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교 · 교회학자
성 알베르토(대)
(Albert the Great)
알버트 · 알베르또 · 알베르뚜스 · 알베르투스 · 앨버트
성 알베르투스(Albertus, 또는 알베르토)는 1200년경(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고 자료에 따라서 1193년에서 1206년경 사이로 나온다) 독일 남부 슈바벤(Schwaben) 지방에 있는 도나우강 기슭의 작은 도시인 라우잉겐(Lauingen)에서 그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교육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지만, 1222년경부터 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 등을 전공하던 그는 당시 도미니코 수도회 제2대 총장이었던 작센의 복자 요르단(Jordan, 2월 13일)을 만나 그의 설교를 통해 성소를 깨닫고 함께 지내던 삼촌과 가족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1223년경 독일의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쾰른(Koln)에서 수련 기간을 보내고 신학을 전공한 성 알베르토는 1228년경 그곳에서 강의를 시작하고 사제품도 받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힐데스하임(Hildesheim)을 비롯하여 프라이부르크(Freiburg),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그리고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신학을 강의했다.
쾰른으로 다시 돌아올 즈음 그의 지식과 강의에 대한 명성은 날로 치솟아 독일 최고의 학자로 알려졌다. 1243년 혹은 1244년에 파리 대학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한 그는 1245년부터 파리 대학의 교수로서 강의하였다.
이 시기 그의 제자 중에는 훗날 위대한 신학자가 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월 28일)가 있었다.
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토마스는 지적으로 나의 좋은 동료이자 친구이다.” 이말 그대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1274년 선종할 때까지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로 지냈다.
여러 수도회 대학과 파리 대학에서 성경과 신학을 강의하던 그는 1248년 도미니코 수도회가 쾰른에 ‘수도회 대학’(Studium Generale)을 새로 설립할 때 초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그는 신학뿐만 아니라 철학으로 강의 영역을 넓혀갔다.
철학과 교수로서 그는 전공자들을 위한 각종 주해서를 학생과 교수에게 제공하는 등 왕성한 학문 활동을 전개했고,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 전집”(Corpus Aristotelicum)의 강의와 체계적 주석에도 큰 공을 들였다.
이를 통해 철학 체계를 신학에 도입하고 신앙과 이성을 고유성과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제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를 더욱 발전시켜 중세 최고의 스콜라 신학자이자 철학자가 될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1254년에 성 알베르토는 도미니코 수도회 독일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로마에 갔는데, 그곳에서 생타무르(Saint-Amour)의 빌리암(William)의 공격에 대항해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데 진력하였다.
빌리암은 그 후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단죄되었다.
그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교황의 신학 고문으로서 봉사했다.
성 알베르토는 1257년 관구장직을 사임하고 학업에 전념하다가 1259년에 훗날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 5세(Innocentius V, 6월 22일)가 된 타랑테즈(Tarentaise)의 베드로(Petrus)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더불어 도미니코 수도회의 새로운 교과 과정을 작성하는데 힘썼다. 1260년에 성 알베르토는 자신의 소망에 반해 어려운 처지에 놓인 레겐스부르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구 행정과 재정을 정비하고 모범적이고 소박한 생활을 통해 성직자들의 쇄신과 개혁을 이끌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2년 만에 사임한 후 쾰른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1274년의 리옹(Lyon) 공의회에서 크게 활약했는데, 특히 로마와 그리스 교회의 일치에 공헌하였다.
그는 또한 1277년 파리로 가서 이미 선종한 제자이자 친구였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 중 일부에 대해 공격하는 에티엔 템피에(Étienne Tempier) 주교와 파리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대항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강력히 옹호했던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1280년 11월 15일 쾰른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동료들과 함께 앉아 있다가 평화롭게 선종한 성 알베르토의 시신은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쾰른의 성 안드레아 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살아생전 성 알베르토는 소위 만물박사로 통한 듯하다.
그의 저서에는 성경과 신학은 물론 설교학,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물리학까지 두루 섭렵한 논문들이 많이 있고, 관심 분야 또한 천문학, 화학, 생물학, 동물학, 지리학, 지질학 그리고 식물학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특히 인간 이성의 자율성 그리고 감각과 경험으로 얻는 지식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조직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가치를 확립하고 수용한 면에서 더욱 돋보였다.
그의 제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종합을 완성한 신학자이다.
이렇듯 당시 모든 학문을 섭렵한 그는 ‘보편적 박사’(Doctor universalis)라고 불렸고, 그의 학문 영역이 방대하다는 의미에서 이름 앞에 ‘위대한’ 또는 ‘큰’(大)이란 뜻의 ‘마뉴스’(Magnus) 칭호가 추가되어 ‘대 알베르토’(Albertus Magnus)로 불리게 되었다.
성 대 알베르토는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31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교회 학자 칭호와 더불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1941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자연과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1월 15일 목록에서 주교이자 교회 학자인 성 대 알베르토가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파리에서 강의와 저서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으로서 성인들의 지혜와 인간 지성 및 자연 과학을 훌륭하게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또한 마지못해 레겐스부르크의 주교가 되어 민족들 사이의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교구장의 영예나 직분보다 수도 생활을 더 선호했기에 1년 후에 사임하고 쾰른에서 지내다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성 대 알베르토는 주교복이나 도미니코회 수도복을 입고 책과 깃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주로 묘사된다.♣
출처 (4건)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대 알베르토 주교 학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33-135쪽.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저, 안소근 역, 신과 하나가 되는 길, 고양(오엘북스), 2023년.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8권 - '알베르토',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1년, 5863-5865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알베르토 주교 학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289-290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