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인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 데 마스

과부 · 설립자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 데 마스

(Joaquina de Vedruna de Mas)

조아퀴나 · 조아키나 · 호아키나

8월 28일🕰 1783-1854년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는 1783년 4월 16일 에스파냐 카탈루냐(Cataluna) 지방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그 도시의 고위 관료이자 귀족인 로렌소 데 베드루나(Lorenzo de Vedruna)와 테레사 비달(Teresa Vidal) 부부의 여덟 자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당시 관습대로 가정교사를 통해 자녀를 교육하는 대신 직접 가르치며 자녀들에게 훌륭한 가톨릭 신앙을 심어주었다.

어려서부터 신심 깊었던 그녀는 9살이 된 1792년에 첫영성체를 했고, 1795년 12살밖에 안 된 나이에 바르셀로나의 봉쇄 수도원인 가르멜회에 들어가 수녀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입회할 수가 없었다.

그 뒤에 그녀는 부모의 권고에 순명해 1799년 3월 24일 16살의 나이에 변호사이자 지주였던 테오도로 데 마스(Teodoro de Mas)와 결혼하였다.

그녀의 남편이 된 테오도로 데 마스 또한 수도 생활에 대한 강한 소명은 느끼고 있었지만, 장남으로 귀족 가문의 상속자라는 이유로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만들어갔다.

그들의 하루는 아침에 함께 성당 가는 것으로 시작해서 저녁에 묵주기도로써 마무리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고, 나폴레옹이 에스파냐를 점령했을 때 이에 저항하기 위해 테오도로는 군대에 입대했다.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 데 마스는 자녀들과 함께 피난 생활을 하며 자녀들을 돌봤는데, 그사이에 세 명의 아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다.

하지만 늘 자녀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훌륭한 부모의 본보기를 통해 사랑과 덕행을 실천하도록 자녀들을 양육했다.

전쟁이 끝나고 남편도 돌아왔으나 건강이 매우 악화한 상태였다.

결국 1816년에 3월 6일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33살의 나이에 과부가 된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 데 마스는 바르셀로나에서 남편에게 상속받은 영지인 만소 에스코리알(Manso Escorial)이 있는 비크(Vic)로 가서 자녀들을 돌보며 성덕을 쌓는 생활을 시작했다.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 데 마스는 헌신적으로 자녀들을 돌보며 기도 생활과 지역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고, 1817년에 작은 형제회의 제3회원이 되어 수도복을 입고 참회와 청빈의 삶을 실천했다.

그녀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매료되어 다양한 환경 속에서 복음을 훌륭히 실천하며 자선 활동에 전념했다.

그녀의 자녀 중 네 명의 딸은 수녀원에 들어갔고, 두 아들은 결혼하고 세 명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자녀들의 잘 자라 독립하게 되자 그녀는 남은 생애를 오랫동안 염원했던 수도 생활에 헌신하고자 했다.

그녀의 영적 지도자인 카푸친회의 에스테반 데 올로트(Esteban de Olot) 신부는 기존의 수도회에 입회하기보다는 소녀들의 교육과 병자들을 돌보는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래서 1826년 1월 6일, 43살의 나이에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 데 마스는 비크의 주교 앞에서 서원을 발했고, 주교의 도움으로 가르멜회 정신에 입각한 수도 규칙을 작성한 후 그해 2월 26일 8명의 지원자가 서원하면서 가르멜 자선 수녀회(Institutum Sororum Carmelitarum a Caritate, C.C.V.)가 비로소 설립되었다.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 데 마스가 설립한 수도회는 물질적 가난과 에스파냐 내전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카탈루냐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수도회의 설립을 지원하고 역설한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Antonius Maria Claret, 10월 24일)의 지지에 힘입어 가르멜 자선 수녀회는 더욱 크게 발전하였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왕위계승권을 두고 벌어진 ‘제1차 카를로스파 전쟁’(Carlist Wars, 1833~1840년)이란 내전 중에 양측 모두에게 병원과 간호를 제공하면서 체포되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1835년 다른 수녀들과 함께 프랑스 남부의 페르피냥(Perpignan)으로 망명해야 했고, 1843년 가을에야 에스파냐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와 다른 나이 많은 수녀들은 1844년 초에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의 도움으로 종신서원을 했다.

그 후 정치적인 불안정 속에서도 22개의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고 에스파냐 전역과 라틴 아메리카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녀는 184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생애의 마지막 4년 정도를 마비 증세로 고생하며 점점 쇠약해졌다.

그녀는 1851년 수녀회의 책임자 지위를 내려놓고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기도에 전념하다가 1854년 8월 28일, 71살의 나이에 당시 바르셀로나를 휩쓸던 콜레라 전염병에 걸려 선종하였다.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 데 마스의 영웅적인 덕행이 확인되면서 시복 절차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1940년 5월 19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9년 4월 12일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성 요한 23세는 시성식 다음 날 로마의 순례자들에게 한 연설에서 그녀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실마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한 한 줄기 빛이 그녀를 인도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며 “하느님은 백 배로 갚아 주십니다.

은총을 얻고 싶다면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한 그녀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8일 목록에서 에스파냐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가 어머니로서 아홉 자녀를 경건하게 교육했고, 남편과 사별한 후에는 가르멜 자선 수녀회를 설립했으며, 온갖 고난을 고요히 견뎌낸 후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다.

가르멜회에서는 8월 28일이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의무 기념일이기에 5월 22일 전례에서 그녀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