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콤보니

주교 · 설립자 · 선교사

성 다니엘 콤보니

(Daniel Comboni)

꼼보니 · 다니엘레 · 대니얼

10월 10일📍 아프리카(Africa)🕰 1831-1881년

성 다니엘 콤보니는 1931년 3월 15일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Brescia) 인근 가르다(Garda) 호숫가의 리모네 술 가르다(Limone Sul Garda)에서 부유한 지역 영주의 하인으로 일하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지 콤보니(Luigi Comboni)와 어머니 도메니카 파체(Domenica Pace)는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넷째인 성 다니엘 콤보니 외에 다른 형제들은 거의 모두 유아기나 성인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신앙적으로는 풍요로운 가정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의 가난 때문에 1843년 마을을 떠나 베로나(Verona)에 니콜라 마차(Nicola Mazza) 신부가 재능있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위해 설립한 기숙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베로나에서 지내면서 사제직의 소명을 발견하고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앙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돌아온 선교사들의 증언에 깊이 감동해 아프리카 선교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는 미래의 선교를 위해 외국어와 의학 등도 공부하였다. 1854년 트렌토(Trento) 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성 다니엘 콤보니는 3년 후인 1857년 어머니의 축복 속에 마차 수도회 소속 다섯 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첫 선교 여행을 떠났다.

성 다니엘 콤보니가 속한 선교단은 4개월의 여정 끝에 1858년 1월 8일 수단의 수도 하르툼(Khartoum)에 도착했다.

그는 나일강 상류 지방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가 마주한 아프리카의 현실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는 고된 노동과 견디기 어려운 기후와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질병 그리고 노예 상인들의 적대감으로 수많은 젊은 동료 선교사들의 죽음을 보았다.

또한 그는 지독한 가난 속에 버림받은 사람들의 모습 안에서 열정적으로 시작한 선교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할 이유를 찾았다.

그는 산타 크로체(Santa Croce) 선교지에서 부모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고생하고 땀 흘리다 죽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땀 흘리고 죽는다는 생각은 너무나 달콤해서 이 위대한 사명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세 명의 신부가 사망하는 열악한 환경에 포교성성(현 교황청 복음화부)은 이 지방의 선교를 포기하였고, 성 다니엘 콤보니와 남은 동료는 1859년 이탈리아로 귀환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1861년부터 1864년까지 니콜라 마차 신부의 신학교에서 선교사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그는 아프리카에 대한 새로운 선교 전략을 세우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프리카와 그곳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출발하였다. 1864년 9월 15일, 로마의 성 베드로(Petrus) 무덤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는 번뜩이는 영감을 얻었다.

그것은 ‘아프리카를 아프리카인을 통해 구원하자!’라는 표어로 요약되는 유명한 ‘아프리카의 구원을 위한 계획’이었다.

이는 그 당시 아프리카인과 백인을 동등하게 여기지 않던 시대에 아프리카 사람들의 인간적 · 종교적 잠재력에 대한 그의 무한한 믿음의 결실이었다.

즉 유럽인들이 해안선을 따라 선교지를 구축하고, 그곳에서 아프리카인들을 교육하여 내륙으로 파견하자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수많은 어려움과 오해 속에서도 유럽 사회와 가톨릭교회가 중앙아프리카 선교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호소하며 유럽 전역을 누비며 왕과 주교와 영주뿐 아니라 가난한 소박한 사람들로부터 아프리카 선교를 위한 영적 · 물질적 지원을 얻기 위한 모금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그는 선교 활동의 도구로 이탈리아 최초의 선교 잡지를 창간했는데, 1883년에 ‘니그리치아’(Nigrizia)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주님과 아프리카에 대한 그의 흔들림 없는 믿음은 1867년 교황의 허락을 얻어 나중에 베로나 사제회(Verona Fathers)로도 불리는 예수 성심 선교회를 설립하고, 이집트의 카이로(Cairo)에 아프리카인 남성과 여성을 위한 두 개의 학교를 세웠다.

모금을 위한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1872년에 베로나 수녀회(Verona Sisters)로도 불리는 니그리치아의 경건한 어머니들(Pie Madri della Nigrizia)을 설립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예수 성심 콤보니 선교회(Missionarii Combonani Cordis Iesu, MCCI)와 콤보니 선교 수녀회(Suore Missionarie Comboniane, SMC)로 더 잘 알려졌다.

성 다니엘 콤보니 신부는 베로나 주교의 신학 고문 자격으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여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아프리카 복음화를 지지하는 청원서’(Postulatum pro Nigris Africae Centralis)를 발의해 70명의 주교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1872년 5월 26일, 성 다니엘 콤보니 신부는 수단과 누비아 그리고 큰 호수들의 남쪽 영토들을 포함하며 이집트부터 짐바브웨까지, 그리고 홍해부터 말리까지 관장하는 중앙아프리카 대목구의 부대목에 임명되었는데, 인구가 거의 1억 명에 달하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1877년 7월 2일에는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한 달 후인 8월 12일에 주교로 축성되었다.

이로써 많은 사람이 그의 사상과 행동이 너무나 대담하고 심지어는 무모하다고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와 아프리카 대륙 해방에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이었음을 인정하고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1877년에서 1878년까지 그는 선교사들과 함께 전례 없는 가뭄과 기근이라는 비극을 몸과 마음으로 겪었다.

이 가뭄과 기근으로 지역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고 선교사들의 활동과 인력도 고갈되었다.

그래도 그는 대목구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선교지를 세우고, 당시 성행하던 노예무역과 노예 학대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며, 필요한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파리(Paris)를 여행하던 중 납치되기까지 했었다. 1880년에 성 다니엘 콤보니 주교는 여느 때와 같은 확고한 의지로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선교사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그는 노예제도의 폐해에 맞서 싸우고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선교 활동을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1년 후에 피로와 동료들의 잦은 죽음, 그리고 온갖 비난과 중상모략에 지친 위대한 선교사는 1881년 7월 말라리아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수개월 간 계속 일을 하다가 결국은 그해 10월 10일 하르툼에서 겨우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랑하는 하르툼의 신자들 사이에서 선종하면서 “나는 죽어가지만, 나의 사명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확신에 찬 말을 남겼다.

성 다니엘 콤보니의 마지막 유언처럼 그의 사명은 절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 아래에서 태어난’ 모든 위대한 것들처럼, 믿음과 인간적 연대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가 시작한 고되고도 감동적인 사명을 따르기로 선택한 수많은 남녀의 헌신 덕분에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는 1996년 3월 17일에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3년 10월 5일 같은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성 다니엘 콤보니는 중앙아프리카 최초의 가톨릭 주교이자 예수 성심 콤보니 선교회와 콤보니 선교 수녀회의 설립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 목록에서 수단의 하르툼에서 기념하는 성 다니엘 콤보니는 아프리카 선교회를 설립하고, 아프리카의 주교로 임명된 후 그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헌신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2건)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 - '콤보니, 다니엘레',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5년, 8514-8515쪽.
  •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성 다니엘 콤보니’,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422-425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