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데군다

왕비 · 설립자 · 수녀

성녀 라데군다

(Radegund)

라데군드 · 라데군디스 · 라데군트

8월 13일🕰 +587년

성녀 라데군다(Radegundis/Radegunda)는 518년에서 520년 사이에 독일 중부 튀링겐(Thuringen)에서 비시누스(Bisinus) 왕의 세 아들 가운데 하나인 베르타하르(Bertachar)의 딸로 태어났다.

비시누스 왕이 사망한 후 튀링겐은 베르타하르와 그의 형제인 바데리히(Baderich)와 헤르미나프리드(Herminafried)가 분할 통치했다.

그런데 형제간의 권력 다툼으로 헤르미나프리드가 베르타하르를 전투에서 죽이고, 프랑크족의 왕 테우데리크 1세(Theuderic I, 511~534년 재위)와 동맹을 맺은 뒤에는 바데리히마저 살해하여 튀링겐 전체를 장악하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성녀 라데군다는 삼촌인 헤르미나프리드의 궁정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오빠와 함께 성장했다. 531년에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가 튀링겐을 정복한 후 헤르미나프리드는 폐위되었고, 성녀 라데군다는 오빠와 함께 프랑크 왕국에 인질로 넘겨졌다.

그녀는 아미앵(Amiens) 외곽 솜강(Somme R.) 기슭 아티(Athies)에 있는 왕궁에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고 538년에 베르망(Vermand)에서 누아용(Noyon)의 주교인 성 메다르도(Medardus, 6월 8일)에게 세례를 받았다.

성녀 라데군다는 라틴어를 배우고 교부들의 저서와 시를 읽었으며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데 헌신하였다.

왕궁에서 성장하면서도 굳은 신앙심과 겸손, 자선과 친절의 정신을 몸에 익혔다.

성녀 라데군다는 538년 또는 540년경에 튀링겐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려는 메로빙거 왕조 클로타르 1세(Chlothar I) 왕의 뜻에 따라 그의 여섯 아내 중 한 명으로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왕과의 결혼을 원치 않았던 성녀 라데군다는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페론(Peronne) 근처에서 붙잡혔다고 한다.

그들의 결혼식은 성 메다르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수아송(Soissons)에서 열렸다.

그녀는 수아송의 왕궁에서 살면서도 검소하며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실천하고 병자들을 돌보며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사면을 남편에게 간청하기도 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왕이 수녀를 아내로 맞이했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남편의 성격은 매우 난폭했으나 그녀는 인내하여 10여 년을 살았는데, 550년경 튀링겐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남편이 자기 오빠를 살해하자 더는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해 왕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성녀 라데군다는 왕궁에서 도망쳐 누아용의 성 메다르도 주교에게로 피신하였다.

성 메다르도는 고심 끝에 왕비의 청을 받아들였으나 클로타르 왕은 몇 번이나 그녀를 강제로 데려갔었고, 결국은 성 메다르도와 파리(Paris)의 성 제르마노(Germanus, 5월 28일) 주교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녀를 놓아주었다.

성녀 라데군다는 성 메다르도 주교의 도움으로 수도 서원을 하고 552년경 푸아티에(Poitiers)에 수도원을 세워 그곳에서 587년 선종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겸손한 수도 생활을 원했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아티의 왕궁에서 친하게 지낸 양녀 아녜스(Agnes)를 수녀원장으로 임명하고 평범한 수녀로서 가장 낮은 일들을 도맡아 했다.

푸아티에 수도원은 남녀 수도자가 생활하는 곳으로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녀 주변에 모인 여성들은 신앙심이 깊을 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다. 567년에 시인(詩人)으로 유명한 성 베난시오 포르투나토(Venantius Fortunatus, 12월 14일)가 갈리아 여행 중에 푸아티에에 도착했다.

그는 성녀 라데군다의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그곳이 바로 자신이 찾던 곳임을 깨닫고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 근처에서 지내면서 성녀 라데군다와 우정을 나누는 친구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에 사제품을 받고 수녀원의 고문이 되었고, 성녀 라데군다가 선종한 후인 600년경에는 푸아티에의 주교가 되었다.

성녀 라데군다의 수도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조각 유물로도 유명한데, 569년에 비잔틴 황제로부터 받은 십자가 유물을 모신 뒤에는 수도원 이름도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성 십자가 수도원(Abbaye de la Sainte-Croix)으로 변경하였다.

성 베난시오 포르투나토는 십자가 유물을 보고 영감을 얻어 유명한 찬미가인 “왕의 깃발이 앞장서니…”(Vexilla Regis prodeunt), “내 혀는 영광스러운 승리를 노래하리…”(Pange lingua gloriosi proelium certaminis) 등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590년경에 성녀 라데군다의 전기(Vita Radegundis)도 작성하였다.

성녀 라데군다는 570년에 아녜스 수녀원장과 함께 아를(Arles)로 여행을 갔다가 542년에 선종한 성 체사리오(Caesarius, 8월 27일)가 남녀 수도자들을 위해 작성한 수도 규칙서에 대해 알게 되었고, 돌아와서는 이 규칙서에 따라 자신의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성녀 라데군다는 생애의 마지막 몇 년을 완전하고 엄격한 은둔 생활로 보냈다.

그리고 587년 8월 13일 푸아티에에서 수도자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선종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은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11월 17일) 주교가 엄숙하게 거행했고, 그녀의 유해는 푸아티에 수도원 성당의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성녀 라데군다의 무덤에서 일찍부터 기적적인 치유가 보고되었고, 그녀의 이름은 이미 8세기 성 베다 존자(Beda Venerabilis, 5월 25일)의 순교록 명단에도 등장했다.

그녀의 축일 또한 8세기 이전부터 프랑스, 특히 투르에서 기념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13일 목록에서 푸아티에에 기적과 미덕으로 유명한 성녀 라데군다 여왕이 안장되어 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프랑스 아키텐(Aquitaine) 지방의 푸아티에에 프랑크 왕국의 왕비였던 성녀 라데군다가 있었는데, 그녀는 남편 클로타르 1세 왕이 살아있을 때 수도 서원을 하고, 자신이 직접 세운 푸아티에의 성 십자가 수도원에서 아를의 성 체사리오의 수도 규칙에 따라 생활했다고 기록하였다.

성녀 라데군다는 시대적으로 남성 중심사회에서 신분과 정치적 제약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념을 따라 살았던 여성으로 기억되며 많은 존경을 받아왔다.

성녀 라데군다는 푸아티에의 성녀 라데군다 또는 튀링겐의 성녀 라데군다로도 불린다.♣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