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피냐텔리

신부

요셉 피냐텔리

(Joseph Pignatelli)

메리 · 미르얌 · 미리암 · 요세푸스 · 요제프 · 조세푸스 · 조세프 · 조셉 · 조제프 · 주세페 · 쥬세페 · 피나텔리 · 호세 · 몬카요

11월 15일🕰 1737-1811년

성 요세푸스 마리아 피냐텔리(Josephus Maria Pignatelli, 또는 요셉 피냐텔리)는 1737년 12월 27일 에스파냐 북동부 사라고사(Zaragoza)에서 나폴리(Napoli) 출신으로 아라곤의 귀족이자 신성로마제국의 왕자인 안토니오 피냐텔리 데 아라곤(Antonio Pignatelli de Aragon)과 에스파냐 귀족 가문 출신인 프란시스카 몬카요 이 페르난데스 데 에레디아(Francisca Moncayo y Fernandez de Heredia)의 아들로 태어나 호세 피냐텔리 이 몬카요(Jose Pignatelli y Moncayo)라는 이름을 얻었다. 1743년에 어머니가 선종한 후 아버지는 자녀들을 데리고 이탈리아의 나폴리로 이주하였다.

그는 누나의 손에 자랐는데, 4년이 채 되지 않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형들은 12살이 된 성 요셉과 막내아우인 니콜라스(Nicolas)를 사라고사로 보내 예수회에서 교육받도록 했다.

그는 예수회 학교에 입학한 후 예수회 공동체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특별한 허락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수도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16살 때인 1753년 5월 8일 예수회에 입회하여 에스파냐 동부 타라고나(Tarragona)에 있는 수련소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2년의 수련기를 마친 그는 1755년 첫 서원을 하고 나서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 7월 31일)가 회심을 체험하고 “영신 수련”을 집필하기 시작한 만레사(Manresa)에서 1년간 고전문학을 공부한 후 3년 동안 칼라타유드(Calatayud)에서 철학을, 그리고 다시 사라고사에서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신앙심과 학문 그리고 자선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학교생활 중에 걸린 결핵으로 인해 평생 고생해야만 했다.

그는 17세기 초에 타라고나 수련소에서 입회해 평생을 아메리카 원주민을 위해 사도직에 헌신한 성 베드로 클라베르(Petrus Claver, 9월 9일)를 본받아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사로 파견되기를 원했지만, 만성화된 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꿈을 이루지 못했다. 1762년 주님 성탄 대축일 한 주일 전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고향 사라고사의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문법을 가르치며 뛰어난 교육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고 가장 불우한 사람들 속에서 사도직을 실천하고 싶어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 만나고 인근 감옥을 방문해 죄수들을 위로하였다.

특히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전하면서 ‘사형수들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사도직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예수회에 적대적인 이들의 공격과 정치공작이 본격화했고, 에스파냐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1767년 4월 3일 에스파냐의 왕 카를로스 3세(1759~1788년 재위)는 별다른 이유 없이 예수회원들을 에스파냐에서 추방하고 예수회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였다.

그로 인해 5천여 명의 에스파냐 예수회원들은 졸지에 거처를 잃고 추방되었다.

성 요셉 피냐텔리는 에스파냐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이었기에 동생이자 예수회원인 니콜라스와 함께 추방을 면할 수도 있었지만, 동료들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다.

연로한 사라고사 수도원의 원장은 그에게 원장직을 위임했고, 예수회를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모든 압력을 거부한 그는 동료들과 함께 타라고나 항구로 갔다.

그곳에서 다른 곳에서 온 예수회원들과 함께 배에 올랐는데, 관구장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망명 생활 동안 6백여 명의 예수회원들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13척의 배에 나눠 탄 예수회원들을 이끌고 석 달간 항해하면서 이탈리아 서부의 항구도시인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와 지중해 코르시카섬(Corsica Is.)의 바스티아(Bastia) 항구 등 여러 곳에 정박을 시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그들은 1767년 8월에 코르시카섬 최남단에 있는 항구도시인 보니파시오(Bonifacio)에 도착해 겨우 하선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성 요셉 피냐텔리는 뛰어난 지혜로 버려진 집들을 예수회 공동체의 숙소로 개조하여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런데 1768년 9월에 프랑스가 이탈리아 북서부 항구도시인 제노바(Genova)로부터 코르시카섬을 매입하면서 예수회원들은 그곳에서 다시 추방당했다.

