주 분명하지요.
가나안 땅에 이주해서 야곱은 먼저 땅을 구입하고 거주할 천막을 치고 제단을 세웁니다, 내러티브의 위기는 그곳 족장의 아들 스켐 (야곱이 정착한 가나안의 지역 이름이기도 하고 사람 이름 이기도 합니다)이 야곱의 딸 디나를 사랑한 나머지 강제로 겁탈을 하면서 시작합니다.
본문은 스켐의 행위를 두고, 디나를 “더럽혔다 (defile)”고 표현하는데, 이건 단지 겁탈당한 누이에 대한 형제들의 분노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단어는 “제의적인 정결”과 연관이 있어요. 텍스트는 “제의적인 정결”의 이슈를 “올바름”과 “그릇됨”의 문제와 결부 시킴으로써, 제의적인 정결의 문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습니다. 
디나의 겁탈 사건은 섹슈얼리티와 제의적인 정결이 연관 된다는 것을 알려 주긴 하지만, 디나의 겁탈 보다는 “제의적인 불결함”이 더욱 더 문제가 되고 강력합니다. 이 “제의적 불결함”의 이미지가 이스라엘 (즉, 야곱의 아들들)을 더 분노하게 만듭니다. 34:7에서는 스켐이 “이스라엘에게 추잡한(folly) 일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컨데, 한국 사회 (아니면 미국 사회에서도)에서 “공산주의”는 그 정치적 실체와 상관 없이 이미지 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 감정적 분노의 효과를 줍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와 야곱 이야기에서 “추한 일”이란 이미지는 거의 같습니다.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 족장은 이 문제를 이스라엘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 봅니다. 하모르는 아들이 디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결혼을 제안하고 이 사건을 협력의 기회로 여기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이 사건에 대한 가혹한 판단을 내린 상태이고, 스켐의 행위를 도착 증상 이외에 아무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기만과 복수입니다. 하모르의 호의는 이스라엘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은 치밀하게 복수를 계획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에게 할례 받는 것을 조건으로 디나를 결혼 시키기로 합니다. 물론 이건 함정입니다.
하모르의 태도가 흥미롭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경제적인 이익이 있는 한, 할례와 같은 종교적 제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가나안 남자들이 할례로 아직 움직이지 못할 때 이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약탈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이 사건의 마무리일까요? 야곱의 아들들의 행위는 사실상 이스라엘 신앙의 전망과 무관합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우선 이들은 협력이나 적응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사회적 공생, 조화로운 공동체, 심지어 경제적 이익도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이들의 동기는 오직 복수하려는 욕망에서 나옵니다.
또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의적 삶의 가장 중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인 할례를 심각하게 왜곡합니다. 할례를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통제와 착취의 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신의의 (하느님과의) 표현이 비인간성과 폭력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텍스트는 “추잡한,” “수치스러운,” “더러운” 등의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공동체에 대해 지닌 정열이 사실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정념이었음을 폭로합니다. 따라서 신앙을 가장한 이들의 복수심은 단지 자신들의 욕망과 이익에만 복무할 뿐 입니다.
한국에서 북한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극우 언론이나, 어버이 전국 연합인지 뭔지 하는 수구 단체 등등을 생각해 보세요. 야곱의 아들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희망사항: 지난 주에 정원 자매님과 주희씨가 제기한 성서 안의 폭력의 문제가 쪼금 설명 되었기를 바랍니다. 무척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복잡한 문제인 거 같습니다. 더 얘기해 보지요.]
마지막 부분 34: 30에 가서야 야곱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야곱은 이스라엘 신앙의 성숙과 경륜의 목소리를 대표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소수이며 주변부라는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지요. 그래서 현실에 대면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왜곡해서 이스라엘을 위험으로 몰고 가는 아들들의 유치한 종교관을 반박합니다.
야곱의 말: “너희들이 나를 흉칙한(folly) 인간으로 만들어 나를 불행에 빠뜨리는구나” (34: 30).
물론 야곱의 태도가 뭐 그리 위대한 신앙의 모범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는 적어도 냉철하고 사려 깊은 프래그머티스트 입니다. 평생을 집도 없이 고향에도 못 가며 방랑했던 야곱에게 다른 삶의 대안이 있었을까요?
그러나 아들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좁은 섹슈얼리티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우리 누이가 창녀처럼 다루어져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34:31).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위험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타인들과의 협력의 가능성에도 무지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무 결말 없이 끝납니다. 아들들의 공격에도 야곱은 침묵합니다. 아무것도 풀린 게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 본 이야기에는 민족적 열정, 종교적 동기 부여, 경제적 이익, 이방인(타자)들과의 공생, 등등의 문제가 얽혀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 공동체는 “신앙”을 놓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선택은 물론 갈등과 모호함, 한 가운데 있습니다.
특히 오늘 이야기에선 종교적 열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가 문제가 됩니다. 본문이 아무 결말 없이 끝나는 것으로 봐서, 제 추측엔 가나안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은 야곱의 실용주의가 아니라 아들들의 전투주의, 맹목주의가 역사적으로 지배적이었다는 걸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론, 바로 그 암시 때문에 이 텍스트가 가나안 정착은 사실은 야곱의 실용주의에 기초했어야 했다는 반성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서 본문은 이스라엘의 정복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서 본문은 이런 문제들을 다루어야만 하는 신앙 공동체의 “부담”을 그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삶의 과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역사 안에서 야곱의 아들들과 같은 태도는 종교적 맹목과 동물적 욕망의 복합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태도는 야곱과 같은 냉철한 실용주의나 구약 예언자들의 대안적 공동체를 염두에 둔 지배 세력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언제나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신앙은 이 긴장 안에서 살아야 하고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 공동체는 현실의 이런 긴장에 열정적으로, 실천적으로, 그리고 신실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예컨데, 자본의 폭력적인 욕망에 대해 신앙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나요?
[이번 시간엔 요셉 이야기입니다. 일단 37장부터 41장까지 읽으세요. 가능하면 내용에 따라 단락 나누기 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