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베르트 콜란트

신부 · 순교자

엥겔베르트 콜란트

(Engelbert Kolland)

엔젤베르토 · 엔젤베르투스 · 엔젤베르트 · 엥겔베르토 · 엥겔베르투스 · 콜란드

7월 10일📍 다마스쿠스(Damascus)🕰 1827-1860년

성 엥겔베르트 콜란트(Engelbert Kolland)는 1827년 9월 21일 오스트리아 티롤(Tirol) 지방 질러탈의 람사우(Ramsau im Zillertal)라는 마을에서 카예탄 콜란트(Kajetan Kolland)와 마리아 스포러(Maria Sporer)의 아들로 태어나 미카엘(Michael)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모는 가톨릭교회를 떠나 루터교에 더 가까웠고, 매년 여름이면 질러탈 계곡으로 가서 벌목꾼으로 일했기에 자녀들은 친척인 마리아 브뤼거(Maria Brugger)의 손에 맡겨져 양육되었다.

미카엘은 선량하고 신앙심 깊은 아이로 자랐다.

그의 부모는 사제와 주교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고향을 떠나서 슈타이어마르크(Steiermark)의 라하우(Rachau)로 이주하였다.

미카엘과 그의 동생 플로리안(Florian)은 마리아 브뤼거의 집에 남았다.

잘츠부르크(Salzburg)의 대주교는 어린 미카엘에게서 사제 성소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와 그의 동생을 교구 신학교에 무료로 입학시켰다.

하지만 4년 후에 너무 산만하고 라틴어 공부에 어려움을 겪으며 나이 많은 급우와도 갈등을 빚어 그만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슈타이어마르크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다가 1846년에 학업을 재개하였다.

어느 날 그는 거리에서 작은 형제회의 수련자들을 만나 그들의 겸손함과 사려 깊은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처럼 되고 싶었던 미카엘은 몇 달 후인 1847년 8월 19일, 잘츠부르크의 성 레오폴도 관구에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엥겔베르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수련기 동안 그는 포도주, 맥주, 커피를 절대 마시지 않겠다고 서약했고, 수도원 생활이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고,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1850년 11월 22일에 종신 서원을 발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13일에 트렌토(Trento)에서 사제품을 받고 볼차노(Bolzano)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볼차노의 작은 형제회 성당에서 보좌로 사목하면서 뛰어난 언어적 재능으로 성지에서 선교사로 활동 중이던 신부의 지도하에 아랍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을 배웠다.

그는 사제품을 받기 전에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지 관구의 선교사로 떠나겠다는 뜻을 장상에게 전했는데 그 뜻이 받아들여졌다.

성 엥겔베르트 콜란트 신부는 1855년 성지 관구 소속으로 임명되어 3월 하순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출발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거쳐 팔레스티나의 야파(Jaffa)까지 배를 타고 이동했다.

심한 뱃멀미로 고생한 그는 4월 17일에 예루살렘의 성묘 수도원에 도착해서 주님께서 직접 걸으시고 귀한 피를 흘리셨을 성지 곳곳을 순례한 후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바브 투마(Bab Touma)에 있는 성 바오로 회심 성당의 보좌로 파견되어 주임인 성 카르멜로 볼타 바눌스(Carmelo Volta Banuls) 신부의 사목을 도왔다.

그는 주임신부가 병에 걸리자 아랍어에 능통한 다른 신부가 없는 동안 실질적인 사목 직무를 떠맡게 되었다.

그는 다마스쿠스의 신자들로부터 ‘아부나 말락’(Abuna Malak)으로 불렸는데, 이는 ‘천사 신부’라는 뜻이다.

독일어로 ‘천사처럼 빛나는’이란 뜻을 지닌 엥겔베르트라는 이름이 길고 발음하기도 어려워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는 성사를 집전하고 병자들을 돌보며, 수도원 성당에 종탑을 세우고 종을 다는 데도 주도적으로 나섰다.

한편 크림 전쟁(Crimean War, 1853~1856년)의 여파와 1856년 파리(Paris) 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안으로 인해 시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무슬림으로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1856년에 술탄은 오스만 제국 내의 모든 시민은 종교와 무관하게 세금 납부와 공직 임명에 있어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는데,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가 일부 무슬림에게는 쿠란에 대한 모욕으로 해석되었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고대 시리아의 무슬림 종파인 드루즈족(Druze) 지역으로 확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들과 충돌할 위험이 점점 커졌다.

결국 1860년 봄, 양측의 사소한 충돌이 공개적인 충돌로 이어지면서 그리스도교 마을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튀르키예 당국은 소요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방관하는 듯했다.

당시 다마스쿠스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성 엠마누엘 루이스 로페스 신부는 1860년 7월 2일 성지 관구 책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의 신앙은 드루즈교도와 다마스쿠스 파샤(Pasha)에 의해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럽인이든 동양인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비극적인 사태로 인해 1860년 5월 30일과 6월 26일 사이에 레바논 전역에서 6천 명 이상의 신자들이 살해되었고, 자흘레(Zahle)에서 5명의 예수회원이 목 졸려 죽었으며, 데이르 알 카마르(Deir al-Qamar)에서는 동방 가톨릭교회에 속한 마론파(Maronite) 수도원의 원장이 산 채로 가죽을 벗겨지는 만행 끝에 순교하고 수도자 20명도 도끼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7월 9일, 잔혹한 광풍이 다마스쿠스까지 퍼지면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시작되었다.

