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씨앗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합당한 이유와 답변을 지니고 계시지만
누구도 그 이유를 물어서는 안 된다고.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 10세에 사고로 죽었습니다. 너무나 애통한 나머지 매일같이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합니다. 천사가 하루는 이 부인을 데리고 지옥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이 아들이 수명을 다하고 죽었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해 못할 수많은 일들에 의미없는 일이란 없다고 합니다. 다만 그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지 못할 뿐지요. 신앙은 언제나 이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악에서도 선을 유도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희망은 우리에게 어둠을 저주만하기보다는 한자루의 초에 불을 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해롭고 무엇이 이로운지는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시편 저자처럼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시편 23,4)”하고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일이 꼬이고 잘 안될 때 그 속에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자주 원망의 화살이나 이유를 묻기에 급급합니까. ‘좋은 일은 서둘러 하고 나쁜 일은 뒤로 미루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이 생각날 때 뒤로 미루고 나쁜 일은 서둘러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에릭 프롬은 ‘사랑의 예술’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의 배려요, 관심이다.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라고.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사랑은 미루지 않는 것이다”라고. 자꾸만 미루다 보면 그 사랑의 대상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값비싼 선물을 받고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서둘러야 합니다. 시간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살아 있을 때 사랑해야지 죽으면 못하잖아”하시던 어느 분의 절박한 음성이 귓전을 맴돌고 있습니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서둘러 사랑의 씨앗을 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호자 * 마지아수녀 / 포교베네딕도수녀회 * 수원교구 버드네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