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라리온

수도원장

성 힐라리온

(Hilarion)

10월 21일📍 가자(Gaza)🕰 +371년경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는 291년경 팔레스티나(Palestina) 지방 가자 남쪽의 타바타(Tabatha)에서 태어난 성 힐라리온의 생애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그에 따르면 성 힐라리온은 이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나 15살 때 문화와 지식의 중심지였던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가서 수학했다.

그는 총명한 지성과 바른 생활로 두각을 나타냈고,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참된 종교에 대해 알게 되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는 더욱 열정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미덕을 실천했다.

그러면서 거룩한 말씀에 대한 갈증과 알렉산드리아의 방탕한 생활에 환멸을 느껴 도시를 떠나 테베(Thebae, 나일강 중류에 있었던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Luxor])에 있는 성 안토니오(Antonius, 1월 17일) 수도원장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수도 생활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 안토니오의 제자가 되어 사막의 고독함 속에서 기도와 참회 생활에 전념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성 안토니오의 성덕을 칭송하며 그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질병을 고치고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사막 생활도 도시 못지않게 산만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307년경에 부모님의 부고를 듣고 또는 가자로 돌아와서 부모님의 죽음을 알고서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는 인간적인 위안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하고, 재산을 일부를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후 가자지역의 항구도시인 마이우마(Maiuma) 남쪽의 외딴곳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악과 육신의 유혹에 대항하여 싸우는 삶을 시작했다.

그렇게 기도와 금욕을 실천하며 고독한 삶을 살았다.

그가 은둔하던 장소는 바다 근처의 습기 많은 저지대였다.

그는 갈대와 골풀 등으로 만든 작은 오두막에서 살았고, 나중에 햇볕에 말린 점토 벽돌로 작은 방을 지었는데, 그 또한 편히 눕기에는 좁을 정도로 집이라기보다는 무덤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일 년에 한 번, 부활절에만 머리를 깎았고 작은 정원에서 직접 기르는 몇 그루의 무화과나무 열매와 약간의 채소를 먹으며 생활하였다.

그의 엄격한 생활 방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범을 따르려는 많은 이들이 모여들어 그에게 가르침을 배우며 근처에서 생활했다.

또한 그가 몇 차례 행한 치유 기적으로 인해 많은 병자도 찾아왔다.

그러면서 여러 수도 공동체가 생기고, 성 힐라리온은 고향인 팔레스티나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로 여겨졌다.

그의 강론과 모범적 삶을 통해 많은 이교도가 개종하였다.

그는 마이우마에 살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말보다는 삶의 실천을 통해 가르쳤다.

그러나 고적한 은둔 생활을 원했던 성 힐라리온은 이제 고향에서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과 자신이 없어도 수도 공동체와 인근 주민들이 잘 지낼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 위해 기도와 참회 속에 숨어 지내고자 했으나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이 그가 떠나는 것을 반대하였다.

결국 실질적인 감금 상태에 있던 그는 자신을 놓아줄 때까지 단식하며 버티다가 일주일 뒤에야 비로소 떠날 수 있었다.

그는 몇몇 수도승과 함께 360년경 마이우마를 떠나 이집트로 떠났고, 마침내 홍해 근처 ‘안토니오 산’에 도착해 이미 세상을 떠난 성 안토니오의 무덤을 참배하려 했으나 숨겨진 스승의 무덤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집트 상부의 아프로디토폴리스(Afroditopolis) 인근 사막으로 가서 이전보다 더 철저히 금욕과 침묵 생활을 실천했다.

하지만 성 힐라리온의 노년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명성은 이집트에서도 퍼져나갔고,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361~363년 재위)가 그의 체포를 명령해 리비아 사막으로 피신해 1년을 보냈다.

그 후 그는 초기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성 헤시키오(Hesychius, 10월 3일)를 팔레스티나로 보내 마이우마 수도원을 돌보도록 하고, 더 고요한 곳을 찾아서 다른 제자와 함께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바다 건너 시칠리아섬으로 갔다.

시칠리아 남동쪽 카포 파세로(Capo Passero)에 도착해 인적이 드문 내륙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장작을 패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한편 성 헤시키오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파괴된 마이우마 수도원을 재건하고 나서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는 성 힐라리온을 찾아 동방과 그리스까지 갔다가 한 유대인 상인으로부터 시칠리아에 기적을 행하는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스승을 찾아왔다.

이미 마을 사람들은 스승이 행한 기적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받지 않고 나누는 그의 자비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명성이 알려지고 또다시 많은 병자와 순례자가 찾아들자 성 힐라리온은 자신의 언어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곳으로 가고자 했다.

성 헤시키오는 스승을 모시고 달마티아(Dalmatia) 해안에 있는 에피다우룸(Epidaurum,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Dubrovnik] 남쪽 해안가에 있는 차브타트[Cavtat] 지역)으로 갔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도 그의 기적은 계속되었고, 병자들과 신심 깊은 사람들 그리고 호기심 많은 사람이 계속해서 그를 찾아왔다.

결국 성 힐라리온은 성 헤시키오의 도움을 받아 어둠을 틈타 배를 타고 키프로스(Cyprus) 섬의 파포스(Paphos)로 갔다.

그곳에서도 주민들이 그를 알아보자 높은 산에 있는 더 외딴곳으로 갔고, 마침내 그곳에서 평화와 고요를 찾았다.

성 힐라리온은 391년경 80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선종해 파포스에 묻혔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인 성경과 짧은 망토를 성 헤시키오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병중에 있을 때 살라미스(Salamis)의 성 에피파니오(Epiphanius, 5월 12일) 주교가 그를 방문했고, 나중에 그의 삶에 대해 성 예로니모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성 예로니모의 증언에 따르면 성 헤시키오가 주민들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스승의 유해를 마이우마 수도원으로 이장해 안장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21일 목록에서 키프로스 섬에서 성 힐라리온 수도원장의 축일을 기념하는데, 덕행과 기적으로 가득한 그의 생애를 성 예로니모가 기록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키프로스 섬의 성 힐라리온 수도원장이 처음에는 성 안토니오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자 인근에서 은수 생활을 했고, 훗날 그 지역 은수 생활의 창시자이자 모범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성 힐라리온은 키프로스와 시칠리아에서 공경을 받고 있고,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타원형으로 둘러싼 열주 위에 세워진 140명의 성인 입상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성 대 힐라리온(Hilarion the Great)으로도 불린다.♣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