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신부 · 설립자

요한

(John)

얀 · 요안네스 · 요한네스 · 이반 · 장 · 쟝 · 조반니 · 조안네스 · 조한네스 · 존 · 죤 · 지오반니 · 한스 · 후안

12월 17일📍 마타(Matha)🕰 +1213년

성 요한네스(Joannes, 또는 요한)는 1160년(또는 1154년) 6월 23일 오늘날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Provence) 지방의 포콩(Faucon)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귀족 가문의 신심 깊은 부모에게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인 에우페미우스(Euphemius)는 그를 마르세유(Marseille) 북쪽의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로 보내서 젊은 귀족에게 필요한 문법 · 검술 · 승마 등을 배우게 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늘 어려운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도와주도록 교육하며 모범을 보여준 어머니 마르타(Martha) 덕분에 매주 금요일이면 병원을 방문해 환자들을 돌보고, 부모가 보내준 생활비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선활동과 기도 생활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192년 12월에 32살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나중에 그가 설립한 삼위일체 수도회의 전승에 따르면, 성 요한은 그다음 해 1월 28일 첫 미사를 봉헌할 때 탈혼 상태에 빠져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탈혼 중에 붉은색과 파란색의 십자가를 손에 들고 흰옷을 입은 한 천사가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두 명의 포로(한 명은 무어인이고 다른 한 명은 그리스도인) 위에 양손을 펴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미사 후에 그는 이 환시가 무슬림에게 노예로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을 해방하는 일에 헌신하라는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노예 해방을 위한 사명을 시작하기에 앞서 기도와 피정의 시간이 갖고자 했고, 마침 모(Meaux) 교구 내의 한 숲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던 발루아(Valois)의 성 펠릭스(Felix, 11월 4일)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가 함께 지냈다.

두 성인은 기도와 단식을 실천하며 성령의 이끄심 속에서 몇 년의 시간을 보내며 그리스도인 노예 해방을 위한 수도회 설립을 계획했다.

그리고 1198년 로마에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에게 수도회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것이 ‘삼위일체 수도회’(Ordo Sanctissimae Trinitatis redemptionis captivorum, O.SS.T.)의 시작이었다.

초대 총장으로 뽑힌 성 요한은 교황의 축복을 받고 파리로 갔고, 성 펠릭스는 파리 북쪽에 있는 세르푸와(Cerfroid)에 삼위일체 수도회의 첫 수도원을 설립했다.

성 요한은 수도회 지원자를 모아 성 펠릭스에게 보내 수련과 함께 그들의 사명 수행에 필요한 덕목을 익히도록 했다.

그리고 세르푸와의 첫 수도원에 이어 나중에 교황으로부터 소유권을 양도받은 로마의 첼리오(Celio) 언덕에 있는 산 토마소 인 포르미스(San Tommaso in Formis) 성당에 두 번째 수도원이 설립하였다.

이곳의 수도회의 본부이자 성 요한의 거주지가 되었는데, 수도회 일부를 병원으로 개조하여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도 이 수도원에 종종 머물렀다고 한다.

성 요한과 삼위일체 수도회의 회원들은 1201년 처음으로 북아프리카의 모로코(Morocco)로 가서 86명의 노예를 속량해 해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202년과 1210년에는 모로코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는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해방하기 위해 튀니지(Tunisia)로 가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많은 이들을 구해냈다.

그는 해방된 이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삼위일체 형제회’를 설립해 수도자들과 함께 살며 직업 교육 등을 통해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다른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성 요한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의 여러 도시에도 수도원을 건립하고, 순회 강론을 통해 노예 해방을 위한 사람들의 관심과 후원을 받고자 노력했다.

그는 언제나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주시는 성모님께 의탁하며 이 모든 일을 이루어나갔다.

또한 달마티아(Dalmatia)로 파견된 교황 사절단에도 참여하여 이단 집단들이 교회와 일치하도록 하는 노력에도 동참하였다. 1212년경 그는 오랜만에 파리 근교 세르푸와 수도원에 있는 성 펠릭스를 방문해 그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지냈는데, 고령이었던 성 펠릭스는 1212년 11월 4일 세상을 떠났다.

성 펠릭스가 선종할 때 로마의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성 요한은 자기도 1년 뒤에 성 펠릭스의 뒤를 따르리라는 것을 알고는 기도에 몰두하며, 수도회의 형제들에게 노예 해방을 위한 일을 맡긴 후 1213년 12월 17일 평화로이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시신은 당시 삼위일체 수도회 본부로 사용하던 로마의 산 토마소 인 포르미스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후대에 몰수당한 성당의 노후화와 유해 보존을 위해 1655년 3월 19일 밤에 비밀리에 빼내어 에스파냐 마드리드(Madrid)의 삼위일체 수도원으로 이장하였다. 1966년 10월 그의 유해와 석관은 다시 살라망카(Salamanca)로 옮겨진 후 새로 건립된 마타의 성 요한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 요한에 대한 공적인 공경은 1666년 10월 21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 발루아의 성 펠릭스와 함께 승인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17일 목록에서 포로가 된 노예 해방을 위한 삼위일체 수도회를 설립한 마타의 성 요한이 로마에서 선종했는데,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 11세(Innocentius XI, 1679~1689년 재위, 8월 12일)의 명으로 칙령에 따라 2월 8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한다고 전해 주었다.

그리고 2월 8일 목록에서 12월 17일 선종한 삼위일체 수도원의 설립자인 마타의 성 요한을 기념한다고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로마 보편 전례력의 개정 이후 그의 전례 기념일은 선종한 날인 12월 17일로 되돌아갔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2월 17일 목록에서 로마의 첼리오 언덕에 프랑스 출신 사제인 마타의 성 요한이 있었는데, 그는 노예 해방을 위한 삼위일체 수도회를 설립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2건)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마타의 성 요한 증거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255-258쪽.
  • 남기은 편, 영성의 향기 - 수도회 창립자들의 영성, 서울(성바오로), 1998년, 64-66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