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
(Urban II)
어반 · 우르바누스 · 우르반
복자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또는 우르바노 2세)는 1035년경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Champagne) 지역의 샤티용쉬르마른(Chatillon-sur-Marne)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외드 드 라제리/샤티용(Eudes de Lagery/Chatillon)라는 이름을 얻었다.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그는 랭스(Reims)의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성 브루노(Bruno, 10월 6일)에게 신학을 배우고 1055년경부터 대부제(大副祭)로 활동했다.
하지만 수도 생활을 동경했던 그는 1068년경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마콩(Macon) 근처에 있는 클뤼니(Cluny) 수도원에 입회하여 성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성 후고(Hugo, 4월 29일) 수도원장의 지도하에 영적 성장을 이루었고 수도승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가 자신이 시작한 개혁 운동을 도와줄 수도승 파견을 요청했을 때, 성 후고는 복자 외드를 비롯해 여러 수도승을 로마(Roma)로 파견하였다.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는 1080년경 복자 외드를 오스티아(Ostia)의 주교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복자 외드 추기경은 1084년부터 1085년까지 프랑스와 독일에 대한 교황 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 황제(1056~1105년 재위)의 갈등 중에 끝까지 교황을 지지하여 황제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1085년 5월 25일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가 선종한 후 교황으로 선출된 복자 빅토르 3세(Victor III, 9월 16일)가 1086년 5월 24일에 착좌했으나 황제 측의 방해로 1087년 5월 9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축성될 때까지 몬테카시노(Montecassino)에 머물러야 했다.
게다가 대립교황으로 클레멘스 3세(Clemens III)가 등장해 교회의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교황 복자 빅토르 3세가 건강 악화로 1087년 9월 16일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한 후에도 로마는 여전히 클레멘스 3세의 지배하에 놓였고 개혁을 지지하는 추기경들은 도시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그로 인해 새 교황 선출까지 6개월이 걸렸는데, 1088년 3월 12일 로마 남쪽 테라치나(Terracina)에 모인 추기경들은 만장일치로 오스티아의 추기경인 복자 외드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고, 그는 우르바노 2세라는 교황명을 선택하였다.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는 즉위하면서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작업을 계속 이어갈 것을 선언했으나 적대적인 황제와 대립교황인 클레멘스 3세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보다는 더 온건하며 공의회를 통한 의견 수렴을 선호하였다.
그는 로마에 입성하기 전인 1089년 가을, 70명의 주교와 함께 멜피(Melfi)에 모여 개최한 교회 회의에서 성직매매와 성직자 혼인을 반대하는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시칠리아 왕국이 화해하고 분열을 극복하도록 했고, 그로 인해 그들의 도움을 받아 1090년 로마에 입성하여 교황좌에 착좌했다.
하지만 여전히 로마는 대립교황의 수중에 있었고, 하인리히 4세의 군사력도 막강해서 독일에서도 교황 지지 세력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 북부의 실권까지 장악하자 대립교황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을 차지하고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는 로마 밖으로 쫓겨났다.
그 뒤로 3년간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는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고 교회의 규정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당시 교황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프랑스 방돔(Vendome)의 수도원장인 그레고리오가 찾아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는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1094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095년 이탈리아 피아첸차(Piacenza)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에게 내린 파문이 정당함을 확인해주었다.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는 그해 11월 프랑스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의 노트르담 두 포르(Notre-Dame du Port) 성당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1089년의 칙령을 재확인하는 한편 ‘하느님의 휴전’(Treuga Dei)을 처음으로 선언했다.
또한 본처를 두고 재혼한 프랑스의 왕 필리프 1세(1060~1108년 재위)를 간통죄로 파문하였다.
그는 클레르몽페랑에서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도록 호소하고 격려함으로써 십자군을 규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는 그 사이에 다시 클레멘스 3세가 차지하고 있었던 로마에 당당히 입성하였다.
그렇게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와의 대립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고, 하인리히 4세 황제는 결국 이탈리아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노르만족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 남부에서도 세력을 강화했는데, 당시 시칠리아 지역은 사라센 제국의 세력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방 교회와 화해하고 재통합을 원했던 그는 1098년 10월, 교회 분열의 원인이었던 ‘필리오퀘’(filioque)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탈리아 남동부 해안도시인 바리(Bari)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180명의 주교가 참석하였다.
그중에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성 안셀모(Anselmus, 4월 21일)도 있었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였던 동방과 서방 교회 간의 화해와 통합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1099년 4월 로마에서 마지막 시노드를 개최하고 다시 한번 십자군 원정을 역설하여 많은 사람의 호응을 끌어냈다.
그리고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14일 뒤인 1099년 7월 29일, 그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기도 전에 선종하였다.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의 삶은 파란만장했고, 그의 재임 기간은 세속의 통치자인 하인리히 4세와 필리프 1세와의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 개혁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에도 앞장섰고, 서임권 문제에서는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교회의 중앙집권화와 교황청(Curia Romana)의 조직을 정비하고 재정 관리를 합리적으로 개선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의 시복식은 선종 800주년을 앞둔 1881년 7월 14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거행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19일 목록에서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가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의 뒤를 이어 학문과 종교에 대한 열정을 품었고, 팔레스티나 성지를 되찾기 위한 십자군 원정에 열정을 불어넣었으며, 교황 레오 13세가 오랫동안 이어져 온 그에 대한 공경을 승인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29일 목록으로 축일을 옮겨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가 세속 권력의 공격으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수호하고 성직매매와 성직자 부패에 맞서 싸우며, 클레르몽페랑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 전사들에게 십자가 표식이 있는 이교도와 주님의 무덤에서 억압받는 형제들을 해방하도록 촉구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3건)
- 루돌프 피셔-볼페르트 저, 안명옥 역, 교황사전 - 우르바노 2세, 서울(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년, 83-84쪽.
- 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 / 마이클 월시 저, 변우찬 역, 옥스퍼드 교황 사전 - 우르바노 2세, 왜관읍(분도출판사), 2014년, 249-252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우르바노 2세',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638-6640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