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수자 · 설립자
성 프란치스코
(Francis)
방지거 · 프란체스꼬 · 프란체스꾸스 · 프란체스코 · 프란체스쿠스 · 프란치스꼬 · 프란치스꾸스 · 프란치스쿠스 ·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쿠스(Franciscus, 또는 프란치스코)는 1416년 3월 27일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 지방 코센차(Cosenza)의 파올라에서 아버지 자코모 마르톨릴라(Giacomo Martolilla)와 어머니 비엔나 다 푸스칼도(Vienna da Fuscaldo)의 세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가난하지만 신심 깊은 농부 부부였는데, 결혼 후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해 걱정하다가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10월 4일)에게 전구하여 임신과 출산한 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기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지었다.
그는 어린 시절 코센차 북쪽에 있는 산 마르코 아르젠타노(San Marco Argentano)의 수도원에서 프란치스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3살 때에 그는 산 마르코 아르젠타노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면서 기도와 금욕과 겸손의 삶을 배웠다.
이는 그가 아기였을 때 한쪽 눈에 병이 나서 거의 실명의 위험에 처하자 그의 부모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전구를 청하며 했던 약속을 이행한 것이었다.
그 후 부모와 함께 로마와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이 있는 아시시 등을 순례한 후, 15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소유지인 파올라 교외에서 홀로 지내다가 바닷가의 한 동굴에서 6년 동안 기도와 금욕을 실천하며 은거 생활을 전념했다. 1435년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와 영적 지도를 청하며 함께 생활하게 되자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는 작은 건물과 경당을 지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 동참하는 이들이 계속 늘면서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했고, 1454년경 코센차 교구의 대주교에게 허락을 받아 새로운 수도원 건물과 성당을 건축했다.
그들의 생활 규칙은 매우 엄격했는데, 극도의 청빈과 금욕을 실천하면서 겸손을 중요하게 여겼다.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1474년 교황 식스토 4세(Sixtus IV)로부터 ‘성 프란치스코의 은수자회’로 설립 허가를 받았고, 그 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에게 수도회 설립을 승인받으며 그 이름을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Ordo Minimorum, O.M., The Order of Minims)로 변경했다.
이는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작은 형제회보다 더 작은, 모든 수도자 중에서 가장 작은 수도자라는 겸손의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다.
그는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Sicilia)에도 수도원을 세웠고, 수녀회와 제3회도 설립했다.
그의 생활이 거룩하고 엄격했던 만큼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적인 영향 또한 지대했다.
그는 특히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예언의 은사를 받아 1480년 이탈리아 남동부의 오트란토(Otranto)가 튀르키예에게 점령당할 것과 나폴리(Napoli) 왕에 의해 탈환될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시칠리아에 갈 때 뱃사공이 항해를 거부하자 자신의 망토를 깔고 한쪽 끝을 돛 삼아 동료들과 함께 메시나 해협(Strait of Messina)을 가로질러 항해하기도 했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조카를 소생시켜 어머니에게 돌려주기도 했다.
이런 예언의 은사와 여러 기적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프랑스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갔다. 1483년 임종을 준비하던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Louis XI)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꼭 한 번 보기를 청했다.
루이 11세 왕은 성 프란치스코만이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비록 온전히 치유되지는 못했지만 루이 11세 왕은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큰 위로를 받고 만족해하면서 1483년 8월 30일 임종을 맞았다.
국왕의 아들로 왕위를 이은 샤를 8세(Charles VIII)는 성 프란치스코를 흠모해 계속 머물러 줄 것을 요청했고, 그의 친구가 되어 프랑스의 여러 곳에 수도원을 지어주었다.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는 생애의 후반기 25년을 프랑스의 플레시레투르(Plessis-lez-Tours) 성(城)의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일반 대중과 소르본 대학의 학자들 모두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많은 수도자와 은수자들이 그의 생활 방식에 매료되어 프랑스로 건너와 합류하면서 프란치스코회가 확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3개월 동안은 샤를 8세가 그를 위해 지어준 플레시레투르 수도원의 독방에서 고독하게 지내며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는 1507년 파스카 성목요일에 회원들에게 사랑의 실천과 엄격한 생활을 당부한 후, 다음날 총장 대리를 선출하고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한 다음 요한 복음의 주님 수난기를 들으면서 4월 2일 성금요일에 91세를 일기로 조용히 선종하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그가 설립한 수도회의 여러 수도원에 나뉘어 묻혔고, 1513년 7월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519년 5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1943년 3월 27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이탈리아 선원들과 해상 여행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그가 행한 많은 기적이 바다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축일은 4월 2일이지만 거의 매번 사순시기에 겹치는 관계로 그의 고향인 파올라에서는 그의 시성 기념일인 5월 1일에 지냈다.
그런데 시성식은 5월 1일에 거행되었지만 그 소식이 파올라에 전해진 것은 3일 뒤였기 때문에 5월 4일까지 그의 축일을 기념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4월 2일 목록에서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를 설립한 성 프란치스코의 덕행과 기적이 널리 알려져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4월 2일 목록에서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는 은수자로서 칼라브리아에서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를 설립하고 제자들에게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자선으로 생활하며 항상 사순절과 같이 음식을 먹도록 가르쳤다고 했다.
그는 루이 11세 왕의 부름을 받아 프랑스로 건너가 임종하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켰으며, 플레시레투르에서 검소한 생활방식으로 잘 알려진 삶을 살다가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그의 유해는 1562년 프랑스의 개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불태워졌으며, 프랑스 혁명 중에도 두 번째로 훼손되었다. 1935년과 1955년에 겨우 남은 그의 유해를 모아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안치하였다.♣
출처 (3건)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증거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463-466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2권 - '프란치스코, 파울라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6년, 9058-9056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파올라의 성프란치스코 은수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83-85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