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우 안토니오

회장 · 순교자

김성우 안토니오

(金星禹 Anthony)

김 안또니오 · 김 안토니오 · 김안또니오 · 김안토니오 · 안또니오 · 안또니우스 · 안소니 · 안토니우스 · 앤서니 · 앤소니 · 앤터니

9월 20일📍 한국(Korea)🕰 1795-1841년

성 김성우 안토니우스(金星禹 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1795년에 경기도 광주의 구산(龜山, 현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마을에서 아버지 김영춘 바오로(金永春 Paulus)와 어머니 청주 한씨(韓氏)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성우의 이름은 우집(禹集)이고, 동생들의 이름은 김덕심 아우구스티노(金德深 Augustinus, 1798~1841년, 또는 金萬集)와 김윤심 베드로 알칸타라(金允深 Petrus Alcantara, 1801~1868년, 또는 金文集)였다.

그의 집안은 부유했고 또한 인심 좋기로 유명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3형제 중 맏이인 김성우 안토니오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천주교에 입교하기 전부터 많은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김성우 형제는 1830년경 이씨 성을 가진 한 교우로부터 복음을 전해듣고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때 3형제 중 김성우와 셋째인 김윤심이 먼저 입교했고, 둘째인 김덕심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다가 얼마 후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천주교인이 된 3형제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가족 친지와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의 살던 구산 마을 전체를 열렬한 교우촌으로 변모시켰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김성우 안토니오는 우리 나라에서 유방제(劉方濟)로 널리 알려진 중국인 여항덕 파치피코(余恒德 Pacificus) 신부가 1834년 초에 조선에 입국하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로 이사하여 느리골(於義洞, 현 효제동)이라는 동네에 집을 사서 살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馬場內, 현 마장동)이라는 동네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이는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이동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경당(공소)을 마련하고 1836년 이후에는 한여름 동안 모방 베드로(Maubant Petrus, 羅伯多祿) 신부가 이곳에 거처하도록 모시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cobus) 신부가 순교한 이후 30년 넘게 성직자가 없던 시기에 신자들은 사제를 한 번 만나 성사를 보는 것이 평생소원이었기에 그의 공로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얼마 안 된 3월 21일, 포졸들이 구산으로 들이닥쳐 김성우 안토니오와 동생 하나를 체포하였다.

이때 그들은 약간의 돈을 주고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해 말에 어느 배교자의 밀고로 두 동생과 사촌 김주집 스테파노가 체포되어 광주 유수가 있던 남한산성에 압송되었다.

둘째인 김덕심 아우구스티노는 체포된 뒤 고문을 참아 받으며 관헌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2월 19일 옥중에서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하였다.

반면에 셋째인 김윤심 베드로 알칸타라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858년 10월 18일 국왕의 특사로 석방되기까지 무려 19년 5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구산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또 다시 병인박해(1866년)의 광풍이 구산 교우촌까지 불어온 1868년에 집안 남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재차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가 그해 3월 8일 6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기해박해 당시 김성우 안토니오는 포졸이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지방으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김윤심 베드로 알칸타라의 딸 김 막달레나의 증언에 따르면, 김성우 안토니오는 세례를 받은 후 서울에 집을 마련해 살다가 상처한 뒤에 열심한 교우와 재혼하여 지냈다.

그런데 1840년 1월경 한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의 수색망에 걸려 결국은 온 가족과 함께 마장안의 집에서 붙잡혀 포도청을 거쳐 형조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고, 외교인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하여 그중 두 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하였다.

또 온갖 형벌을 받아내면서 석방될 희망을 전혀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생애를 다하려고 다짐하였다.

그는 관장 앞으로 끌려가 거듭되는 심문을 받았고, 30대의 곤장을 맞았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을뿐더러 혹독한 고문을 용감히 참아냈다.

김성우 안토니오는 배교하라는 관장의 독촉에 “어떤 질문을 하시고 어떤 충고를 하셔도, 제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저는 천주교인이요 천주교인으로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15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41년 4월 28일 다시 불려나가 치도곤 60대를 맞고도 배교하지 않자 관장은 다음날인 4월 29일 그에게 교수형을 내렸다. 47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교한 김성우 안토니오의 유해는 그의 외아들인 김성희 암브로시오(金聖熙 Ambrosius)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고향으로 돌아와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가족묘지 근처에 안장되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한편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유해는 시복 후인 1927년 5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하여 유해의 골격을 맞춘 후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치하였다가 나중에 절두산 순교성지의 성해실로 옮겨 모셨다.

그는 4월 29일 옥중 순교했으나 한국 교회에서는 1984년에 시성된 103위 한국 순교 성인 모두를 전례적으로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4월 29일 목록에서 한국의 서울에서 순교자 성 김성우 안토니오가 자신의 집에 많은 신자들을 모았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4건)
  • 구중서 외 저, 한국천주교회가 낳은 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 2 - '성 안또니오 김성우', 서울(성황석두루가서원), 1992년, 233-242쪽.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김성우 안토니오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13-115쪽.
  • 아드리앙 로네/폴 데통베 저, 안응렬 역,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전 (상), '제22장 김 안토니오', 서울(가톨릭출판사), 2016년, 329-331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 '김성우',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5년, 1184-1185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