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인(법정스님 말씀)
주어진 일 열심히 하면서 얽매이지 않아야 자유인
며칠 전 점심을 하려고 단지를 열었다가 쌀봉지가 하나 달랑 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쌀이 단지 속에 가득 있을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고마움이 그 순간 느껴졌습니다. 또 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고마운 것인지 쌀의 존재가 새삼 되새겨 지기도 했습니다.
행복이란 이런 겁니다. 넘치듯 가득 차 있으면 소중한 것을 모르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조금 모자라는 듯 하면 그 존재의 소중함,
고마움을 깨닫게 되고 그 존재가 있으므로 해서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느끼게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자는 남보다 적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생(生)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언가를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비록 남보다 가진 것이 적어 힘들게 살더라도 항상 기쁜 마음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밝게 살아가는 이가 진짜 부자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겠습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라는 <유마경>에 보면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만약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거든 만족할 줄 알라.
넉넉함을 아는 것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편안하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록 천상에 있을지라도
그 뜻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이가 행복도 누릴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그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각자 다른 처지에 놓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그릇에, 제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 그것이 복된 삶을 사는 지혜의 첫걸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조그만 일에도 감사할 줄 알고, 넉넉한 마음을 가질 줄 아는 이들은 주위 사람들까지도 기분 좋게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자신은 물론 이웃까지도 편안하게 해 줍니다.
하지만 항상 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사는 이들은 늘 얼굴을 찌푸리고, 신경질을 내다 보니 자기와는 상관 없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일이 많을 겁니다.
그럼 그의 주위에는 점점 사람들이 멀어져 갈 것이고 그는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좀체로 자신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신도가 노스님을 찾아 뵙고는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고기 먹고, 술마시는 일이 옳은 일입니까? 그른 일입니까?”
그러자 노스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이야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니 중에게 와서 물을
일이 아니오. 다만 먹고 마시는 일을 절제하면 당신은 복을 쌓게
될 것인즉 그리 아시오.”
노스님의 이 말씀은 복이라는 것이 어디서 갑자기 호박 덩어리처럼 굴러 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복스런 일을 하면 복을 받을 것이고, 박복한 짓을 하면 굴러
들어오던 복도 돌아서 나갑니다.
복이라는 한자의 모양에서도 작고 소박한 것에서 복이 온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옷의 변(衣)에, 한일 자(一), 입구 자(口), 그리고 밭전 자(田), 옷
한 벌에 먹을 만큼의 양식을 거둘 밭 한때기 있으면 그것이 바로 복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살면서 헤아릴 줄 알아야 할 것은 이 일이 내게
복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가게에 가서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이것이 내게, 우리 처지에 꼭 필요한 것인가를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 돈이 있다고 해서, 남들이 사니까 나도 산다는 식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 내 삶을 소비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무분별한 과소비 풍조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원인이라고 개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난의 덕을 배워야 할 그런 단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란 물질적인 의미만이 아닙니다.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미덕으로서의 맑은 가난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청빈, 거룩한 가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취하지 않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단촐하게 살아
가는 그런 모습을 이르는 말입니다.
옛날 선비들은 이런덕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요즘은 시대가 그래선지 청빈이라던가, 거룩한 가난이라는 말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또 귀 기울여 들으려는 이도 별로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맑은 가난, 청빈의 삶을 살고자 해야 합니다.
맑은 가난, 거룩한 가난이란 자기 자신을 텅 비우는 일입니다.
온갖 집착으로부터 홀가분하게 벗어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성서에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거룩한 가난입니다. 모든 욕심에서 벗어나면 아주 평온한 상태가
됩니다.
맑은 바람이 우리의 심신을 깨끗하게 정화해 주며 지나가는 듯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꼭 필요한 것만 가지는 미덕으로서의 가난한 삶, 청빈하게 살아가는 그런 이에게 복이 찾아감은 당연지사입니다.
많은 것을 차지하기에 급급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텅빈 충만감이 청빈한 삶에는 깃들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 생활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고, 지혜로운 가치의 선택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는 물질에 의해
판단될 일이 결코 아닙니다.
주방은 주부들의 수련장입니다. 사랑이 깃드는 보금자리이기도 합니다. 절이나 교회, 성당만이 심신을 갈고 닦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한 집안에 한식구로 만난 인연은 소중한 것입니다.
물론 살다 보면 자식이, 남편이 나를 힘들게 만드는 일도 많을 겁니다. 그럴 때면 내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솔뚜껑 운전수를 하면서 이렇게 살고 있는가 허무해지고, 만사가 귀찮아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가 자신의 삶을 보다 한층 고양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깨달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를 이렇듯 허무하게 만드는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실은 살아 계신, 그래서 생생한 법문을 펼쳐주고 계신 부처님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처란 개념을 고정 시키지 마십시오.
