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부 · 설립자 · 순교자
성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
(Peter Poveda Castroverde)
까스뜨로베르데 · 베드루스 · 뽀베다 · 페드로 · 페트루스 · 피터 · 피에르 · 피에트로
성 페트루스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Petrus Poveda Castroverde, 또는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는 1874년 12월 3일 에스파냐 남부 하엔(Jaen) 근처의 광산 도시인 리나레스(Linares)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심한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어려서부터 사제직에 대한 성소를 느껴 1889년 15살의 나이로 하엔에 있는 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90년에 철학 공부를 시작해 1893년 9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월부터 신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아버지가 병들면서 가족의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듬해에 장학금을 제공하기로 약속한 그라나다주(Granada州)의 과딕스(Guadix) 교구 신학교로 소속을 옮겨 신학 공부를 마치고 1896년에 부제품을 그리고 1897년 4월 17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성 베드로 포베다 신부는 과딕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른 여러 방면에서 교구의 직무를 맡아 봉사하였다.
그는 1900년 9월 세비야(Sevilla)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1901년 4월에 신학교의 영적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그는 과딕스 외곽 언덕의 대피소에서 사는 극빈자들, 일명 ‘동굴 거주자들’ 속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건립하고 어른들을 위한 연수회를 열어 전문적인 훈련과 예비신자 과정을 제공하며 3년 동안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하지만 그가 동굴 거주자들 안에서 이룬 성공적인 활동에 대해 교구 내 일부 동료 사제와 신자들의 시기를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몇 가지 오해를 받아 이 특별한 사도직에서 떠나야만 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과딕스를 떠나 에스파냐 북부 산간벽지에 있는 코바동가(Covadonga)로 향했고, 그곳에서 1906년 아스투리아스(Asturias)에 있는 코바동가 대성당의 참사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코바동가에서 그는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쏟아부었고, 에스파냐의 교육 문제에 대해 특별히 심사숙고했다.
그는 주님께서 그 시대의 교회와 사회에 새로운 길을 열도록 자신을 초대하셨다고 이해했다.
그는 전문적으로 교사들을 양성하는 일에 대한 논문과 소책자를 출판하기 시작했고,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현존과 활동의 필요성을 느끼는 다른 많은 사람과도 접촉했다.
신앙과 과학의 대립은 그 시대의 문화 안에서 더욱 분명해졌고, 이는 공교육 제도 안에서 탈(脫)그리스도화를 불러왔다.
성 베드로 포베다 신부는 과딕스에서의 사목적 체험과 코바동가에서 몇 년을 지내며 성찰하고 기도한 끝에 공교육 제도 안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굳건한 신앙과 전문적인 자격, 이 두 가지가 복음의 메시지를 살아있게 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경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1911년 6월 오비에도(Oviedo)에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아카데미’를 개설했다.
이는 교사들을 영성적 · 사목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헌신하는 평신도 여성단체인 ‘데레사 연합회’(Teresian Association)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그는 교구 사제들의 사도직 연합회와 함께 새로운 교수법 센터를 설립하고 교육 분야의 학술지를 창간했다.
그 후 그의 작업은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하엔으로 이어져 ‘창조적 교리교수법 센터’(Los Operarios Catechetical Center)의 영성 지도자와 사범대학의 교수로 활동했다. 1914년 5월에 그는 마드리드(Madrid)에 여대생들을 위한 기숙사 시설을 갖춘 아카데미를 설립했는데, 이는 에스파냐에서 처음 시도된 기관으로 학생들이 학업과 종교 교육에 대한 도움을 함께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에 데레사 연합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다양한 집단과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그들의 활동을 통해 하엔에서 교회와 시민사회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성 베드로 포베다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평신도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복음화의 새로운 길로써 데레사 연합회를 제시했고,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그들이 복음의 증거자가 되도록 양성해갔다. “굳건히 믿는 것과 침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말처럼 그는 모든 이들이 신앙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투신하기를 원했고, 자기 자신부터 그러한 소망을 실현하며 살았다. 1921년 그는 마드리드로 이동해 왕실 담당 사제로 임명되었다.
다음 해에 그는 문맹 퇴치 위원회의 위원이 되었고, 데레사 연합회를 위해 많은 시간을 헌신한 결과 1924년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그는 데레사 연합회의 직접적인 운영은 하엔에서 만난 호세파 세고비아(Josefa Segovia)에게 맡기고, 설립자로서 데레사 연합회가 나중에 칠레와 이탈리아로 전파될 때 데레사 연합회의 사명을 더욱 공고히 하고 촉진하기 위해 힘썼다. 1930년대 초 에스파냐에서 반성직주의가 만연하더니 1936년에 발발한 에스파냐의 내전으로 인해 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다.
마드리드에 있던 성 베드로 포베다 신부는 순교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면 기꺼이 순교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육계의 저명한 인물이고 진보적 성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 또한 혁명 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친구들의 권유에도 그는 마드리드를 떠나지 않았다. 1936년 7월 27일, 데레사 회관 경당에서 새벽 미사를 마친 후에 민병대가 들이닥쳐 그를 끌고 갔다.
그는 종일 혁명 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박해자들이 그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을 때 그는 당당히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제이다.” 그는 결국 신앙을 지키다가 다음 날 아침 총에 맞아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그렇게 그의 시신은 7월 28일 아침에 알무데나(Almudena) 묘지 근처에서 발견되었고, 그가 착용했던 스카풀라(Scapular)에는 심장을 관통한 총알 자국이 남았다.
그의 시신은 다음 날 산 로렌소(San Lorenzo) 묘지에 안장되었고, 1965년에 마드리드 인근 로스 네글라레스(Los Negrales)의 산타 마리아 영성 센터 경당으로 옮겨 모셨다. 1992년 12월에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의 순교를 인정하는 교령에 서명했고, 1993년 10월 10일 데레사 연합회 회원 순교자들과 함께 그를 복자품에 올렸다.
그리고 2003년 5월 4일, 에스파냐를 방문 중이던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드리드의 콜론(Colon) 광장에서 100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른 네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식을 거행하고 그들을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오늘날 데레사 연합회는 교육 및 문화 활동을 통해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참여하고 인간과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국제적인 평신도 단체로 30여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28일 목록에서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에서 사제이자 순교자인 성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가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전파하기 위해 데레사 연합회를 설립했으며, 교회 박해가 시작될 무렵 신앙에 대한 증오로 인해 순교하여 하느님께 빛나는 증거를 남겼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1건)
-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성 페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273-277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