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도원장 · 증거자
성 막시모
(Maximus the Confessor)
막시무스 · 막씨모 · 막씨무스
성 막시무스(또는 막시모)는 보통 성 막시모 증거자(Maximus Confessor)로 불리는데, 이는 그가 가톨릭교회의 정통 교의를 수호하는 데 바친 노력과 그로 인해 겪은 고통 때문이다.
그는 580년경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30살 때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년 재위)의 비서를 역임하고, 613년경 보스포루스(Bosporus) 해협 건너 콘스탄티노플의 아시아 쪽 해안 지역인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 오늘날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Uskudar]의 옛 이름)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고 나중에 수도원장을 지냈다.
그는 625년에 그의 제자인 성 아나스타시오(Anastasius, 7월 22일)와 함께 키지쿠스(Cysicus, 오늘날 튀르키예 발리케시르주[Balıkesir州]의 에르데크[Erdek] 근처 뒤즐러[Duzler])의 성 제오르지오(Georgius) 수도원으로 옮겼다. 626년에 페르시아가 침략했을 때 성 막시모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 오늘날 튀니지의 수도인 튀니스[Tunis] 일대에 있었던 고대 도시) 근처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수도 생활과 신학 연구에 힘쓰며 당시 교회를 어지럽혔던 이단과의 신학적 논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성 막시모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인간이 된 신성(神性)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mus) 이단과 맞서 투쟁했다.
그리고 그는 콘스탄티노플과 아프리카와 로마를 오가며 단성설에서 파생된 그리스도 단의설(單意說, Monotheletismus)에 대항해 치열한 논쟁을 펼쳤다.
그는 645년 아프리카에서 열린 여러 교회 회의에 참석해서 단의설을 거부하도록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649년에 교황 성 마르티노 1세(Martinus I, 4월 13일)는 교황좌에 즉위하고 몇 달 후에 라테라노(Laterano) 교회 회의는 개최하여 그리스도 단의설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 단의설에 관한 모든 토론을 금지하고 교회 문제에 직접 관여하고자 한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년 재위)의 칙령 엑테시스(Ecthesis)와 콘스탄스 2세 황제(641~668년 재위)의 칙령 티포스(Typos)를 거부하고 저항하였다.
이 교회 회의에 평범한 수도자였던 성 막시모가 교황의 초청으로 참석함으로써 그의 신학적 주장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 정책에 대한 반대와 저항에 격분한 콘스탄스 2세 황제는 653년에 성 막시모와 교황 성 마르티노 1세를 반역죄로 기소하고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하도록 명령했다. 654년 9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은 교황 성 마르티노 1세는 다음 해에 유배형으로 감형되어 크림(Kyrm)반도에 있는 케르소네소스(Chersonesos,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항구도시인 헤르손[Cherson])로 떠나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잔혹한 대우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656년 9월 16일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다.
성 막시모는 655년에 트라키아(Thracia)의 비지아(Bizya, 오늘날 튀르키예의 비제[Vize])로 유배되었는데, 충실한 제자였던 성 아나스타시오가 그의 유배와 고난의 여정에 늘 함께했다.
그 뒤로도 성 막시모는 그리스도 단의설에 대한 토론을 금지하는 황제의 칙령을 계속 거부해 662년에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가 재판을 받았다.
그 결과 더는 말도 글도 쓰지 못하도록 혀와 오른손을 잘린 후 제자들과 함께 로마 제국에서 가장 외지고 험난한 지역인 흑해 동쪽 연안의 라지카(Lazica)로 추방당했다.
성 막시모는 고문의 후유증과 굶주림, 혹독한 여정 끝에 그해 여름 캅카스산맥(Caucasus Mountains)에 있는 스케마리스 요새(Schemaris Fortress)에 도착해 투옥되었고, 662년 8월 13일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끝까지 스승과 고난의 여정을 함께했던 성 아나스타시오는 목적지인 스케마리스 요새로 오던 중 또는 도착하자마자 그동안 겪었던 고문과 고난의 상처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
성 막시모는 가톨릭교회의 정통 교의를 옹호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겪고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어 순교자 못지않은 증거자(고백자)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비록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추방 중에 선종했지만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하였다.
성 막시무스는 비잔틴 신비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성경과 교부 문헌에 관한 주석서 외에도 교의적 논쟁에 관한 논문과 수덕 신비신학에 관한 글, 그리고 전례의 신비적 의미에 관한 저서 등을 남겼다.
성 막시모는 그리스도인과 이교인의 사상을 설득력 있게 종합함으로써 7세기에 가장 중요한 그리스 사상가로 기억되고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1월 21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13일 목록에서 콘스탄티노플에서 수도자인 성 막시모가 학식과 가톨릭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용감하게 그리스도 단성론자들과 싸우다가 이를 옹호하는 콘스탄스 2세 황제에게 손과 혀가 잘리는 고문을 당했으며, 케르소네소스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때 아나스타시오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제자와 다른 많은 이들이 유배 생활에서 온갖 고문과 고난을 겪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캅카스산맥의 츠케니스트칼리강(Tskhenistskali R.) 기슭에 있는 스케마리스 요새에서 콘스탄티노플 근처 크리소폴리스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성 막시모 증거자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는 학식과 가톨릭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단성론 이단에 맞서 격렬하게 싸우다가 이단을 옹호하는 콘스탄스 2세 황제에 의해 오른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으며, 그 후에 아나스타시오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제자와 함께 혹독한 감옥 생활과 수많은 고문을 당하고 흑해 동쪽 연안으로 유배되어 하느님께 자기 영혼을 바쳤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2건)
- 지그마르 되프 · 빌헬름 게어링스 편, 한국교부학연구회 하성수 · 노성기 · 최원호 역, 교부학 사전 – 막시무스(고백자), 강원도 횡성군(한국성토마스연구소), 2022년, 268-271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4권 - '막시모 콘페소르',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7년, 2498-2499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