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리 마르탱

평신도 · 자수 공예가

성녀 젤리 마르탱

(Zelie Martin)

게랭 · 게린 · 마르띠노 · 마르띠누스 · 마르티노 · 마르티누스 · 마르틴 · 마리 · 마리아 · 메리 · 아젤리 · 젤리아

7월 12일🕰 1831-1877년

성 루도비쿠스 조제프 스타니슬라우스 마르탱(Ludovicus/Louis Joseph Stanislaus Martin, 또는 루도비코/루이 마르탱)은 1823년 8월 22일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Aquitaine) 지방의 보르도(Bordeaux)에서 노르망디(Normandie) 출신 장교의 다섯 자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형제자매들이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모두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고, 아버지가 직업이 군인이었기에 여러 곳의 주둔지를 돌아다니며 성장했다. 1828년에 아버지의 마지막 근무지였던 알자스(Alsace) 지방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갔고, 1830년에는 퇴역한 아버지를 따라 고향인 노르망디로 돌아와 알랑송(Alencon)에 정착했다.

성 루이 마르탱은 학업을 마친 후 종교적 삶에 매료되어 1843년 과거 몽주(Mont-Joux) 고개로 알려졌던 그랑 생베르나르(Grand-Saint-Bernard) 고개에 설립된 요양소에서 구호와 환대의 사명을 수행하는 성 니콜라오와 몽주의 성 베르나르도 정규 수도회(Congregatio Sanctorum Nicolai et Bernardi Montis Iovis, C.R.B.)에 입회를 신청했으나 라틴어를 모르면 입회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알랑송으로 돌아와 1년 넘게 열심히 공부했으나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아버지의 친구이자 시계 제작자의 견습생으로 지냈던 경험을 살려 파리(Paris)에서 3년간 머물며 기술을 배워 시계 장인이 되어 알랑송으로 돌아왔다.

그는 1850년 11월 노트르담 대성당과 가까운 퐁뇌프(Pont Neuf) 거리에 시계 수리점을 열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열심히 시계를 수리하고 제작했으며 나중에는 금세공 일까지 하며 사업을 확장하였다.

그는 열심한 신앙인으로서 주일에는 꼭 가게 문들 닫았고, 주일 미사뿐만 아니라 평일 미사에도 자주 참례하며 성체 조배와 순례를 즐겨 실천했다.

또한 정원에 성모상을 모셔두고 가난한 사람에게 관대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주저 없이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는 1857년에 마을 외곽에 있는 작은 별장 건물인 파비용(Pavillon)을 매입해 안식처로 삼아 조용히 묵상하며 책을 읽고 기도하며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렇게 신앙과 일과 여가를 즐기며 34살이 되도록 결혼에 관한 생각 없이 독신으로 지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에게는 큰 슬픔이었다.

한편 성녀 마리아 아젤리 게랭(Maria/Marie Azelie/Zelie Guerin, 또는 젤리 게랭)은 1831년 12월 23일 프랑스 북서부 오른(Orne) 지방의 알랑송에서 멀지 않은 생드니쉬르사르통(Saint-Denis-sur-Sarthon)의 열심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엄격한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가정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13살이 된 1844년 가족과 함께 알랑송으로 이주해 왔다.

그리고 두 살 위 언니인 마리 루이즈(Marie-Louise)와 함께 알랑송의 랑크렐(Lancrel) 거리에 있는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녀회(Congregatio Sacrorum Cordium Iesu et Mariae, SS.CC.; 보통 피크퓌스[Picpus] 수도회로 불린다)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들어가 엄격한 교육을 받고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마쳤다.

그 후 성녀 젤리 게랭은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헌신하는 수도 성소에 마음이 끌려 알랑송에 있는 성 빈첸시오 드 폴 자선 수녀회(Societas Filiarum Caritatis a Sancto Vincentio de Paulo, DC)에 입회를 신청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거절당했다.

결국 수도 성소보다는 결혼 성소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고 결혼해서 많은 자녀를 낳아 모두 하느님께 봉헌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후에 성녀 젤리 게랭은 전문학교에 다니며 레이스(자수 공예의 일종) 기술을 배워 1853년에 언니와 함께 작게나마 레이스 제조 사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평소 꼼꼼한 성격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레이스 사업을 운영하며 그 분야에서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언니인 마리 루이즈는 1858년 29살의 나이에 르망(Le Mans)에 있는 성모 마리아 방문 수도회’(Ordo Visitationis Beatissimae Mariae Virginis, VSM)에 들어가 마리 도시테(Marie-Dosithee)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녀가 되었다.