그들은 제노바에 도착한 후 교황령인 페라라(Ferrara)까지 먼 길을 힘들게 걸어갔다.

다행히 페라라에서 성 요셉 피냐텔리의 사촌이자 훗날 추기경이 되는 프란치스코 피냐텔리 몬시뇰의 도움으로 잠시나마 휴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성 요셉 피냐텔리는 절망에 빠진 동료들을 위로하며 불굴의 용기로 힘을 북돋워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 평화 또한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은 예수회의 해산을 강력히 압박했고, 예수회를 강력하게 옹호했던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가 1769년 선종하고 후임으로 선출된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프랑스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왕들의 강력한 압력에 굴복해 1773년에 교황 칙서 “우리의 주님이요 구원자”(Dominus ac Redemptor noster)를 통해 예수회를 공식적으로 해산하였다.

그로 인해 전 세계 2만 3천여 명의 예수회원들은 더는 수도 서원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사제품을 받은 이들은 교구사제로 남았으나 평수사들은 평신도로 돌아갔다.

성 요셉 피냐텔리는 그 뒤로 약 24년 동안 주로 볼로냐(Bologna)에서 교구사제로 생활하며 예수회의 역사와 영성을 연구하고 관련 서적과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동시에 예수회의 복원을 위해 조용히 준비했는데, 다행히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1762~1796년 재위)가 교황의 교서를 무시하고 자신의 영토 내에서 예수회원들의 활동을 인정하고 벨라루스(Belarus) 지역으로 예수회원들을 불러 모았다.

성 요셉 피냐텔리는 교황청으로부터 백러시아(White Russia, 오늘날의 벨라루스) 선교를 위한 수련소 설립 허가를 받아내어 후보자를 양성하는 한편 예수회의 재건과 쇄신을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는 1799년에 그 당시 서유럽에 유일한 예수회 수련원인 파르마(Parma)의 콜로르노(Colorno) 수련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1803년에는 이탈리아 관구장이 되었다. 1804년 프랑스군이 파르마를 점령했을 때 예수회원들은 다시 추방되었고,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인 나폴리로 이동했다.

그런데 1804년에 나폴레옹 1세(1804~1815년 재위)가 에스파냐를 점령한 후 나폴리 출신이 아닌 예수회원을 모두 추방했다.

이때 추방당한 이들은 로마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교황 비오 7세(Pius VII)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그해 7월 30일에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의 예수회를 재건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예수회 재건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성 요셉 피냐텔리는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1807년 사르데냐(Sardegna)의 예수회 관구를 회복시켰고, 로마와 티볼리(Tivoli) 그리고 오르비에토(Orvieto)에서도 그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던 중 지병인 결핵이 악화하여 1811년 11월 15일 로마에서 평화롭게 선종하여 산 판탈레오(San Pantaleo) 성당에 묻혔다가 나중에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묻힌 예수회 성당(Chiesa del Santissimo Nome di Gesu)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성 요셉 피냐텔리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또 노력했던 예수회의 부활과 재건은 그의 선종 3년 후인 1814년 8월 7일 교황 비오 7세가 자의 교서 “모든 교회의 의무”(Sollicitudo omnium ecclesiarum)를 통해 예수회를 공식적으로 복권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는 1933년 5월 2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4년 5월 1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비오 12세는 시성식 강론을 통해 성 요셉 피냐텔리가 예수회를 복원한 인물이자 제2의 설립자로서 예수회가 탄압을 극복하고 그 기원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한 가장 빛나는 고리였다고 칭송했다.

실제로 그는 예수회의 설립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다음으로 예수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회원으로 여겨지며 예수회의 두 번째 설립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의 축일은 11월 28일에 기념하기도 했고, 예수회에서는 11월 14일에 기념하고 있으나 오늘날 교회의 전통대로 ‘천상 탄일’인 11월 15일에 기념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1월 15일 목록에서 예수회의 사제였던 성 요셉 피냐텔리가 소멸 직전에 놓인 예수회를 부활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자비심과 겸손함 그리고 도덕적 청렴함으로 탁월한 면모를 보였고, 언제나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힘쓰다가 로마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2건)
  • 조지프 틸렌다 저, 박병훈 편, 예수회 성인들 - 예수회 고유미사에서 기념하는 성인과 복자의 약전, 서울(도서출판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4년, 279-274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2권 - '피나텔리, 주세페 마리아',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6년, 9159-9160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