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사 · 주교
성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
(Justin de Jacobis)
유스띠노 · 유스띠누스 · 유스티누스 · 자코비스 · 저스틴 · 주스티노
성 유스티누스 데 야코비스(Justinus de Jacobis, 또는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는 1800년 10월 9일 이탈리아 남부 포텐차(Potenza)의 산 펠레(San Fele)에서 조반니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와 주세피나 무치아(Giuseppina Muccia)의 아들로 태어났다. 1812년경 14남매를 둔 그의 가정은 아마도 경제적인 이유로 나폴리(Napoli)로 이주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었고, 18살이 된 1818년 10월 17일에 나폴리에서 ‘라자로회’(Lazarists) 또는 설립자인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 9월 27일)의 이름을 따서 ‘빈첸시오회’로도 불리는 선교 사제회(Congregatio Missionis, CM)에 입회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2년 뒤인 1820년에 첫 서원을 하고 풀리아(Puglia) 지방으로 옮겨가 1824년 6월 12일 브린디시(Brindisi)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에 그는 설교자로서, 특별히 농촌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신앙의 진리를 쉽게 설명하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행정적인 능력도 뛰어나서 레체(Lecce)와 나폴리에서 수도원장직을 역임했고, 1836~1837년에 나폴리에서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는 환자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다. 1839년에 그는 평소에 소망했던 선교사 소명이 이루어져 에티오피아(당시에는 아비시니아[Abyssinia]로 불렸다) 선교지의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몇몇 동료와 함께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는 개인적인 소명뿐만 아니라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의 요청으로 정식 선교 사명을 부여받은 교황청 대리로서 파견된 것이었다.
그는 그해 10월 에티오피아 북부에 있는 아두아(Adwa)에 도착했으나 따뜻한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당시 아비시니아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지역 통치자들 간의 분쟁도 끊이지 않았다.
국민의 대부분은 무슬림이거나 콥트 정교회 신자로 오랜 가톨릭의 역사를 지닌 나라였지만 수 세기 동안 가톨릭교회와는 단절되어 있었다.
게다가 프랑크족이나 포르투갈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가톨릭 선교사들은 1632년부터 2백여 년 동안 에티오피아에서 추방되었고, 그 뒤에 빈첸시오회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한 것이다.
그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현명하게 대처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동료 사제와 함께 서서히 그 지방의 문화를 익히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정중한 태도로 대하면서 주민들의 친구도 되고 하인도 되면서 온갖 장애를 극복하며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에 대한 주민들의 무지와 중상모략으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면서 성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 신부는 방인 사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게다가 콥트 정교회 성직자와 당국의 오해를 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841년에 그는 콥트 전례 성직자들의 초청으로 에티오피아 사제 대표단에 합류해 카이로(Cairo)의 총대주교에게 갔다.
성 유스티노는 콥트 정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함께 방문했으나 카이로의 총대주교는 가톨릭교회와 어떤 관계도 맺으려 하지 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수도원장이자 대표단의 일원인 복자 게브레 미카엘(Ghebre-Michael, 7월 14일)을 설득해 로마(Roma)를 방문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로마 방문 중에 큰 감명을 받은 복자 게브레 미카엘은 1844년 쉰 살이 넘은 나이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성 유스티노 신부를 도와 에티오피아인들을 교육하면서 사제 양성에 필요한 교리서를 저술하고 각종 신학 서적들을 번역했으며, 1845년 괄라(Guala)에 설립된 성모 마리아 신학교에서는 방인 사제 양성을 담당하였다.
성 유스티노는 알렉산드리아 콥트 정교회의 총대주교나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수장인 아부나 살라마(Abuna Salama) 대주교의 적대감을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에티오피아 북부 지역에 여러 선교 기지를 설립하고 가톨릭교회를 세웠다. 1846년 괄라에 교황 대리구가 설립되면서 카푸친회 소속의 굴리엘모 마사이아(Guglielmo Massaia) 신부가 초대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에티오피아 남부의 비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시작하기 위해서 왔고, 성 유스티노가 준비한 몇몇 방인 사제 후보자들을 사제로 서품했다.
그리고 1847년에 성 유스티노를 닐로폴리스(Nilopolis)의 명의 주교로 임명하고자 설득했으나 성 유스티노는 선교활동에 대한 지원을 확신할 수 없고, 외국인 주교에 대한 반발이 심했기 때문에 거절하였다.
서양인 주교의 도착과 선교활동의 성장은 결국 살라마 대주교의 선동으로 박해를 일으키고 말았다.
신학교는 폐쇄되고 가톨릭은 파문되었으며 성 유스티노와 굴리엘모 마사이아 주교도 홍해 연안 마사와(Massawa) 섬으로 추방되었다. 1848년, 쫓기는 신세가 된 성 유스티노는 흩어진 신자들을 돕기 위해 닐로폴리스의 명의 주교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1849년 1월에 굴리엘모 마사이아 주교에게 비밀리에 주교품을 받고, 라틴 전례 주교로서 필요할 경우 옛 에티오피아 전례에 따라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특별 허가도 받았다.
성 유스티노 주교는 비밀리에 티그라이(Tigrai) 지방으로 돌아가서 에티오피아 교회의 미래를 위해 양성한 몇몇 후보자의 서품식을 거행했다.
그중에는 1844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복자 게브레 미카엘도 있었다. 1853년에 에티오피아의 가톨릭 교세는 20명의 방인 사제와 5천 명에 이르는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1855년에 아부나 살라마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은 에티오피아 사령관은 살라마의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가톨릭 신자에 대한 새로운 박해를 시작했다.
결국 성 유스티노 주교도 곤다르(Gondar)에서 체포되어 몇 달을 감옥에서 지내다가 추방형을 받고 외딴곳에서 풀려났다.
그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 오늘날 에리트레아에 속한 할라이(Halai)로 탈출해 겨우 순교를 면했으나 복자 게브레 미카엘 신부는 쇠사슬에 묶여 군대와 함께 이동하다가 고문의 후유증과 겹쳐 결국은 길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성 유스티노 주교는 그 뒤로도 신자들에게 돌아가려고 애쓰다가 다시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나 프랑스군의 도움으로 석방되기도 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할라이로 돌아가던 중에 열병에 걸려 1860년 7월 31일, 에리트레아 남부 알게디엔달렌(Alghedien-dalen) 계곡의 사막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인근 헤보(Hebo)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4세기에 에티오피아에 복음을 전파해 ‘에티오피아의 사도’로 불리는 성 프루멘시오(Frumentius, 7월 20일)의 뒤를 이어서,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에티오피아 교회의 재건자로 등장한 성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 주교에 대한 시복 절차는 1904년에 시작되었다.
그는 1939년 7월 25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5년 10월 2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교회 일치와 선교활동 모두에서 에티오피아 교회의 진정한 사도로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31일 목록에서 에티오피아에서 온화하고 자비심이 가득했던 선교회 소속의 성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 주교가 사도적 활동과 지역 성직자 양성에 헌신한 후 굶주림과 갈증, 고난과 투옥의 고통을 겪고 알게디엔달렌 계곡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였다.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희년을 맞은 1975년 전교 주일에 거행된 그의 시성식 강론을 통해 에티오피아의 사도로서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며 교회 일치를 위해 노력한 성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 주교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출처 (1건)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8권 - '야코비스, 주스티노 데',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1년, 5917-5918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