평소 아들의 결혼 문제로 고민하던 성 루이 마르탱의 어머니는 레이스 기법을 배우러 갔다가 성녀 젤리 게랭을 만나 그녀의 성품에 매료되어 아들의 짝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사르트 다리(Pont sur la Sarthe) 위에서 만나게 된 성 루이 마르탱과 성녀 젤리 게랭은 사랑에 빠져 불과 3개월 후인 1858년 7월 13일 자정에 알랑송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혼인성사를 올렸다.

그들은 7월 12일 밤 10시에 알랑송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두 시간 후인 7월 13일 자정에 조용하고 간소하게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혼인성사를 올렸는데, 이는 당시 자정 이후에 금식하지 않으면 성체를 영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혼인성사 중에 성체를 모시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35살의 성 루이 마르탱과 27살의 성녀 젤리 마르탱(Zelie Martin)은 퐁뇌프 거리의 아담한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성 루이 마르탱의 시계 수리점 뒤편에 살았고, 성녀 젤리 마르탱은 그 옆에 작업실을 마련해 계속해서 레이스 사업을 이어갔다.

그들은 둘 다 젊어서 수도 생활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으나 하느님의 뜻이 다른 데 있음을 알고 혼인을 통해 그 뜻을 이루어가고자 했고, 대가족을 이루어 하느님의 뜻에 부응하고자 했던 마르탱 부부는 모두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다.

하지만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당시 환경에서 두 아들을 포함한 네 명을 어린 나이에 떠나보내야 했고, 나머지 다섯 명의 딸은 부모의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해 모두 수녀(네 명은 가르멜회, 한 명은 성모 방문회)가 되었다.

그 다섯 가운데 막내딸이 바로 리지외(Lisieux)의 맨발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여 성녀가 된 데레사(Teresia, 1873~1897년, 10월 1일)이다.

성 루이 마르탱과 성녀 젤리 마르탱 부부는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일상의 삶 안에서 늘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딸들을 훌륭하게 교육하였다.

그들은 매일 아침 새벽 미사에 참례하고 자주 성체를 모시고 조배했으며 가족과 함께 금식과 아침저녁 기도를 철저히 실천했다.

또한 주일은 온전히 쉬면서 노인과 병자들을 방문하고 가난한 이들을 식탁에 초대하거나 필요한 도움을 주었다.

성녀 젤리 마르탱은 자선 사업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업을 하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많이 고용해 일자리와 기술을 제공했다.

그렇게 마르탱 부부는 가정 안에서부터 사랑과 기도의 분위기를 그리고 사도적 열정으로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에게 올바른 신앙인의 모범으로 존경을 받았다.

이는 막내딸인 성녀 데레사가 쓴 “자서전”이나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성 루이 마르탱은 1870년에 성공적인 아내의 사업을 전적으로 돕기 위해 자신이 운영하던 시계 사업을 모두 조카에게 매각하였다.

한편 직장과 가정의 어려움, 그리고 1890년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여파로 마르탱 부부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특히 성녀 젤리 마르탱은 본인의 건강 문제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네 명의 어린 자녀를 병으로 일찍 떠나보내며 어머니로서 누구보다 큰 아픔과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성녀 젤리 마르탱은 영적인 강인함과 온유함으로 모든 슬픔을 이겨나갔고,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며 자신의 의무에 대해 용감하고 흔들림 없는 충실함을 견지했다.

그녀는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자 고통받는 예수 성심의 형제회 회원으로서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면서 결혼 생활을 통해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모든 일을 온전히 실천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성녀 젤리 마르탱은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인 남편과 함께 하느님과 교회의 정신이 충만한 평온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자 했고, 특별히 자녀들의 건강과 신앙적인 성장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성모님의 도우심을 빌며 자주 성지를 순례하며 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성녀 젤리 마르탱은 1876년 10월 가슴에 부기가 심해짐을 느껴 의사를 찾았고, 그로부터 유방암에 걸렸음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걸린 병의 종류와 그 심각성을 알게 되자 곧바로 가족, 특히 어린 딸들을 위로하고 보살피는 데 힘썼다. 1877년 6월, 그녀는 어린 두 딸은 집에 남겨두고 나머지 세 명의 딸들과 함께 루르드(Lourdes) 성지로 순례를 떠났다.

그곳에서 그녀는 병의 치유보다는 더욱 깊은 신앙심과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마음을 선물로 받았다.

