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는 얼마 전까지 전임 교종 요한바오로2세와 베네딕토16세에 대해 지극히 심한 알러지가 있었다.
내 젊은 시절 방한했던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해 말하면, 교종이 지극히 대한민국을 사랑하시어 친히 그리고 기쁘게 2번 씩이나 방한했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감격했었고 더구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가 입장하던 그 하늘 위에 십자가 모양의 빛이 선명하게 떠올랐다는 그 사실에 벅차오르는 감격을 주체 할 수가 없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더 들어 세상에 대해 하나하나씩 실체를 습득해 갈 적마다 가톨릭의 모습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고 게다가 신앙교리성 장관인 그 유명한 요셉 라칭어 추기경과 오랜시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싫었다.
한편 요셉 라칭어 즉, 베네딕토 16세의 경우에는 너무도 지독한 가톨릭 근본주의자의 모습으로 일관하면서 보편적이고 다양성을 지향해야할 가톨릭을 뻣뻣한 대말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섭섭함을 줄곧 견지해 왔다.
그 분이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재임 했던 당시의 가톨릭은 중세의 가톨릭을 다시 재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괴로웠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분께서 교종이 되면서 그가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 제재를 가했던 한스 큉 신부와의 대화도 마련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그런 행동들이 그의 근본주의 성향을 완화했다는 증거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가 어느 정도는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사건이 있었던바, 해방신학의 거두 중 한 분이고, 해방신학의 제창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막역한 동반자인 뮐러 대주교를 후임 신앙교리성 장관에 임명하는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였다.
자신이 그토록 단죄하고 제재하고 감금해 두었던 해방신학을 무슨 연유로 햇빛 아래로 드러내고자 하는지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신앙교리성 장관이란 옛날 말로는 종교재판소장이 아니던가?
그에게 있어서 해방신학이란 공산주의이론을 가톨릭 신학에 교묘히 접목시킨 이단과 다름없는 아마도 악마의 이론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부터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수십년 동안 두 분 가톨릭 근본주의사상의 교종께서 해 오신 활약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 두분은 50 여년 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톨릭의 개혁개방 사상을 알게 모르게 뒤돌려 세운 장본인들이 아니었던가?
그 수 많은 가톨릭 진보 개혁 사상의 대신학자들에게 굴레와 멍에를 지게 함으로써 "시대의 징표"를 외면하게끔 멍석을 넓게 깔아 주셨던 두 분이 아니었던가?
해서 바로 이런 때 '아~~항!! 성령의 힘이란 말인가?' 하는 정체성혼돈의 충격에 빠져서 헤어 나오기가 힘들었다.
나는 원래 잡독과 다독을 하는 편인이다.
해서 이제는 누구의 글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위 제목에 올린 근본주의에 관해서 어느 분이 쓴 글이 나 나름의
답을 만들어 내는데에 일조한 것이 사실이라 아래에 밝혀 본다.
영한사전에서 을 찾으면 첫번째로 <과격한, 급진적인>이 나올 줄 아는데 사실 <근본의, 근본적인> 뭐 대충 이 단어가 먼저 나오고 '과격한'은 두 번째로 나온다. - 내가 가지고 있는 사전만 그런지는 모르지만 -
중요한 것은 어떤 단어가 대표의미냐 하는 문제보다는 어찌보면 상극일 것 같은 한국어의 두 단어가 영어에서는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신통할 따름이다. (아마 이래서 고교때 영어선생님께서 영영사전을 참고 하라고 햇을게다)
결국 서양인들은 '근본적'이라는 것이 곧 '급진적'이라고 함께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고, 이 사실이 곧 내가 전임 두 교종을 지독히 편파적인 <우향우의 화신>이나 <중세로의 회귀갈망> 이 아닌 좌와 우 모두를 아우르는 통합을 견지한 수장다운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나름의 포용적 결론을 내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극도의 좌우 컴플렉스에 빠져있는 것이 사실이다.
< 우>는 수구적이고, <좌>는 과격할 것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둘 간의 교집합은 커녕 교차점이나 접점 마저도 찾기 힘들 것이라 여겨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선을 긋는 손쉬운 이분법적 사고일 뿐, 현상적으로 보면 극과극은 서로 통할 수 밖에 없다는 진리를 애써 외면한다고 보여진다.
<우>가 끝간데 없이 달려나가 <극우>가 될 듯 싶지만 결국 돌아와 <좌>와 만날 수 있다고 말하면 너무 안이하고 나이브 한가?
<우>와 <좌>가 일맥상통하듯, <근본>과 <급진>은 당연히 통할 수 있다. 아니 당연히 통해야 한다.
단, 통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인정할 수 없고, 내 주장의 진정한 한계를
모르기 때문일 수 있고, 상대의 말에 가슴을 열 자신이 없기 때문에 지루한 공방전을 하는 것일뿐...
나는 이제 더 이상 전임 두 교종을 욕하거나 폄훼하지 않는다.
그간 내가 내달렸던 내 주장의 한계가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귀결될 지 모르고 날뛴 파렴치한 오만을 더 이상 방치해 두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또한 나는 "은총이란 신의 자기현시"라 말했던 칼 라너의 말대로 그 현시에 부응코자 노력하는 인간의 선을 향한 의지를 믿는 이상 인류는 조금씩 나은 곳으로 발을 내딛고 있다는 꿈을 꾸고 있다.
"<이념>이나 <~주의>에 빠지지 말자. 그건 단지 편의상 분류해 놓은 이성적 허상에 불과할 뿐....
모든 것은 <하나>안에 있다"
그 <하나>를 어디에 대입할 지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고....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혹여, 나의 결론이 맘에 들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지우지는 말고, 하나다운 소통을 해 보고 싶은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겸손한 사도들은 내적 평화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자세로 대화를 권하는 반면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주창자들은 비록 적(敵)은 아니더라도 반대자라고 느끼는 사람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설득하려한다.
전자는 배우기 위해, 그리고 변화하기 위해 듣는다.
후자는 과오를 발견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듣는다.
전자는 ‘사랑안에서 진리’를 말한다.
후자는 세력을 가지고 진리를 선포한다.”
(‘과감하게 말하고 겸손하게 침묵하라' 중에서.로널드 코젠스)
*언젠가 제 글밑에.... "<칼 라너>는 가톨릭에서 축출된 좌파사상가일 뿐"이라고 일갈하신 분이 계셨는데, 아직도 그리 알고 계시는지 진정으로 궁금하다.
가톨릭의 보편사상에 크게 일조하신 대들보 역할을 하신 분을 이단으로 매도 하시는 그 근거가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그분의 신학사상을 그리보는 편견의 근거는 무엇인지 실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