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Francis Xavier)

방지거 · 사베리오 · 사베리우스 · 사비에르 · 프란체스꼬 · 프란체스꾸스 · 프란체스코 · 프란체스쿠스 · 프란치스꼬 · 프란치스꾸스 · 프란치스쿠스 · 프랜시스

12월 3일🕰 1506-1552년

성 프란치스쿠스 하비에르(Franciscus Xavier/Javier, 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06년 4월 7일, 오늘날의 에스파냐 북부 바스크 지방(Basque Provinces)의 팜플로나(Pamplona) 교외에 있는 하비에르 가족성(城)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집안은 나바라(Navarra) 왕국의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그러나 1512년 아라곤(Aragon)의 왕이자 카스티야(Castilla)의 섭정인 페르난도 2세(Fernando II)의 침공으로 나바라 왕국 대부분이 점령당하면서 아홉 살 때인 1515년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계속되는 독립 전쟁 속에서 그의 형들도 자유 회복을 위한 전쟁에서 패해 1524년에 낙향함으로써 가문도 점점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열아홉 살이 되던 1525년에 몰락한 가문을 살리기 위해 프랑스의 파리(Paris)로 유학을 갔다.

그는 명문 파리 대학교에서 공부했는데, 학업뿐만 아니라 운동과 사교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나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다. 1529년에 그는 프랑스 사부아(Savoie) 출신의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1일)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예수회의 설립자인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도 그들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같은 지방 출신인 성 이냐시오는 과거 전쟁 중에 그와 반대편인 에스파냐를 위해 싸운 적이 있었다.

나이가 많은 성 이냐시오는 그가 사제가 되기를 바랐지만, 몰락한 가문을 세우기 위해 세속적 출세를 열망하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도 생각을 바꾸어 예수회의 설립회원 7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들은 1534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아침에 파리(Paris)의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에 있는 생 드니(Saint Denis, 오늘날의 Saint Pierre de Montmartre) 성당의 지하 묘소에서 서원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정결과 청빈 서원을 하고 예루살렘에 가서 선교 활동에 헌신하겠다는 서원을 했다.

그는 성 이냐시오와 다른 4명의 회원과 함께 1537년 6월 24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Venezia)에서 함께 사제품을 받고 그다음 해에 로마(Roma)로 파견되었다.

당장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기가 불가능해지자 그와 동료들은 선교에 대해 교황에게 순명하는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해 교황의 승인을 받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1540년 9월 27일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에 의해 예수회의 탄생이 승인되었다.

예수회가 성좌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은 해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시몬 로드리게스(Simon Rodriguez) 신부와 함께 예수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동인도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에서 발이 묶였다.

포르투갈의 국왕 후안 3세(Juan III)가 로드리게스 신부는 남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8개월을 하릴없이 지내다가 1541년 4월 7일에야 떠날 수 있었는데, 이때는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에게 인도의 교황대사 자격을 부여받은 뒤였다.

그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13개월 후인 1542년 5월 6일 인도 중서부 고아(Goa)에 도착했고, 5개월 동안은 병자와 죄수들을 찾아보는 일과 어린이의 신앙교육 및 그곳에 있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비도덕성을 바로잡는 일에 착수했다.

그 후 그는 인도의 남단 타밀나두(Tamil Nadu)에 있는 코모린 곶(Cape Comorin)에서 3년을 지내면서 파라바족(Paravas)을 사목하여 수천 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1545년에 그는 말레이시아의 말라카(Malacca)를 찾아갔고, 1546년부터 1547년까지는 뉴기니(New Guinea)와 인접한 몰루카(Molucca) 제도와 필리핀과 가까운 모로타이(Morotai) 섬을, 1549년부터 1551년에는 일본까지 왕래하며 왕성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일본에서 2년 반 정도 활동하면서 그는 불교의 용어를 사용해 교리를 전하고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며 영주와 무사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러면서 기존의 가난한 생활을 포기하고 학자의 모습으로 변신했는데, 그것이 일본에서 선교하는데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551년 12월 일본에서 몰루카로 돌아온 그는 2년 전에 도착한 편지 두 통을 받았는데, 그 한 통에는 그가 ‘인도와 그 너머의 나라들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듬해 1월에 인도의 고아에 도착한 그는 급한 일들을 처리한 후 일본에 이어 중국까지 들어가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우고 1552년 4월 17일 고아를 떠나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그는 산타 크루즈호를 타고 안토니우스(Antonius)라는 중국인 청년과 함께 그해 9월 초에 광둥항(廣東港)이 바라보이는 산첸(上川, 샹추안) 섬에 도착했다.