암이 온몸으로 퍼지면서 때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그녀는 언제나 믿어왔던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의지하며 그 모든 고통을 이겨냈다.

성녀 젤리 마르탱은 1877년 8월 28일, 남편과 오빠 이시도르 게랭(Isidore Guerin)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극히 경건한 마음으로 병자 성사와 마지막 성체를 모신 후 거룩한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는 당시 다섯 살이었던 막내딸 성녀 데레사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1877년에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야 했던 성 루이 마르탱은 그들이 결혼했던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한 후 아내와 함께했던 레이스 사업을 정리하고 집도 팔고 노르망디의 리지외로 이사했다.

그곳에는 아내의 오빠이자 약사인 이시도르 게랭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성 루이 마르탱은 딸들의 신앙 교육에 전념할 수 있었고, 관상 기도가 가득한 특별한 분위기 속에서 딸들을 하느님께 정성껏 봉헌하였다.

그는 특히 막내딸 성녀 데레사의 수도 성소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주저 없이 나이 어린 딸의 가르멜 수녀회 입회를 지지하였다.

왜냐하면 14살 때부터 리지외에 있는 맨발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려는 성녀 데레사는 수녀원으로부터 21살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응답과 함께 거절당했다.

그 후 두 딸과 함께 로마(Roma)를 순례하던 중 교황 레오 13세(Leo XIII)를 알현할 기회가 생겼을 때 성녀 데레사가 갑자기 교황의 품으로 달려들어 수녀원 입회를 허락해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많이 당황하기도 했다.

결국 막내딸인 성녀 데레사는 15살 때인 1888년 4월 9일 리지외 교구장 주교의 특별한 허락을 받고 수녀원에 입회할 수 있었다.

이미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원에는 그녀의 맏언니인 마리 루이즈(Marie-Louise, 1860~1940년)와 둘째인 마리 폴린(Marie-Pauline, 1861~1951년)이 수녀로 생활하고 있었다.

성 루이 마르탱은 아내인 성녀 젤리 마르탱과 함께 모든 자녀가 하느님께 봉헌되기를 바랐던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기뻐하였다.

결국 살아남은 다섯 명의 딸 가운데 넷은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했고, 셋째인 마리 레오니(Marie-Leonie, 1863~1941년)는 캉(Caen)의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런데 성 루이 마르탱은 막내딸이 수녀원에 들어가기 전인 1887년에 몸의 왼쪽이 마비되는 뇌졸중을 겪었지만,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병간호했던 마리 셀린(Marie-Celine, 1869~1959년)과 성녀 데레사와 함께 로마 순례를 마칠 정도로 잠시 회복되었다.

하지만 1888년에 증상이 더 악화하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에 한없이 기뻐하며 주저 없이 성모님께 자신을 바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기억상실과 판단력 저하를 보이는 등 여러 고통스러운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시적인 정신 장애도 있었지만, 간간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완전한 평온함을 유지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며 자선과 열정을 드러내곤 했다.

다행히 상태가 조금 호전되어 1889년 1월 10일 막내딸인 성녀 데레사가 ‘아기 예수와 성면(聖面)의 데레사’라는 수도명을 선택하고 수도복을 입는 착의식에는 참석할 수 있었다.

성녀 데레사의 착의식 이후 다시 한번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결국 1889년 2월 12일, 캉에 있는 정신병원인 ‘선한 목자 요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곳에서 그는 시련 중에도 건강을 주시고 사도직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실제로 그는 그곳에서 매우 평온하게 지내며 모든 사람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많은 시간을 성당에서 기도하며 몸 상태가 좋을 때는 매일 성체를 모셨다.

다른 환자들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고통 속에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1892년 5월, 전신마비로 고통받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으로 리지외의 가르멜회 수녀원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세 명의 딸 수녀들이 건네는 작별 인사에 ‘하늘에서’라는 믿음 가득한 대답을 했다.

이는 그가 평소에 늘 소망했던 것을 가장 잘 드러낸 말이었다.

성 루이 마르탱은 1893년 여름에 이시도르 게랭이 상속받은 아르니에르쉬르이통(Arnieres-sur-Iton)에 있는 라뮈스(La Musse) 저택으로 갔다.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요양하던 중 이듬해에 다시금 심각한 뇌졸중으로 쓰러져 넷째딸인 마리 셀린의 보살핌을 받으며 병자 성사를 받고 1894년 7월 29일 주일 아침에 평화롭게 선종하였다.

성 루이 마르탱의 시신은 리지외로 옮겨져 대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린 후 8월 2일 매장되었다.