오늘날 추산한 바에 따르면 시리아 전역에서 약 1만 4천여 명이 살해되었고, 그 가운데 약 2천여 명이 다마스쿠스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7월 9일 폭도들이 다마스쿠스의 그리스도인 거주지로 들이닥쳤을 때 성 엠마누엘 루이스 로페스 수도원장은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알제리 종교 지도자인 에미르 압델카데르(Emir Abdelkader)의 궁전으로 대피시켰다.

하지만 그와 작은 형제회의 수도자들은 밖에 남아 있는 신자들과 함께하고자 그들을 데리고 견고한 성벽과 철판으로 보강한 작은 형제회의 성 바오로 성당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성체를 흠숭하며 고해성사를 주고 성체를 받아 모셨다.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있었는데, 7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에 어느 배신자의 제보로 비밀 통로를 통해 폭도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성 엠마누엘 루이스 로페스 신부는 즉시 체포되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거나 죽음을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죽겠다.”라고 단호히 말하고 제단에서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그가 첫 번째로 순교한 후 다른 7명의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성 카르멜로 볼타 바눌스 신부가 가슴에 총을 맞은 후 배교를 거부하고 뭉둥이에 맞아 순교한 후 성 엥겔베르트 콜란트 신부는 수도원 테라스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지만 에미르 궁전까지 가지는 못했다.

그는 마론파 신자와 함께 인근 가정에 숨었다가 결국 추격자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작은 형제회의 갈색 수도복과 샌들만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성 엥겔베르트 콜란트는 마당으로 끌려 나가 도끼로 내려치는 박해자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인이고 사제이기에 죽더라도 배교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결국 그는 네 번이나 도끼에 맞는 고통 속에서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는데, 그날 밤 수도원 밖에서 순교한 유일한 수도자였다.

그때 성당에 함께 피신했었던 마론파 평신도 삼형제도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증오로 인해 순교하였다.

그들이 학살되고 12일 후에 용감한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수도원 지하에 숨겼다.

이들 11명은 보통 ‘다마스쿠스의 순교자들’(Martyrs of Damascus)로 불린다.

성 엠마누엘 루이스 로페스와 일곱 명의 동료 수도자들에 대한 작은 형제회의 시성 운동은 1872년에 시작되었고, 1926년 5월 2일 교황청은 그들의 순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그해 10월 10일에 시복식을 거행한다고 예고했다.

한편 다마스쿠스 마론파 대주교의 요청으로 신원이 확인된 세 명의 마론파 평신도들도 뒤늦게 시복 대상에 포함되었는데, 그동안 그들의 순교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준비해두었기에 빠르게 시복 절차를 완료해 1926년 10월 10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엠마누엘 루이스 로페스와 10명의 동료 순교자들’로서 함께 복자품에 올랐다. 21세기 들어서면서 ‘11위의 다마스쿠스의 순교복자들’에 대한 시성 운동이 활발해졌다.

그들의 중재로 여겨지는 기적이 많이 목격되고 점점 전쟁의 불길에 휩싸여 가는 중동 지역을 향해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2022년 마론파 주교회의는 마론파 평신도 성덕의 영웅적 모범인 삼형제의 시성을 청원했다.

작은 형제회 총장과 관계자들도 2026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 선종 800주년’을 기념하며 그들의 기적 심사를 면제하는 특별 시성 절차를 요청하였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를 받아들여 2023년 3월 23일 특별 시성 절차를 승인했고, 2024년 5월 21일 정기 회의에서 시성 추진안을 최종 승인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20일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들 모두를 성인품에 올렸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10일 목록에서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성(당시에는 복자) 엠마누엘 루이스 로페스 사제와 그의 동료들, 즉 작은 형제회의 수도자 7명과 마론파 평신도 삼형제가 순교했는데, 그들은 배신자의 계략으로 적에게 넘겨져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이름을 새로 추가하였다.

성 엠마누엘 루이스 로페스(Emmanuel Ruiz Lopez)와 10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작은 형제회의 수도자로 성 카르멜로 볼타 바눌스(Carmelo Volta Banuls) 신부, 성 엥겔베르트 콜란트(Engelbert Kolland) 신부, 성 니카노르 아스카니오 소리아(Nicanor Ascanio Soria) 신부, 성 니콜라스 마리아 알베르카 토레스(Nicolas Maria Alberca Torres) 신부, 성 페드로 놀라스코 솔레르 멘데스(Pedro Nolasco Soler Mendez) 신부, 성 프란시스코 피나소 페냐베르(Francisco Pinazo Penalver) 수사, 성 후안 하코브 페르난데스(Juan Jacob Fernandez) 수사, 그리고 마론파 평신도 삼형제인 성 프란치스코 마사브키(Franciscus Massabki), 성 압델 무티 마사브키(Abdel Mooti Massabki), 성 라파엘 마사브키(Raphael Massabki)이다.

작은 형제회 소속 8명 중에서 6명은 수사신부이고 2명은 평수사이다.

국적으로는 7명이 에스파냐 사람이고 1명이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3명의 마론파 평신도 삼형제는 모두 레바논 출신이다.♣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