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 퐁그라츠

신부 · 순교자

스테파노 퐁그라츠

(Stephen Pongracz)

스더 · 스테파누스 · 스테판 · 폰그라츠 · 이슈트반 · 슈테판

9월 7일📍 코시체(Kosice)🕰 1582-1619년

성 마르코 크리제브차닌/크리진(Marcus Krizevcanin/Krizin)은 1588년 크로아티아의 크리제브치(Krizevci)에서 그 지역의 유명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빈(Wien)과 그라츠(Graz)에서 예수회 학생으로 공부할 때 훗날 순교의 동료가 될 헝가리 출신의 성 스테파누스 퐁그라츠(Stephanus Pongracz, 또는 스테파노 퐁그라츠)와 체코 출신의 성 멜키오르 그로지에츠키/그로데츠(Melchior Grodziecki/Grodecz)를 만나 친분을 나눴고, 예수회에 입회하여 훗날 에스테르곰(Esztergom)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이 된 페테르 파즈마니(Petar Pazmany)의 제자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1611년부터 1615년까지 로마(Roma)의 예수회 콜레지오 로마노(Collegio Romano, 훗날 교황청 직속 그레고리오 대학교가 되었다)에서 독일-헝가리 대학(Germanicum-Hungaricum) 학생으로 수학했다.

그는 1615년 학업을 마치고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크로아티아로 돌아온 성 마르코는 2년간 자그레브(Zagreb) 교구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그라츠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파즈마니 추기경의 부름을 받고 슬로바키아 서부 트르나바(Trnava) 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또한 헝가리 북부에 있는 에스테르곰 대성당의 참사회원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헝가리는 튀르크족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라 에스테르곰 대성당의 참사회가 트르나바에 와 있었다. 1619년 초, 성 마르코는 대성당 참사회의 지시로 슬로바키아 동부 코시체 근처 크라스나(Krasna)에 있는 옛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자산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파견되었다.

당시 코시체는 대부분 개신교(헝가리 개혁 칼뱅주의) 신자였고, 가톨릭 신자는 약 200가구에 불과했다.

평소 코시체 지역으로 가서 그곳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을 되찾도록 도와주고 싶었던 그는 마침내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헝가리의 귀족 가문 출신인 성 스테파노 퐁그라츠는 1582년 헝가리(현재는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Transilvania)의 알빈츠(Alvincz)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국에서 고전학을 공부하고 현재 루마니아 클루지(Cluj)의 예수회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후 1602년 현재 체코 공화국에 있는 브르노(Brno) 수련원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이 수련원에서 체코의 성 멜키오르 그로지에츠키를 처음 만났다.

성 스테파노는 프라하(Praha)에서 철학을, 그라츠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61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헝가리(현재는 슬로바키아 동부) 후멘네(Humenne)의 예수회 대학교 학업 책임자이자 설교자로 파견되었다. 1619년 초에 성 스테파노는 성 멜키오르와 함께 국왕의 부관인 안드라스 도치(Andras Doczy)의 초청으로 오늘날 슬로바키아 동부에 있는 코시체로 파견되어 그 지역에 있는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는 소임을 맡았다.

그들은 황제를 섬기는 폴란드와 보헤미아 출신 군인들의 군종 신부 역할을 함께 수행했다.

헝가리 출신인 성 스테파노는 자국민을 위해, 체코 출신인 성 멜키오르는 슬라브어와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목했다.

성 멜키오르 그로지에츠키는 1584년 실레시아(Silesia)의 치에신(Cieszyn, 폴란드 남부 실롱스크주의 도시로 체코 공화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에서 폴란드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실레시아와 모라비아(Moravia)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그의 삼촌인 얀(Jan)은 올로모우츠(Olomouc)의 주교이자 브르노에 예수회 수련원을 설립한 인물이다.

성 멜키오르는 오스트리아 빈의 예수회 대학에서 수학한 후 1603년 모라비아의 브르노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수련소에서 성 스테파노 퐁그라츠를 처음 만났는데, 함께 순교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는 프라하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614년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한동안 프라하의 성 빈첸시오회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특히 프라하의 가난한 가정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면서 유능한 교육자임을 입증하였다.

성 멜키오르는 1618년 후멘네 대학에서 코시체로 파견되어 이듬해 초에 성 스테파노와 함께 군종 신부로 활동했다. 1619년 초, 칼뱅주의자인 트란실바니아의 가보르 베틀렌(Gabor Bethlen) 공작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했을 때, 이미 보헤미아(Bohemia)와 모라비아에서 추방당한 예수회는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그해 9월, 코시체는 훗날 트란실바니아의 군주가 될 죄르지 라코치 1세(Gyorgy Rakoczi I)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코시체는 당시 상부 헝가리로 불리던 슬로바키아 전체를 정복하기 위한 진격로에 놓인 첫 번째 요새 도시였다.

