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교 · 추기경 · 순교자
성 요한 피셔
(John Fis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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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네스 피셔(Joannes Fisher, 또는 요한 피셔)는 1469년 영국 잉글랜드 북부 요크셔(Yorkshire)의 베벌리(Beverley)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나 베벌리 대성당 부설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483년에 그는 케임브리지(Cambridge)의 성 미카엘 신학교(오늘날의 삼위일체 대학[Trinity College])에 입학하여 윌리엄 멜튼(William Melton)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신학을 공부하였다.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1491년 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불과 22살의 나이에 교황청의 특별 관면을 받고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494년 교장이 되었고, 1497년에는 국왕인 헨리 7세(Henry VII)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Margaret Beaufort) 여사의 고해신부로 임명받아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501년 박사 학위를 받고 윌리엄 멘튼의 후임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 부총장이 되어 대학 개혁을 단행하였다. 1504년에 그는 총장이 되었고, 같은 해에 로체스터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총장으로서 대학교의 확장을 주도했는데, 마거릿 보퍼트 여사를 설득하여 그녀의 후원으로 1505년 케임브리지에 그리스도 대학(Christ College)을 설립하고 1511년에 성 요한 대학(St John’s College)을 설립하여 학장직을 역임하였다.
영국 내에서 저명한 인문주의자였던 성 요한 피셔는 신학 연구를 위해 영국으로 온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와 친분을 맺고, 성 요한 대학에 초청하여 그리스어를 가르치도록 주선하였다.
또한 독일의 인문주의자인 요하네스 로이힐린(Johannes Reuchlin)과도 교류를 이어갔고, 1516년부터는 성경 언어 연구를 장려하였다. 1514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종신 총장으로 임명된 그는 가톨릭의 기초 위에 새로운 문화에 접근하여 그 문화를 쇄신하려는 입장을 지닌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였다.
한편 1504년 10월 14일 국왕 헨리 7세의 추천으로 로체스터 교구의 주교로 선출된 그는 뛰어난 설교와 함께 성직자 개혁을 훌륭히 이끌었다.
그는 영국에서 가장 작고 가난한 교구였지만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오히려 학문 연구에 전념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만족하였다.
그는 가톨릭교회 내의 지속적 개혁 필요성을 주장했으나 영국 내에서 점차 확산하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년)와 종교 개혁가들의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여러 편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특히 성체성사의 실체 변화를 옹호하며 루터주의자를 비판하였다.
성 요한 피셔는 1509년 헨리 7세 왕이 서거했을 때 그의 장례식에서 설교를 담당했고, 후임 국왕인 헨리 8세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으며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왕비의 고해성사 담당 사제가 되었다.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레위기 20장 21절(“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그것은 불결한 짓이다.
그가 제 형제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므로, 그들은 자손을 보지 못할 것이다.”)을 근거로 이혼을 고려했고, 1527년 봄에 대법관인 토머스 울지(Thomas Wolsey) 추기경과 상의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캐서린은 헨리 8세와 결혼 전에 그의 형인 웨일스의 왕자 아서(Arthur)와 결혼했었는데, 결혼 직후 아서가 사망한 뒤에 헨리 8세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미 형의 미망인과의 결혼이 유효하다고 선언했던 성 요한 피셔 주교는 캐서린과의 혼인이 유효하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캐서린과 이혼하고 궁녀인 앤 불린(Ann Boleyn)과 재혼하려는 헨리 8세에 대한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의 결정이 지체되자 헨리 8세는 1529년 의회를 소집하고 교황으로부터 영국 교회를 분리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영국 의회는 1534년에 수장령(首長令, Act of Royal Supremacy)을 공포하여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의 유일한 최고 수장이며 주교 임명과 영국 교회의 모든 종교 문제 등에 대한 결정권과 개혁의 권한을 갖는다고 선포하였다.
수장령 반포에 앞서 헨리 8세는 1531년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영국을 분리했고, 모든 성직자는 이를 인정하고 그의 새로운 칭호인 ‘영국 교회의 보호자이자 수장’임을 받아들이는 서약(Oath of Supremacy)을 강요받았다.
그 과정에서 헨리 8세 왕과 캐서린 왕비의 혼인 무효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힌 성 요한 피셔 주교는 체포되어 감금되기도 했다. 1533년에 헨리 8세는 그에게 반역죄를 적용하기 위해 앤 불린과 재혼하면 몇 달 안에 왕이 죽으리라고 예언한 엘리자베스 바턴(Elizabeth Barton) 수녀의 환시 내용을 모두 보고하지 않고 부추겼다는 혐의로 그를 다시 체포하였다.
