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마노

주교

제르마노

(Germanus)

게르마노 · 게르마누스 · 제르마누스 · 젤마노 · 제르맹

5월 28일📍 파리(Paris)🕰 +576년

성 게르마누스(또는 제르마노)는 496년경 프랑스 중동부 부르고뉴 지방 손에루아르주(Saone-et-Loire州)에 있는 오툉(Autun) 근처에서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와 에우세비아(Eusebia)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 제르마노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친구이자 시인인 푸아티에(Poitiers)의 성 베난시오 포르투나토(Venantius Fortunatus, 12월 14일)가 쓴 전기를 통해 잘 알려졌지만, 그의 전기는 기적 이야기를 지나치게 과장해서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성 제르마노는 어린 시절에 두 번이나 죽을 위험에 놓였었다.

첫 번째는 자녀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여러 방법을 동원해 낙태를 시도했으나 건강하게 태어났고, 두 번째는 유아 때 그를 돌보던 고모가 상속 재산을 노려 독이 든 포도주를 마시게 한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목숨은 건졌으나 평생 독의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그 후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경건한 사제인 사촌 스카필리온(Scapilion)의 따뜻한 환대와 도움으로 아발롱(Avalon)과 뤼지(Luzy)에서 공부하였다.

성 제르마노는 15년 동안 스카필리온 신부와 함께 은둔 생활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 후 성 제르마노는 부제품을 받았고, 530년에 오툉의 제18대 주교인 아그리피누스(Agrippinus)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아그리피누스 주교의 후임자인 넥타리우스(Nectarius) 주교는 성 제르마노의 성덕에 관해 듣고 540년에 그를 오툉 근처에 있는 생심포리앵(Saint-Symphorien)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수도원은 프랑스 남동부 칸(Cannes) 앞바다에 있는 생토노라(Saint-Honorat) 섬에 있는 레랭(Lerins) 수도원의 규칙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성실하고 금욕적인 성품으로 유명했지만, 너무 관대한 자선 행위 때문에 수도원의 모든 재산을 나눠줄까 두려워한 다른 수도승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는 555년에 파리에 갔다가 마침 세상을 떠난 에우세비우스(Eusebius) 주교의 후임으로 힐데베르트 1세(Childebert I, 511~558년 재위) 왕과 사제단과 시민들의 추대를 받아 선출되었다.

그는 주교좌에 오른 뒤에도 경건하고 검소한 삶을 이어갔다.

자신의 모든 수입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고, 당시 매우 가혹한 처우를 받던 죄수들에게 깊은 애정을 보여 ‘죄수들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성 제르마노 주교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불굴의 투지와 용기를 보였다.

그는 잦은 전쟁과 귀족들의 특권 때문에 생기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성을 다했다.

그는 제3차(557년)와 제4차 파리 교회 회의(573년) 그리고 제2차 투르(Tours) 교회 회의(566년)에 참석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또한 갈리아(Gallia) 지역에 여전히 남아 있던 이교도적인 관습을 일소하였고,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축제와 관련된 지나친 지출을 금하도록 왕을 설득하였다.

한번은 중병에 걸린 힐데베르트 왕이 성 제르마노의 기도로 기적적으로 치유되기도 했었다.

힐데베르트 왕은 542년경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여 사라고사(Zaragoza)를 포위했었는데, 그 도시가 사라고사의 성 빈첸시오(Vincentius, 1월 22일) 순교자의 보호 아래 있다는 말을 듣고 포위를 풀고 공격하지 않았다.

사라고사의 주교는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에게 성 빈첸시오 부제의 영대(領帶, stola)를 선물했다.

파리로 돌아온 왕은 이 유물을 모실 성당을 지었고, 성 제르마노는 558년 12월 23일 이 성당을 성 십자가와 사라고사의 성 빈첸시오(Sainte-Croix et Saint-Vincent)의 이름으로 봉헌하였다.

그날 힐데베르트 1세 왕도 세상을 떠났다.

성 제르마노는 성당 근처에 수도원도 세웠다.

힐데베르트 1세의 뒤를 이어 클로타르 1세(Chlothar I, 558~561년 재위)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재위 기간은 매우 짧았다. 561년에 그가 죽은 뒤 왕국은 네 명의 아들이 분할 통치했는데, 그중에서 샤리베르 1세(Charibert I, 561~567년 재위)가 파리의 왕이 되었다.

샤리베르 왕은 교회를 약탈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성 제르마노는 과감하게 그의 악행을 질책했고, 그가 두 명의 누이와 동시에 결혼하는 패륜을 저지르자 파문을 결정하였다.

샤르베르 1세가 죽은 후 남은 세 형제가 그의 재산을 놓고 다툼이 일어났다.

성 제르마노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은 평화를 보지 못하고 미리 예언한 대로 576년 5월 28일 파리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그가 봉헌한 성 십자가와 성 빈첸시오 성당 입구에 있는 성 심포리아노(Symphorianus, 8월 22일) 경당에 안치되었다. 7세기에 나중에 누아용(Noyon)의 주교가 된 유명한 금속 세공인인 성 엘리지오(Eligius, 12월 1일)가 웅장하게 그의 무덤을 장식하였다. 754년에 성 제르마노를 기념해 그가 묻힌 성당을 포함하는 수도원을 생제르맹데프레(Saint Gemaman-des-Pres)로 개명했고, 2년 뒤에 그의 유해를 중앙제대 뒤 가대석으로 옮겨 모셨다.

이 예식에는 피핀 3세(Pepin III)와 그의 아들 샤를마뉴(Charlemagne, 768~814년 재위)도 참석해 그의 유해를 운구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28일 목록에서 프랑스 파리에 성덕과 공덕 그리고 기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주교이자 증거자인 성 제르마노가 있었는데, 그에 관한 이야기는 성 베난시오 포르투나토 주교의 저술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다고 밝혔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오툉에서 생심포리앵 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한 후 파리의 주교로 선출된 성 제르마노가 파리에서 수도 생활을 유지하며 영혼을 돌보는 결실 있는 일에 헌신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1건)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0권 - '제르마노, 파리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4년, 7617-7618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