이 섬은 중국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그는 포르투갈인 정착촌에서 아이들과 병자들에게 선교활동을 하면서 광둥항으로 들어가는 배를 수소문하던 중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기력이 쇠진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결국 1552년 12월 3일(또는 2일), 중국 본토까지 불과 14km의 뱃길을 남겨두고 산첸 섬에서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산첸 섬에 묻혔다가 포르투갈을 거쳐 인도 고아의 봄 예수 성당(Basilica of Bom Jesus)으로 옮겨 은관에 담아 안치하였다.

흔히 그는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그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다양한 지역을 여행했고, 그가 개종시킨 교우 수만 해도 10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인도의 사도’ 또는 ‘일본의 사도’로 불린다.

그는 1619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바로 이어서 1622년 3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자신의 사부이자 동료인 예수회의 창설자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와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1748년에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그를 동방, 즉 희망봉 동쪽 모든 지역의 수호성인으로, 1904년에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는 그를 신앙 전파 협회의 수호성인으로, 1927년에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리지외(Lisieux)의 성녀 데레사(Teresia, 10월 1일)와 함께 ‘가톨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1952년에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관광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는 아미앵(Amiens)의 성 피르미노(Firminus, 9월 25일)와 함께 나바라(Navarra) 자치주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매년 3월 초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 하비에르 성으로 가는 대규모의 순례 행사가 열리는데, 이를 하비에라다(Javierada)라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3일 목록에서 12월 2일에 세상을 떠난 예수회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를 기념한다고 했다.

그리고 12월 2일 목록에서 이방인을 개종시키고 초자연적인 은사와 기적을 행한 것으로 유명한 예수회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중국의 산첸 섬에서 선종했는데, 교황 성 비오 10세는 그를 신앙 전파와 선교활동을 위한 예수회의 수호성인으로 정했고,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의 명에 따라 12월 3일에 그의 축일을 지낸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3일 목록에서 나바라 출신으로 예수회 신부로서 인도의 복음 전파자요 성 이냐시오의 첫 동료 중 하나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복음 전파의 불타는 열정으로 인도, 몰루카 제도, 일본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을 개종시키고 중국을 향하던 중 질병과 고난으로 지쳐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라틴어로는 프란치스쿠스 사베리우스(Franciscus Xaverius, 또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로 부른다.♣

출처 (9건)
  • 김민수 저, 아홉 성자의 선교 이야기 - '아시아에 온 최초의 선교사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서울(평사리), 2009년, 11-25쪽.
  • 김상근 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성사(서울), 2010년.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포교 사업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466-470쪽.
  • 알베르 주 저, 박금옥 역,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서울(성바오로), 1996년.
  • 앙드레 라비에 저, 엘렌 르브랭/김지수 공역,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생애, 서울(가톨릭출판사), 2001년.
  • 조지프 틸렌다 저, 박병훈 편, 예수회 성인들 - 예수회 고유미사에서 기념하는 성인과 복자의 약전, 서울(도서출판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4년, 327-335쪽.
  • 최익철 저, 우표로 보는 교회를 빛낸 분들 -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서울(으뜸사랑), 2014년, 163-167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6권 - '사베리오, 프란치스코',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8년, 3949-3953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서울(성바오로), 2002년, 301-303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