하지만 성 요한 피셔는 건강이 좋지 않아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1533년 초에 헨리 8세는 임신 중인 앤 불린과 비밀리에 결혼했고, 새로 임명된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로부터 캐서린과의 혼인에 대한 무효 선언을 받고, 앤 불린과의 혼인이 유효하다는 선언도 받았다. 1534년 수장령이 공포되면서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자녀들에게 왕위가 계승되어야 한다는 왕위 계승법도 통과되었다.
성 요한 피셔는 왕위 계승법에는 동의했지만, 헨리 8세의 첫 번째 혼인의 무효화에는 끝까지 반대하며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였다.
다른 모든 주교가 수장령을 따르겠다는 서약을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구원할 것이고, 나의 양심이 나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그리스도의 법을 계속하여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성 요한 피셔는 친구들과 반대자들의 설득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양심을 지켰다.
결국 그는 1534년 4월 고령에도 불구하고 수장령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여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와 함께 반역 죄인으로 런던탑에 감금되었다.
그가 런던탑에 갇혀 있는 동안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바오로 3세(Paulus III)는 성 요한 피셔 주교를 구하기 위해 1535년 5월 31일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에 격분한 헨리 8세는 “교황이 성 요한 피셔에게 붉은 모자를 보내준다 해도 그에게는 그것을 쓸 머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를 반역죄로 재판에 세우고 사형을 선고하였다.
결국 성 요한 피셔 주교는 1535년 6월 22일 타워 힐(Tower Hill)의 처형장으로 끌려가 분명한 목소리로 자신이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위해 죽는다며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하고, 마지막으로 ‘테 데움’(Te Deum)과 시편 30장을 노래한 후 참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성 요한 피셔의 시신은 옷이 벗겨진 채 온종일 처형대에 방치되었다가 런던탑의 모든 성인 성당(Church of All Hallows-by-the-Tower) 뒤뜰 묘지에 묻혔다.
참수된 그의 머리는 런던 다리(Tower bridge)의 장대 위에 매달려 있다가 2주 후인 7월 6일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순교한 후 그의 머리를 매달 차례가 되자 템스강으로 던져졌다.
성 요한 피셔의 죽음은 런던(London) 시민들 안에서 성 요한 세례자(Joannes Baptista, 6월 24일)의 순교와 비교되었고, 그의 순교일 또한 영국 최초의 순교자인 성 알바노(Albanus, 6월 22일)의 축일과 겹치면서 헨리 8세의 의도와는 달리 많은 사람이 그를 공경하며 묘지로 몰려들었다.
나중에 그의 유해는 친구인 성 토마스 모어와 함께 런던탑의 사슬에 묶인 성 베드로 성당(Church of St Peter ad Vincula)으로 옮겨 매장되었다.
성 요한 피셔 주교는 영국 교회의 내적 쇄신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정통 가톨릭 신앙 위에서 인문주의를 받아들인 사상가였다.
그래서 그의 사상과 저서는 트렌토(Trento) 공의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 토마스 모어와 함께 영국 왕의 수장령에 저항하고 가톨릭교회의 정통성을 수호한 순교자로서 공경받는데, 성 토마스 모어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낸 바 있다. “나는 지혜와 학식과 오래 단련된 덕행에 있어서 그와 비견될 만한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성 요한 피셔의 시복시성은 1850년 영국의 가톨릭 교계제도가 재확립된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성 토마스 모어와 다른 52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되었고, 순교 400주년이 되는 1935년 5월 19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성 토마스 모어와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성 토마스 모어는 1969년 전례력 개정 이전까지 7월 9일에 축일을 기념하다가 개정 이후 성 요한 피셔와 같은 6월 22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한편 1980년 성 요한 피셔와 성 토마스 모어는 영국의 종교 개혁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성공회의 성인 목록에 추가되어 7월 6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22일 목록에서 성 요한 피셔 주교와 성 토마스 모어는 영국의 국왕 헨리 8세의 이혼과 로마 교황에 대한 수위권 논쟁에 반대하다가 런던탑에 투옥된 순교자이며, 학식과 위엄으로 유명했던 로체스터의 주교 성 요한 피셔는 이날 국왕의 명령으로 감옥 앞에서 참수당했고, 고결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이자 대법관이었던 성 토마스 모어도 가톨릭교회에 대한 충성심으로 7월 6일 성 요한 피셔와 같이 순교에 동참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4건)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요한 피셔 주교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280-282쪽.
-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요한 피셔 성인과 토마스 모어 성인',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195-209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2권 - '피셔, 존',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6년, 1469-1535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요한 피셔 주교 순교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48-149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