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봄 입니다.
이 그림은 ‘그림 속의 숨은 그림’이라는 주제로 전시되었던 화가 김재홍의 모자상母子像입니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아름다운 동강東江이 수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을 쏟아낸 몸부림, 절규입니다. 언뜻 보면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동강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섬세한 붓놀림으로 옮겨놓은 것이 아닙니다. 소중한 이 땅을 지키겠다는 기도로 승화된 작품입니다. 성경은 마치 이 그림과 같습니다. 씌어진 문자 너머에 소중한 뜻이 켜켜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고백되어진 하느님. 지난 2,000년의 교회는 이 말씀 앞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온전히 듣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되풀이 읽어도, 눈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옮겨 적어도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일은 그래서 피눈물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하느님 말씀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하느님의 말씀 앞에 꿇어 엎드립니다. 성경을 통해 울려 나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어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어 소경이 되었습니다. ‘보고, 듣고, 깨달음’, 이는 마르코의 기도 제목만은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9-11). “때(kairos)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세례자 요한의 선포에 이어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첫 인상은 마치 다음 사진의 느낌처럼 다가섭니다. 하지만 본문이 증언하려는 뜻은 이 이미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마르 1,9은 앞의 사건과 ‘연결과 단절’의 긴장관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곧’이라는 어휘를 쓰지 않음으로써 비록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나, 온 유다 사람이 세례 받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내비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1장 12절에서는 ‘곧’이라는 단어를 써서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의 시험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1장 14절에 ‘요한이 잡힌 뒤에’라고 증언함으로써 1장 2절부터 15절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강렬한 하느님의 뜻,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의지가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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