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부제 · 설립자 · 증거자

프란치스코

(Francis)

방지거 · 프란체스꼬 · 프란체스꾸스 · 프란체스코 · 프란체스쿠스 · 프란치스꼬 · 프란치스꾸스 · 프란치스쿠스 · 프랜시스

10월 4일📍 아시시(Assisi)🕰 +1226년

성 프란치스쿠스(Franciscus, 또는 프란치스코 [이] Francesco 프란체스코)는 1181년 또는 1182년에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Pietro di Bernadone)와 프로방스(Provence)의 귀족 출신인 어머니 피카 드 브를레몽(Pica de Bourlemont)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사업차 프랑스에 가 있었고, 어머니는 그에게 요한(Giovanni)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사업상의 이유 등으로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프랑스 사람’이란 뜻의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다가 기사가 될 꿈을 안고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Perugia) 간의 콜레스트라다(Collestrada)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1년간의 포로 생활 뒤에 이듬해 두 도시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아버지의 도움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그는 잠시 예전 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게 되었고, 1204년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다가 차차 회복한 뒤로는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기사가 될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1205년에 브리엔(Brienne)의 백작 발터 3세(Walter III)의 군대에 입대해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예루살렘(Jerusalem)으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Puglia) 지역으로 향하던 어느 날 밤, 그는 스폴레토(Spoleto)에서 환시와 함께 메시지를 들었는데,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려 하느냐? … 집으로 돌아가라.

거기서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겠다.”라는 내용이었다.

군대에서 나와 아시시로 돌아온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자 하며 종종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로마에 갔던 그는 1206년 성 베드로 대성당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나병 환자를 만나 입맞춤을 한 후에 삶의 전환점, 회심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자주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어느 날 폐허가 된 성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고쳐 세워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내다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고 했다.

이를 안 부친은 그를 작은 방에 가둘 정도로 분노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부친과 결별하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주교 앞에서 재산 상속권을 포기하길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응하며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벗어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알몸이 되어 가난한 삶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성 프란치스코는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본격적으로 ‘가난 부인’을 모시는 참회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한두 명 모여들어 함께 기도와 노동을 하며 극도의 가난 생활을 실천했다.

그들은 미사 중에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10)라는 복음 말씀을 듣고 자기들의 생활 방식으로 삼았다.

또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라는 말씀 등으로 힘을 얻어 공동생활의 틀을 마련해갔다.

이렇게 공동생활의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이고 함께하는 동료가 11명이 되자 성 프란치스코는 1209년 또는 1210년에 동료들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에게 자기들의 생활 양식을 인준해 주길 요청했다.

하지만 완덕에 이르는 복음적 권고를 기초로 작성된 회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판단한 교황은 처음에는 인준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런데 성 프란치스코가 쓰러져 가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떠받치고 있는 장면을 꿈에서 본 후 마침내 4월 16일에 구두로 인준해 주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회의 “첫 번째 수도 규칙”(Protoregula, Regula Primitiva)이다.

교황은 극도의 가난을 살고자 하는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11명의 동료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설교의 사명까지 주었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 O.F.M.), 곧 프란치스코회(Ordo Franciscanus)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본부는 오늘날 아시시 교외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 안에 있는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이었다.

교황의 인준을 받은 후 아시시 성문 밖의 작은 오두막에서 공동으로 생활하며 설교활동을 시작한 성 프란치스코는 1212년에 이미 수도자가 100명을 넘어서자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부터 나환자촌 인근에 폐허가 된 포르치운쿨라 성당과 인근 부지를 얻었다.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부터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했다.

성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은 이탈리아와 주변 나라들을 넘나들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의 생활을 실천하도록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했고 교계 진출 또한 사양하였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사제품을 받지 않고 부제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공동체는 날로 지원자가 늘어 여러 곳에 분원이 생겼다.

그만큼 그들의 청빈 생활은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212년 아시시의 명문가 출신인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도 그의 설교에 감명받아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과 친지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녀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아 뜻을 같이하는 몇 명의 자매들과 함께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현 클라라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216년부터 프란치스코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해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몇 개의 관구가 형성되었고, 1217년과 1219년의 총회에서는 잉글랜드(England)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의하는 등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무렵 성 프란치스코는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갈 정도로 선교와 순교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알 카밀(Al-Kamil)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성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총장직을 사임하였다.

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회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고, 우고리노(Ugolino) 추기경의 도움으로 회칙을 보완해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오 3세(Honorius III)에게 인준을 받았다. 1224년에 성 프란치스코는 라 베르나(La Verna) 산에서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9월 29일)을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을 금식하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고 그 고통에 참여하길 간절히 기도하였다.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무렵에는 자주 탈혼 상태에 빠졌는데, 3일 뒤인 9월 17일 새벽에 그는 십자가에 달린 세라핌 천사의 환시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받았다.

이것이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 성흔(五傷 聖痕, Stigmata)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상은 은총의 선물이었으나 그의 일생 내내 계속되면서 동시에 심한 육체적 고통도 안겨 주었다.

그는 오상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옷과 양말로 상처를 가리고 당나귀를 타고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을 다니며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기력이 쇠하여지고 눈마저 실명되어 갔다.

그런 고통 중에서도 그는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찬가’를 지어 외우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병세가 깊어진 1226년 여름에 그는 고향인 아시시로 돌아왔다.

잠시 아시시의 주교관에 머물던 그는 이 세상에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9월에 포르치운쿨라로 숙소를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미리 유서를 작성한 성 프란치스코는 죽음이 다가온 것을 깨닫고 알몸으로 자신을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가난 중에 임종을 맞이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수사들에게 요한 복음의 주님 수난기를 읽게 한 후 시편 142(141)장, “큰 소리로 나 주님께 부르짖네.”(Voce mea ad Dominum clamavi)를 노래하며 1226년 10월 3일 저녁에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다음날 그가 어린 시절에 다녔던 아시시의 성 조르조(San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선종 2년도 채 되지 않은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230년 5월 25일 그의 유해는 엘리아 형제가 그를 기념해 지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지하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지금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공경은 세계 곳곳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가 세운 제3회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도 다른 재속 회원과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그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979년 11월 2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평소 하느님의 창조물을 사랑했던 성 프란치스코를 생태계와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2015년 6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했는데, 회칙의 제목을 성 프란치스코가 바친 ‘태양의 찬가’ 후렴구에서 따왔다.

아시시의 가난뱅이 성 프란치스코만큼 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시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 프란치스코의 축일은 선종 다음 날인 10월 4일, 아시시 시내를 행렬해 성 조르조 성당으로 모신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는 10월 4일 외에도 9월 17일에 성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은 것을 기념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에는 축일의 중복을 피하고자 오상 축일은 삭제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4일 목록에서 움브리아 지방 아시시에서 증거자이자 작은 형제회의 설립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는데, 그의 생애는 거룩한 행적과 기적으로 가득하며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7월 15일)가 그의 삶을 기록했다고 전해 주었다.

그리고 9월 17일 목록에서는 작은 형제회의 설립자인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토스카나(Toscana) 지방 알베르니아(Alvernia, La Verna) 산에서 손과 발, 옆구리에 받은 오상 성흔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적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4일 목록에서 자유로운 젊은 시절을 보낸 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특별히 만난 후 움브리아 지방 아시시에서 복음적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성 프란치스코의 축일이라며, 그가 작은 형제회의 수도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선교 여행을 하며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팔레스티나 성지(Terra Santa)까지 가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했다고 했다.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따르려고 노력했던 그는 맨땅 위에서 삶을 마치는 선택을 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2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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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서울(성바오로), 2002년, 251-253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