부처님은 불단 위에 노랗게 금물을 들인 채 앉아만 계신 분으로, 부처님 오신 날 연등 몇 개 밝혀서 공양 올리면 그만인 그런 존재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내 곁에, 바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도 이웃도, 친구도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한 생각 돌이킴으로 깨달아 보십시오, 저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그를 미워 하고, 원망 해서는 안됩니다. 저들은 내게 인욕 정진을 가르치러온 불
보살님입니다. 설령 내 잘못이 아니라 해도 누군가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은 몇 생을 두고 더 갈등하는 인연을 짓게 만드는 과보가 될 뿐입니다.
시덥지 않게 생각되는 사람일수록 그들 불 보살님이라 여기고 공양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인욕 정진의 첫걸음입니다.
요즘 어머니들이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옥만 있을 뿐 자꾸만 사라져가는 가정을 지키는 것입니다. 핵가족화 현상으로 몇 안되는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흔지 않은 요즘 세상에는 가옥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두가 바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족이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을 나누는 이들입니다.
가정을 지키는 일은 물론 어머니 혼자 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만
우선은 어머니들부터 노력을 기울여 보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하루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아니 단 30분만이라도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겁니다.
그럼 지금 내가 해야할 바가 무엇인지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본래 내가 지녀왔던 따뜻한 가슴을 다시 되찾게 됩니다.
한 집안의 중심인 어머니의 가슴이 따뜻해지고, 그 어머니가 자신이 처한 위치에 대해 바로 알게 되면 다른 가족들도 차츰 변해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따뜻한 가슴의 사람들이 꾸미는 가정, 그것이 바로 극락입니다. 늘 복되고, 평안이 깃든다는 세상, 극락은 어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사를 많이 하고, 보시금을 잔뜩 낸다고 해서 극락을 약속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이렇게 절에 와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처님 앞에서 그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뒤돌아 보고, 앞으로는 어떤식으로 살아갈 것인지 다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초하루니까.
고 3짜리 자녀를 위해 기도하러 절에 나오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일종의 계약 행위일 뿐입니다.
<채근담>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복은 일이 적은 것보다 더 큰 복이 없고, 화(재앙)는 마음 쓸 일이 많은 것보다 더 큰 화가 없다.”
또 옛 선사들은 “무사시 귀인이라” 법문을 하고 계십니다.
일 없는 사람이 귀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일이 없다는 것은 일거리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그 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일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귀인이요, 자유인이라는 겁니다. 일이 많다고 힘들어 하는 것은 이미 그 일에 얽매여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을 당연히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라고 생각한다면 일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떻게 정성 들여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의무감 때문에 할수 없이 일을 하자니 일도 많고, 힘이 들어 불평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일이라 해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했는가에 따라 업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여러분에게 제가 숙제를 한 가지 내드리겠습니다.
이 숙제는 권유사항이니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첫째는 일주일에 하루는 텔레비젼을 보지 않는 날로 정해 지키는 겁니다.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만 그것이 어렵다면 우선 나 혼자만이라도 실행에 옮겨 보십시오.
둘째는 하루에 단 한시간이라도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라면 더더욱 독서를 해야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자식들과는 달리 어머니들은 항상 그 자리라면 아이들이 그런 어머니를 무시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공부란 학생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교과서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사 주간지가 아니라 좋은 책으로 독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자는 겁니다.
세째로는 보름에 한끼씩은 단식을 해 보시라는 겁니다.
불과 한끼지만 스스로 마음을 내 단식을 하면서 이 세상에 굶주린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이제 우리나라에는 굶주리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만 지구 저편에는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배를 주리고
있고, 심지어는 아사를 당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 가까이는 북한의 우리 동포들이 식량이 부족해서, 요즘 들어서는 홍수로 굶주리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들의 고통을 나누려는 마음을 지녀 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목소리을 낮추시라는 겁니다.
외국을 나가 보면 우리나라 사람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곁에 사람이 있건 없건, 장소가 어디든 가리지 않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사실 부끄럽습니다.
말을 하는 데에도 예절이 있는 법입니다. 나만 생각하지 말고 이웃 사람들에게 행여라도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항상 조심하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는 지금까지 지녀 왔던 것을 놓아야 할 그런 때가 옵니다. 생을 마치는 그 순간이 바로 그 때입니다.
생에 대한 애착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해도 이때만큼은 살아있는 동안의 그 숱한 애착은 물론 육신까지도 버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내 생명을 잉태시켜준 어머니의 몸을 버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내 생명을 잉태시켜준 어머니의 몸을 버렸습니다.
또 살면서도 끊임없이 버리는 작업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을 당해서는 이 몸까지 버리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러나 버린다는 행위는 새것을 얻기 위한 몸짓이라는 사실, 보다 본질적인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겠습니다.
- 법 정 스 님 -
댓글 4
잠시 틈을내서 카페들어왔는데 글이 길어 차근차근 읽어야 겠네요.
마음속 깊이 생각하면서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야 게ㅅ
따뜻한 가슴의 사람들이 꾸미는 가정, 그것이바로 극락입니다. 늘 복되고 평안이 깃든다는 세상, 극락은 어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는 것이 새로운 시작이죠, 버리는 훈련을 많이 해야겠어요. 글 쓰시느라 수고 많았어요. 법정스님의 큰가슴을 닮고싶어요. 그것 또한 하느님 사랑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