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코

주교

루도비코

(Louis)

누수 · 루도비꼬 · 루도비꾸스 · 루도비쿠스 · 루수 · 루이 · 루이스

8월 19일📍 툴루즈(Toulouse)🕰 1274-1297년

성 루도비쿠스(Ludovicus, 또는 루도비코)는 1274년 2월 9일 시칠리아(Sicilia)의 왕인 앙주(Anjou)의 샤를 2세(Charles II)와 헝가리의 마리아(Maria)의 둘째 아들로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Provence) 지방의 브리뇰(Brignoles)에서 태어났다. 1284년 그의 부친이 아라곤(Aragon) 왕과의 해전에서 포로가 되었을 때, 석방 조건으로 그의 아들 세 명을 보내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져 성 루도비코는 두 형제와 함께 카탈루냐(Catalunya) 지방에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7년 동안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지내면서 여러 가지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하는 한편,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 OFM) 회원들의 영향을 받으며 교육을 받았다.

이윽고 그는 작은 형제회 회원과 함께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기도하며 철학과 신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1290년에는 폐결핵에 걸려 죽음이 임박한 듯했으나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겨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만약 회복된다면 작은 형제회에 가입하겠다는 약속을 자신의 스승인 두 명의 작은 형제회 수도자에게 했었다.

성 루도비코는 성장한 후 아버지에게 사제가 되겠다는 뜻을 밝혔고, 그가 여전히 포로로 잡혀있던 1294년 10월 7일 교황 성 첼레스티노 5세(Coelestinus V, 5월 19일)에 의해 리옹 대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이 조치는 1295년 4월 그의 후임자인 교황 보니파시오 8세(Bonifatius VIII)에 의해 철회되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강력한 개입으로 1295년 6월 7일 이탈리아 중부 아나니(Anagni)에서 아라곤 왕국과 나폴리(Napoli) 왕국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샤를 2세는 그해 8월에 장남인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카탈루냐로 향했다.

그리고 10월 31일 피게레스(Figueres)에서 아라곤의 제임스 2세(James II)와 앙주의 샤를 2세 사이의 회의 중에 성 루도비코와 포로들이 석방되었다.

석방 조건으로 아라곤 국왕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으나 그는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세속적인 모든 것을 물리치고 “나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게다가 형의 사망으로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지만, 수도회에 입회하려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의 뜻을 받아들였고, 성 루도비코는 동생에게 왕위 계승권을 양보하였다.

프로방스로 돌아온 그는 성당과 수도원을 방문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죄수들을 도왔다.

나폴리로 돌아온 그는 1296년 부제품을 받고 이어서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관면을 받고 22살의 나이에 나폴리의 대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설교와 자선을 통해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신분에 따른 제약과 책임 때문에 수도 생활을 선택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1296년 말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해 전임자가 사망한 툴루즈의 주교로 임명되었다는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었다.

젊은 나이에 그런 중책을 맡을 수 없다고 생각한 성 루도비코는 사임을 청하러 로마(Roma)로 갔다.

하지만 교황은 그에게 순종을 요구했고, 결국 그 뜻을 따르게 된 성 루도비코는 대신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겠다는 예전의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그해 12월 24일 작은 형제회 총장에게 수도복을 받고 종신서원을 했다.

그리고 사제복 안에 수도복을 감춰 입었다. 1297년 1월 13일 나폴리에 도착해 가족과 군중의 환영을 받은 그는 프랑스에 있는 새 교구로 향하는 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 여정 중에 그는 여러 도시에서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 들러 형제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해 3월 툴루즈에 도착한 성 루도비코는 원하지 않았으나 왕자에 걸맞은 화려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겸손하고 가난한 주교로서 주교직을 수행하고자 노력했다.

주교관을 수도원처럼 개조한 후 모든 화려한 물건은 배격하고, 작은 형제회 회원답게 그에 알맞은 의복과 음식에 만족하며 단순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

툴루즈에 도착하고 한 달 후에 그는 여동생과 아라곤의 제임스 2세의 초대를 받고 바르셀로나로 가서 한 달을 지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종조부(從祖父)인 프랑스의 성 루도비코 9세(8월 25일)의 시성식에 초대받았다.

그는 시성식 참여와 교구장 직분의 사임을 청하기 위해 로마에 가기로 했다. 7월 말에 프랑스 남동부 타라스콩(Tarascon)에 도착한 성 루도비코는 7월 29일에 성녀 마르타를 기념하는 설교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고향인 브리뇰에 있고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무더위 속에 여행을 계속했다.

병약한 몸으로 힘겹게 브리뇰에 도착해 아버지를 만난 그는 지병이 악화하여 8월 15일 노자성체를 모시고 19일 저녁 선종하였다.

주교로서 반년 만에 선종한 성 루도비코의 시신은 마르세유(Marseilles)로 옮겨져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성덕에 대한 명성으로 그의 무덤은 곧 순례지가 되었고, 마르세유 주교의 청원으로 시성 절차가 신속하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1317년 4월 7일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는 아비뇽(Avignon) 대성당에서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시성식 당시 그의 어머니인 헝가리의 마리아와 동생인 나폴리의 왕 로베르 1세(Robert I)도 참석하였다.

성 루도비코의 유해는 1423년에 아라곤의 알폰소 5세 왕의 군대가 마르세유를 침략했을 때 약탈당해 발렌시아 대성당에 안치된 후 그곳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19일 목록에서 프로방스의 브리뇰 성에서 거룩한 삶과 기적으로 유명한 작은 형제회 소속으로 툴루즈의 주교인 성 루도비코가 선종했고, 그의 유해가 마르세유로 옮겨져 작은 형제회 성당에 안장되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프랑스 프로방스의 브리뇰에서 성 루도비코 주교가 선종했는데, 그는 성 루도비코 국왕의 조카손자였으며 세상의 칭찬과 영예보다 복음적 가난을 더 간절히 원했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 나이가 어렸지만 성숙한 덕행으로 툴루즈의 교구장이 되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얼마 후 바로 주님의 평화 속에 잠들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1건)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루도비코 주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89-191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