마리 셀린은 가르멜회 수녀원에 있는 자매들에게 ‘아버지는 천국에 계십니다’라고 편지를 썼고, 그해 9월 14일에 마지막으로 가르멜회에 입회하였다.

한편 성녀 데레사는 아버지가 하늘로 가고 3년 뒤인 1897년 9월 30일 24살의 젊은 나이로 선종할 때까지 9년 반 동안 지극히 평범한 수도 생활을 했는데, 사후에 출판된 그녀의 “자서전”이 동료 수녀들과 많은 신자에게 큰 감동을 주면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교황 비오 11세는 성녀 데레사가 선종한 지 26년만인 1923년 4월 29일 시복식을 거행했고, 곧이어 1925년 5월 17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성식을 갖고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로 선포하였다.

성녀 데레사의 생애와 수녀원장이 된 둘째 언니 마리 폴린의 명으로 쓰게 된 “자서전”의 내용을 통해서도 성 루이 마르탱과 성녀 젤리 마르탱 부부의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들에 대한 시복 시성 절차가 시작되었다.

이들 부부의 시복 절차는 1957년 바유-리지외(Bayeux-Lisieux) 교구 주교가 역사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고, 1958년 10월 13일 마르탱 부부의 유해를 리지외 마을 공동묘지에서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기념 준대성당 뒤편으로 이장하였다.

그들의 묘비에는 성녀 데레사의 글귀,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지상보다 천상에 더 어울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에게 주셨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1960년까지 마르탱 부부의 삶과 덕행 그리고 성덕에 대한 교구 차원의 조사와 심사(재판)가 진행되었다.

이어서 교황청의 면밀한 신학적 검토와 기적 심사를 통과한 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1994년 3월 26일 마르탱 부부의 영웅적 덕행을 인정하며 ‘가경자’ 칭호를 부여하였다. 2008년 5월에 그들의 무덤을 발굴하여 유해를 성녀 데레사 기념성당 지하 소성당에 안치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는 2008년 10월 19일 전교주일에 리지외에 있는 성녀 데레사 대성당에서 이들 부부를 함께 시복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부부를 함께 복자품에 올리기로 했을 때 두 사람의 축일을 언제로 정해야 할지 고심하였다.

보통은 ‘천상 탄일’, 바로 선종한 날을 축일로 정하는 것이 교회의 전통인데 마르탱 부부의 선종한 날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94년 이 부부를 가경자로 선포하고 오랫동안 그들의 시복을 소망했던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뜻했던 대로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인 7월 12일을 축일로 정하게 되었다.

마르탱 부부의 시복은 세상의 모든 부부에게 결혼과 가정생활이 수도 생활만큼이나 성덕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범이었다.

그들이 단지 성녀 데레사의 부모이기에 시복된 것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 안에서 신앙인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며 성덕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2013년 에스파냐 발렌시아 대주교의 요청으로 복자 마르탱 부부의 시성 절차가 시작되었다. 2014년에 교황청 의학 위원회에서 어린 소녀 카르멘(Carmen)의 기적적 치유 사실을 확인하고 신학 위원회 등의 조사를 거쳐 복자 루이 마르탱과 복녀 젤리 마르탱의 전구를 통한 기적임을 인정받았다. 2015년 3월 18일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은 시성 절차에 필요한 기적 심사를 승인하는 교령에 서명했고, 2015년 10월 ‘교회와 현대 세계에서 가정의 소명과 사명’을 주제로 바티칸에서 열리는 제14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기간에 시성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10월 1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노드 중에 성인품에 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 강론을 통해 “이 성스러운 부부인 성 루이 마르탱과 성녀 젤리 마르탱은 가족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봉사하며 살았고, 매일같이 신앙과 사랑으로 가득 찬 환경을 만들었으며, 그러한 환경 안에서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포함한 딸들의 성소를 꽃피웠다.”라고 밝혔다.

교회 역사상 최초로 동시에 시성된 마르탱 부부는 결혼 생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교황청 시성부는 성 마르탱 부부의 전례 기념일을 각각 선종한 날인 7월 29일(성 루이 마르탱)과 8월 28일(성녀 젤리 마르탱)로 기록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이 부부의 결혼기념일인 7월 12일에 공동으로 성 마르탱 부부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2건)
  • 엘렌 몽쟁 저, 조연희 역, 루이와 젤리, 서울(가톨릭출판사), 2020년.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 '데레사, 리지외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6년, 1706-1708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