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장 · 순교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崔京煥 Francis)
방지거 · 최 프란치스코 · 최프란치스코 · 프란체스꼬 · 프란체스꾸스 · 프란체스코 · 프란체스쿠스 · 프란치스꼬 · 프란치스꾸스 · 프란치스쿠스 · 프랜시스
성 최경환 프란치스쿠스(崔京煥 Franciscus, 또는 프란치스코)는 두 번째 방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신부의 부친으로 1804년에 충청도 홍주군 다래골의 새터(현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최인주(崔仁柱)와 경주 이씨(李氏)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의 계명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조부인 최한일(崔漢駝) 때였고, 서울에서 지금의 청양 땅으로 이주한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시련을 겪은 부친 최인주가 모친을 모시고 낙향하면서부터였다.
최경환은 새터에서 성장하여 14세 때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李存昌, Ludovicus Gonzaga)의 조카뻘 되는 복녀 이성례 마리아(李聖禮 Maria)를 아내로 맞이한 후 1821년에 장남 최양업 토마스를 얻었다.
그는 원래 성질이 괄괄해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신앙의 힘으로 큰 노력을 기울인 결과 사람들은 그가 본래 성질이 온순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미신에 빠진 주위 사람들 속에서는 참된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동네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사를 하자마자 외교인과의 송사 문제로 가산을 탕진하게 되어 가족을 이끌고 다시 산골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생활하다가 마지막으로 1838년에 자리 잡은 곳이 과천 고을의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 9동) 교우촌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 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시사(哀矜施捨)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 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 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이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수리산에 정착한 지 1년 만에 모방 베드로(Maubant Petrus, 羅) 신부에 의해 공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수리산 신자들과 함께 상경하여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 정성껏 안장해주었다.
그리고 수리산으로 내려와서는 신자들을 권면하며 집안사람들에게 순교를 준비시키며 성패와 성물 등을 감추었으나 서적만은 숨기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들을 모두 감추는데 왜 이 책들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가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더냐? 군사가 전쟁에 대비하여 미리 병법서를 읽는 법인데, 하물며 천주교 박해라는 영적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몸으로 어찌 성경 말씀을 더욱 열심히 읽고 묵상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한다. 1839년 7월의 어느 날 밤, 한양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고, 그의 이러한 태도에 포졸들은 안심하고 그날 밤 누워서 잠을 잤다.
해 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한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가족은 물론이고 수리산 교우촌의 교우들 60명 중 약 40명과 함께 자진해서 포졸들을 따라갔다.
최경환 회장과 남자 교우들과 큰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갔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인해 빨리 걷지도 못하고 어린아이들은 지쳐서 울부짖었다.
행인 중에는 그들을 보며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었고 한편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형제들이여, 힘을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갖고 우리의 발걸음을 재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 하며 격려하였다.
최경환 일행은 50리 길을 걸어서 서울 포도청 옥에 도착해 밤을 지샜다.
포도청 옥에 갇힌 다음 날부터 문초가 시작되었다.
포장은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불러 문초하며 주리를 틀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며 배교한다고 말할 때까지 계속 고문하도록 했다.
그가 신자들을 대표하는 회장이고 아들 가운데 하나가 신학생으로서 나라 밖으로 공부하러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포장은 분이 치밀어 더욱 혹독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모두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40도와 곤장 110도를 맞으면서도 “천지 만물의 대주재(大主宰)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배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굳게 신앙을 지켰다.
다른 많은 교우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 이성례 마리아와 이 에메렌시아라는 여교우뿐이었다.
그 후 9월 11일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마지막으로 포장 앞으로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았는데, 그것이 그의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자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聖意)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서울 좌포청 옥중에서 순교한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노고산에 우선 매장했다가 수리산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1925년 최경환이 포함된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 79위에 대한 시복식이 이루어진 후 서울교구는 1929년 6월에 수리산 뒤뜸이에 묻혀있던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무덤을 찾아서 1930년 5월 26일 발굴한 후 명동 주교관으로 이장하였다.
이때 그의 무덤 위치를 정확히 알려준 이는 최경환 성인의 다섯째 자부(子婦)인 송 아가타로 당시 92세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명동 주교좌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했다가 1967년에 절두산 순교성지의 성인 유해실로 옮겨 모셨다.
그는 9월 12일에 옥중 순교했으나 한국 교회에서는 1984년에 시성된 103위 한국 순교 성인 모두를 전례적으로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2일 목록에서 한국의 서울에서 순교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교리교사로서 포장 앞에 끌려가서 배교하기를 거부하고 감옥에 갇혀 고문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도와 교리교육을 멈추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4건)
- 구중서 외 저, 한국천주교회가 낳은 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 1 - '성 프란치스꼬 최경환', 서울(성황석두루가서원), 1992년, 286-297쪽.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451-456쪽.
- 아드리앙 로네/폴 데통베 저, 안응렬 역,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전 (상), '제10장 최 프란치스코', 2016년, 148-162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 - '최경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5년, 8218-8219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