성 스테파노와 성 멜키오르 신부는 기존에 활동하던 작은 마을을 떠나서 인근 크라스나의 수도원에 있는 성 마르코 크리제브차닌 신부와 합류해 코시체의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이들 세 신부는 모두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1619년 9월 초, 라코치 장군의 군대가 약탈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시의회의 허락을 받고 코시체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라코치 장군은 가톨릭 사제들을 넘겨주도록 요구했고, 코시체의 가톨릭 총독은 용병들에게 배신당했으며, 칼뱅주의자 주민들은 9월 5일에 총독과 세 명의 가톨릭 사제를 라코치 장군에게 넘겨주었다.

시의회 의장인 레이너(Reyner)는 칼뱅주의 설교자 알빈치(Alvinczi)의 사주를 받아 시내의 모든 가톨릭 신자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대부분 칼뱅주의자는 그런 극단적인 조치에 반대했다.

다만 세 명의 사제를 처형하는 것에는 동의하였다.

알빈치는 그들에게 교황의 교회를 버리고 순수한 복음을 따르라고 강요했으나 그들은 교회를 배신하지 않았다. 9월 6일 저녁, 예수회 숙소에 갇혀 물조차 제공받지 못한 그들은 서로의 고해성사를 듣고 밤새워 기도하였다. 9월 7일 저녁, 세 명의 신부에 대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세 명의 신부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고문을 자행한 자들은 라코치 장군 휘하의 병사들이었고, 알빈치와 레이너가 이를 지켜보았다.

첫 번째 희생자는 성 마르코 크리제브차닌이었다.

그들은 그의 사제복을 찢고 칼로 찌르며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횃불로 지졌다.

그가 의식을 잃자 레이너가 보는 앞에서 참수형을 집행했다.

다음으로 성 스테파노 퐁그라츠 신부가 훨씬 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었다.

그는 성 마르코와 같은 고문을 받은 후 코와 귀가 잘린 뒤 손을 등 뒤로 묶은 채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거세하고 내장이 터질 때까지 횃불로 지졌다.

성 멜키오르 그로지에츠키 신부도 성 마르코 신부와 같은 고문을 당하고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군인들은 성 스테파노 신부도 죽은 것으로 생각해서 그들의 시신을 모두 하수구에 버렸다.

성 스테파노 신부는 그곳에서 거의 20시간 이상 기도하며 살아 있었다고 한다.

온화한 가톨릭 사제들에 대한 잔혹한 살해는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지만, 그들에 대한 장례식은 금지되었다.

가보르 베틀렌 공작이 그들의 매장을 허가하기까지도 6개월이나 걸렸다.

그들의 시신은 처음에 그 지역 성당에 묻혔다가 1635년 카탈리나 팔피(Katalina Palffy) 백작 부인이 그들의 유해를 수습해서 슬로바키아 트르나바의 우르술라회 성당인 성녀 안나(Anna) 성당에 안치하였다.

그들이 순교하고 20년 후에 에스테르곰의 파즈마니 추기경은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게 그들의 시복을 청원했는데, 그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거의 30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들 세 명의 신부는 1905년 1월 15일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1995년 7월 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슬로바키아의 코시체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들의 시성식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30년 전쟁’의 참화 속에서 순교한 개신교 순교자들에게도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새로 시성된 세 명의 성인은 서로 다른 세 나라 출신이지만 같은 신앙을 공유했고, 그 신앙에 힘입어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며 그들의 모범이 상호 이해에 대한 헌신을 불러일으키길 바란다고 했다.

특히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소수민족 간의 우정과 협력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고, 다수와 소수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번영하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7일 목록에서 오늘날 슬로바키아에 있는 카르파티아산맥(Carpathian Mountains)의 코시체에서 에스테르곰의 사제 성 마르코 크리제브차닌과 예수회 소속 사제인 성 스테파노 퐁그라츠와 성 멜키오르 그로지에츠키가 순교했는데, 그들은 굶주림과 수레바퀴형, 화형이라는 극한의 고문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2건)
  • 조지프 틸렌다 저, 박병훈 편, 예수회 성인들 - 예수회 고유미사에서 기념하는 성인과 복자의 약전, 서울(도서출판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4년, 29-31쪽.
  •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코시체 지역의 순교자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311-313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