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교 · 교부 · 교회학자
성 치릴로
(Cyril)
시릴 · 시릴로 · 시릴루스 · 치릴루스 · 키릴로 · 키릴로스 · 키릴루스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로마 제국의 황제 가문에 속한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듯하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동시대 인물들의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으며 수도승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는 335년경 예루살렘의 성 마카리오(Macarius, 3월 10일)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고, 342년 또는 345년에 예루살렘의 성 막시모(Maximus, 5월 5일)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한 성 막시모 주교는 예비신자들을 교육하는 중요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고, 여러 해 동안 교리 교육에 전념하던 그는 350년경 성 막시모 주교가 선종하자 그를 승계하여 예루살렘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 주교인 카이사레아(Caesarea)의 아카키우스(Accacius) 주교에게 주교품을 받았는데, 그로 인해 아리우스주의자로 오해받기도 했다.
하지만 성 치릴로는 그의 저서와 생활을 통해 아리우스주의의 반대자임을 분명히 했다.
결국 예루살렘에 대한 교계적 관할권을 주장하던 아카키우스 주교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해 그는 자신의 주교좌에서 해임되고 유배를 당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성 치릴로가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여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교회 재산을 불법으로 매각했다는 누명을 쓴 성 치릴로는 357년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후 타르수스(Tarsus)로 가서 반아리우스파 주교인 실바누스(Silvanus)의 환대를 받았다. 2년 뒤인 359년에 그는 셀레우키아(Seleukeia, 오늘날 튀르키예 남중부 메르신주[Mersin州]의 실리프케[Silifke]) 공의회의 결정으로 복직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아카키우스의 음모와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아리우스파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년 재위)에 의해 재차 추방되었다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361~363년 재위)에 의해 다시 복직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성 치릴로는 367년에 발렌스 황제(364~378년 재위)에 의해 세 번째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발렌스 황제는 전임 황제인 율리아누스가 이전에 추방되었던 모든 주교들을 소환한 결정을 다시 뒤집었다.
그래서 성 치릴로는 다시금 유배길에 올랐는데, 378년까지 11년 동안 계속된 가장 킨 유배 생활이었다.
이렇게 성 치릴로는 주교로 재임한 약 35년 중 거의 16년 정도를 유배지에서 보냈다.
마지막 유배 이후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79~395년 재위) 치하에서 생애의 마지막 8년을 평화롭게 보낼 수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성 치릴로는 부패와 범죄, 파벌 싸움과 이단으로 얼룩진 도시를 재건하는데 헌신하였다.
한편 379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 오늘날 튀르키예 남부의 안타키아[Antakya])에서 열린 공의회에서는 그동안 아리우스파로 인해 많은 혼란을 야기했던 예루살렘 교회를 조사하기 위해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1월 10일)를 팔레스티나(Palestina)로 파견하였다.
또한 성경에서 사용되지 않은 단어라고 해서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체임을 표현하는 용어인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를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성 치릴로에 대한 잡음도 조사 대상의 하나였다.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는 이미 325년 니케아(Nicaea)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경의 기본 용어이다.
성 그레고리오는 조사 후에 예루살렘 주교좌는 파벌주의와 아리우스주의로 뒤엉켜 있고 또 윤리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성 치릴로의 신앙과 그의 주교좌는 올바르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성 치릴로와 성 그레고리오는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성 치릴로는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주교로서 확실한 인정을 받았다.
사실 성 치릴로는 뛰어난 성서학자이자 설교가였다.
그의 작품 중에서 24편의 강론으로 구성된 “예비신자 교리”(Catecheses)가 가장 유명한데,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37년 재위)가 336년 예루살렘에 완공한 성묘 성당(Church of the Holy Sepulcher)에서 348년 사순과 부활 시기에 한 강론으로 예비신자와 새 영세자들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명쾌한 지침서이자 교리 해설서이다.
또한 전례적으로도 4세기의 팔레스티나 전례를 자세히 보여주는 소중한 문헌이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Socrates)와 소조멘(Sozomen)은 성 치릴로는 철저한 아리우스주의 반대자였고, 그의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386년경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는 성 치릴로는 동방 교회에서 일찍부터 성인이자 교부로서 공경을 받으며 3월 18일을 축일로 기념해 왔다.
가톨릭교회는 1882년 또는 1883년에 교황 레오 13세(Leo XIII)가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했는데, 특별히 교리 교육에 대한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18일 목록에서 예루살렘의 주교이자 교회 학자인 성 치릴로가 신앙 때문에 아리우스파로부터 많은 고난을 겪었고, 여러 번 주교좌에서 추방당했으나 결국은 평화롭게 영면했고 성덕으로 인해 널리 알려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의 순수함과 정통성을 증명하는 훌륭한 증거는 공의회가 교황 다마소 1세(Damasus I, 12월 11일, +384년)에게 보낸 서한에 담겨 있다고 전해 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예루살렘의 주교이자 교회 박사인 성 치릴로가 신앙 때문에 아리우스파로부터 많은 모욕을 당하고 여러 차례 교구에서 추방당하기도 했지만, 강론과 교리 교육을 통해 신자들에게 올바른 교리와 성경 그리고 거룩한 신비(전례)를 놀랍도록 잘 설명해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5건)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47-350쪽.
- 지그마르 되프 · 빌헬름 게어링스 편, 한국교부학연구회 하성수 · 노성기 · 최원호 역, 교부학 사전 – 키릴루스(예루살렘의), 강원도 횡성군(한국성토마스연구소), 2022년, 968-971쪽.
-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48-51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 - '치릴로, 예루살렘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5년, 8324-8325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예루살렘의 성치릴로 주교 학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76-78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